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02.07.09 05:09

홍석천의 커밍아웃과 플라토닉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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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따뜻한 시선을 꿈꾸며...

홍석천의 커밍아웃과 플라토닉 러브


지난해인가. 잠시 한국에서는 홍석천이라고 하는 탤런트의 커밍아웃 선언으로 장안이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시원하게 밀어오린 머리에 예사롭지(?) 않은 목소리 톤과 우아한(?) 연기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던 그는 그 즈음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후에 지면을 통해 살펴본 그의 커밍아웃에 대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당시 ''뽀뽀뽀''란 한국의 고전 유아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게 되면서부터 라고 한다.

그 프로그램에서 홍석천씨는 때묻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정직해라, 성실해라, 어른들 말씀 잘 들어라" 등등의 지고의 윤리 교육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고 있었단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읊조리고 있던 반복적인 훈령 속에서 문득 그는 이중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는 쉼 없이 정직할 것을 강요(?)하면서 그 스스로는 다양한 핑계(?)들로 무장하여 ''정직''과는 담쌓고 사는 도팰갱어(이중 인격자)의 모습을 이제는 스스로 더 이상 감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TV연예프로그램 리포터의 유도질문에 가감 없이 스스로가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게 되고.. 후에는 정식으로 커밍아웃을 하게되어 그 이후 한국 사회에 큰 방향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 이후 이와 관련한 많은 토론 프로그램들이 있었겠지만, 전통적으로 토론과는 담쌓고 있고 전혀 제대로 된 토론문화를 배워본 적도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 문제가 실속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 어떠한 결실을 볼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모처럼 한국에 들어가 그곳의 토론 프로그램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 우리 나라 사람들은 토론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들 그렇게 말주변이 없는가 답답한 마음이 무시로 일어난다. 분명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학자요, 교수요, 국회의원이요, 전문가들인데... 하나같이 토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분명하고 명쾌한 언어 구사와 타인의 견해에 대한 경청, 그리고 올바른 이해 등에 도저히 재주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지... 아님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현상인지... ''말 잘하면 사기꾼''이라는 식의 전통적인 교육윤리(?)가 너무 설쳐서인지.... 이곳 독일에서 벌어지는 토론프로그램들과 비교해보면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고 이번에는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을 핑계로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서 한번 검토해 보고자 한다.

플라토닉 러브... ''남녀간의 육체적인 접촉이 없이 순전히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혼적으로 교류하는 지고 지순의 사랑''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사전적인 이해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한 방식에 지고 지순의 이데아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정립한 플라톤의 이름을 붙인 것 또한 크게 모나 보이지는 않는다.

