[삶과 문화] 여가에 담긴 정치

 

1980년대 초반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 예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광고가 나왔다. 한국에 새롭게 선보이는 운동화에 대한 광고였다. 대단히 도전적인 광고 카피를 던지고 광고는 종료되었다. '누가 나이키를 신는가!'

그 당시에 과연 누가 나이키를 신었을까? 나이스로 둔갑한 것이기는 했지만, 평범한 한국인들이 신었다. 아디다스가 들어오면 아디도스를 신고, 아놀드 파마가 들어오면 아놀드 파라솔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평생직장이 있었고 김장파동만 없다면 견디고 살 만했다.

● 시대 따라 달라져온 한국인 삶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1992년 7월 1일 음반시장·영화시장 등 여가문화산업시장 전면개방, 1996년 1월 1일 '지적재산권의 무역적 측면에 관한 협정 발효' 등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무언가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11월말 경제위기를 맞았다.

같은 해에 아시아 전체가 경제위기를 맞았고, 홍콩이 본토로 반환되었으며, 중국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환율을 끝까지 지켰다. 온 국민은 장롱 깊숙이 숨겨놓았던 금반지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내놓고 대신 휴지 조각이 된 한국 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미국 돈으로 바꿔서 빚을 갚으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조성된 공적 자금으로 망한 기업을 회생시켰고, 직장을 정상화시켰으며,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평범한 한국인 자신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같은 시기에 분식회계, 불법 경영권승계, 불법비자금 조성 등으로 재벌 총수는 불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재벌 총수는 경제성장에 기여한 만큼 경제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전락했다.

광주로 내려 간 정치인들은 5ㆍ18 전날 룸 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대화재의 와중에 주무 고위공직자는 골프를 치는 등 물의를 빚었다. 온갖 정치적 고통을 다 겪으면서 결국 청와대와 국회에 입성한 정치인들은 이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한 만큼 국민들에게 깊은 정치적 불신을 심어주었다.

이런 엄청난 사건들을 겪으면서 한국인들이 여가장면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팝송 대신 한국 대중음악을 듣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대신 한국영화에 빠져들고, 콜라 대신 매실음료를 마신다.
놀이동산 대신 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노벨문학상 받은 소설 대신 <서편제>를 읽는다. 세계화로 말미암아 초래된 경제위기를 넘어 세계화가 우리에게 약속했던 기회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한국인의 여가 실천은 '자유, 해방,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즐거움에 대한 추구'이기도 했지만 '저항과 투쟁'이기도 했다. 힘들었던 한국인의 여가 실천은 한류열풍이라는 메아리가 되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다. 이리하여 영웅적인 개인의 여가와 한국인의 여가는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 정치계절에 돌아본 한국인 삶

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에 대통령 후보들에게 권고한다. 대운하를 만드는 것이, 5년 안에 선진국이라는 꿈을 심어주는 것이, 행복의 나라로 가자고 외치는 것이, 중통령의 시대를 여는 것이 대통령 되는 길이 아니다.

내 목소리를 낮추고 이 나라의 진짜 주인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은 다시 침묵하고 있다. 다만 일상적인 여가 실천을 통해 세상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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