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2004.12.18 21:57

꽃피는 봄이오면

조회 수 2313 추천 수 31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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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수채화를 보고 싶어집니다. 세상이 너무 자극적이라서 그런가요? 그냥 마알간 소녀의 보조개처럼 그렇게 마음을 말갛게 씻어줄 수 있는 무언가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무언가 그런 자극을 줄만한 소재를 구하다가 어쩔 수 없이 또 몇편의 비디오를 빌리기로 했습니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내가 전화를 합니다.

"어떤 거 빌릴까? 난 잘 모르니까, 자기가 보고 싶은 거 있음 빨리 말해"

퇴근하고 돌아오는 틈에 비디오 가게에 들른 아내의 성화가 소나가처럼 퍼붓습니다.

"그냥.. 최민식이 주연한 건데.. 꽃피는 봄인가 뭔가 있으면 한번 가져와봐~"

저 역시 지나치듯 이야기합니다. 얼핏 영화개봉 시 대강의 스토리와 주연을 맡은 최민식의 인터뷰를 들은 기억이 나서였고, 또 하나는 음악을 소재한 영화라고 해서 흥미도 가서 그랬습니다.

또 하나는 근자들어 강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최민식이란 배우의 새로운 호흡도 맛보고 싶어서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넘 자극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귀에 들리는 것이든, 입에 맛을 주는 것이든, 좀더 자극적이고 쎄고, 강하여 한번 각인되면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들이 우리 환경에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 몸에 의식에 쏘여져 남게된 그 강한 기억은.. 때로는 감동이란 이름으로 치장하기도 하지만, 소화되지 않은 그 무엇처럼 여전히 역겨운 그림자로 남겨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쉬리', '올드보이'등으로 강하고 자극적인 역으로 전념했었던 한 사내의 또다른 변신을 목격해보고 싶었습니다.

꼭 피를 보고, 강한 자극을 보고, 스펙터클한 폭력을 봐야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꽃피는 봄이오면"은 그런 자극을 배제한 몇 안되는 영화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자극적인 시각장치에만 익숙해져서 이런 류의 밋밋한 영화를 만나게 되면 쉽게 '지루함'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진지한 '지루함'은 간혹 경험해 봐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류창하 감독은 '파이란', '봄날은 간다'의 조감독으로 나섰다가 이 영화를 데뷔작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정신 사나운 한국 영화계 환경에 조용한 수채화 하나를 관객들에게 선사하는데 성공한듯 싶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이 정도의 이야기 거리에 지루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만큼 일상 자체에 매몰되어 일상의 참맛을 모르고 사는 분주한 인간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커다란 반전도 없고, 이야기의 맺음도 불분명하고, 멋진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적잖은 돈을 투자하고 시간을 죽이러 온 이들에게 만족을 주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잠시 분주한 우리의 환경에서 잠시 발을 빼 거울 속의 우리를 비추어본다면, 이러한 조용한 속삭임의 소중함을 깨우칠 수도 있을 겁니다.

음대를 졸업하고, 트럼펫으로 연주활동을 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30대 노년 현우의 탄광촌 중학교 관악교사의 일상을 담은 이 영화는.. 스토리와 구성보다는 그냥 자연스레 흘러가듯이 영화를 느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몇몇 군데 지극히 작위적인 장면들이 아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도 이 정도의 지루함을 깔끔함으로 꾸며낼 수 있는 감독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정말 한국 영화 많이 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우역으로 옷을 갈아입은 최민식.. 올드보이의 시큼한 때가 언제 있었냐는듯.. 찌든 30대의 모습을 가슴깊이 잘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좋은 배우'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 붙이면.. 제가 이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재조를 높이 사는 이유는.. 그의 카메라 워크에 있습니다. 그렇게 폼내지 않고, 재주를 부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감독이 스쳐가는 시선을 그의 카메라 역시 잘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시선을 렌즈라고 하는 차가운 대상체가 아닌, 그의 시선에 반추되는 영상으로 인식하게끔 만드는 그의 솜씨였습니다. 카메라의 각도와 빛이 세기, 색의 톤을 조절하면서 적고있는 감독의 수필을 관객들이 읽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요(물론 그것을 마무나 느끼고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그런 점에서 류감독의 다음 작품에 적잖은 기대가 갑니다.

선배들이 쉽게 그랬던 것 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도사가 된듯한 자세에게 작품생활하는 짓거리만 안한다면 그는 색깔있는 작가감독으로서 이름을 분명히 새길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듯 해 보입니다.

한국의 가장 큰 질병인 '大家病'만 조심한다면 그는 수채화같은 시선을 카메라에 옮길 수 있는 좋은 감독으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 갈기님에 의해서 게시물 카테고리변경되었습니다 (2005-08-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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