플라톤이라고 하는 인물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을 통하여 소크라테스를 성인으로까지 추앙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고민하던 윤리의 문제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게 된다. 뭐, 플라톤에 대한 소개는 후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 정도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플라톤 사상에 있어서도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은 중요한 비중으로 취급되기는 하지만.... 앞서 정의한 정신적 사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인 스스로가 플라토닉 러브란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이름은 후세의 사람들이 플라톤의 사상적 특징을 고려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추정하기를 그의 ''심포지온'', 즉 ''향연''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진술에서 이 ''플라토닉 러브''라고 하는 개념이 나왔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잠시 관심을 당시 희랍세계로 옮겨보아 과연 플라톤이 생각하던 사랑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엿보기로 하자. 물론 타임머신을 타고 2천년도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고, 단지 그 당시 정황을 옮겨주고 있는 몇 권의 책들에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겠다. 여기서 필자가 신세를 지고 있는 서적은 다음과 같다. 제목은 "Die Prostitution"이라는 두 권으로 구성된 독일어 책인데, 각각 1권은 1912년과 그리고 2권은 1925에 출판되었다. 우리말로 제목을 옮겨보자면 "매춘(賣春)" 혹은 "매춘의 역사" 정도가 되겠다. 책을 쓴 이는 이반 블로흐(Iwan Bloch)라는 의학박사인데, 그 스스로가 1906에 독일에서는 최초로 "성과학"(Sexualwissenschaft)란 용어를 사용한 사람이다. 이 양반은 이 책을 통하여 인간의 성생활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행하고 있다. 제목만 보면 마치 무슨 야한 책 같기도 하겠지만... 더럽게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무진장 어려운 책이다. 서양전통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문화와 성담론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무척 탐구적인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고대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상세한 ''성 풍속도''를 의학자의 눈으로 담아내고 있다. 블로흐 박사는 첫 번째 책을 저술한 후 10년 후인 1922년 사망하게 된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은 그가 모아놓은 자료집과 수고들을 정리하여 후학들이 1925년에 편찬하게 된다. 그 중 필자가 참고한 책은 1912년에 베를린에서 출판된 초판이다. 능력 있는 번역자들에 의해 이 정도의 책들은 우리말로 옮겨졌음 하는데... 글쎄 관심이 있는 출판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 책에 나와있는 플라톤 당시 그리스의 성 풍속도는 다음과 같다. 간단히 말하면 당시 유행하던 성문화는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동성애''가 더 중시되고 또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물론 이는 당시의 문화적 편견 속에서 여성들에 대한 가치평가가 상당히 추락하고 있었던 시대라고 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여성 폄하 경향은 플라톤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현대의 데까르뜨라고 불리고, 또 요즘 동양학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도올선생도 무진장 좋아하는 화이트헤드라고 하는 철학자가 극찬해 마지않던(그는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감히'' 선언하였다) 플라톤은 최근의 여성단체들이 보기에는 타도해야 할 첫 번째 주적(主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플라톤 자신이 남긴 많은 글들 속에 그는 여성들을 참으로 가치 없는 존재로, 심지어 신들의 저주를 받은 존재들로 폄하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속물 투성이인 여성들하고의 사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심지어 여성이 필요한 것은 단지 생산을 위해서뿐이라고까지 보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남녀''가 아닌 ''남남''의 사랑이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 형성되는 남남의 사랑은 동일한 세대의 남남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쪽은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신사이고, 그 상대편은 아직도 풋풋한 10대의 소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에 성적인 접촉은 있었는가? 물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에는 상당히 지성적이고 정신적인 교류 역시 전제해 있기도 하다. 당시 남남 파트너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교사의 역할도 담당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당시 소년들은 한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그로부터 철학적, 혹은 사상적 교류를 통하여 지식과 정보를 보급 받고, 그 대가로 선생에게 성적인 봉사를 해주는 관계가 당시의 유행하던 성풍속도의 모습인 것이다. 그 자리에 여성들이 설자리는 별로 없었다. 이 지고의 사랑을 유지하는데 여성들의 역할은 아주 미미한 것이다. 서슬 퍼런 이성(理性)을 가지고 세계를 논하고, 우주를 썰(說)하는 데 여성들이 낄 자리는 구조적으로 전무하였던 것이다. 단지 그들은 후손을 위한 계획에서만 여성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리 살펴보니, 참으로 기나 긴 세월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당시 잘나가던 지배층의 인사 치고 동성애자 아닌 이가 없었다는 말이니....

세상은 그처럼 쉬 변하고, 또 바뀌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뒤섞여 돌고 있을 때, 갑자기 눈물을 뿌리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동자 앞에서 자신의 거짓을 계속 고집할 수 없었노라고 고백하던 홍석천씨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의 이 순전한 고백으로 인해 해맑은 아이들의 교육에 악영향이 끼쳐진다고 악악대는 그 옆의 어른들도 눈 속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그 어른들은 10대의 소년을 품에 안고 이데아의 지고지순한 세계를 논하고 있는 이 서양철학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또 무어라 소리할런가?

이미 인간의 성문제에 대해서는 "여자란 무엇인가"란 이곳의 다른 칼럼에서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을 밝혔기에 더 긴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 모두는 남녀 이전의 인간으로서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따뜻함을 너무 많이 상실한 것 같다. 좀더 세밀하고 자세한 눈 살핌으로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를 바라보았음 하는 소망이 가득하다.

과연 우리를 규정하고 정의 내리는 것이 ''염색체의 차이''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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