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2007.06.20 12:16

카핑 베토벤 (Copying Beethove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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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요상하죠? 여기서 나오는 copy는 작곡가의 친필 악보를 필사한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작곡자들의 악보는 정신없이 혼란스럽습니다. 물론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짜르트처럼 한방에 그냥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천재도 분명있겠지만, 대부분은 초벌을 고치고 수정하고, 또 주석을 다는 등.. 정신없는 상태이지요. 따라서 이 악보를 가지고는 연습도, 출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정리안된 악보를 남들이 볼 수 있게, 그리고 출판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바로 필사인들이 하게 되죠. 그러다보니 작곡가의 필사자들도 어느 정도 음악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냥 대충 선생의 악보를 정리했다가는 창작품을 그냥 장작품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베토벤이라는 거장을 타이틀로 걸고있지만, 실상은 작곡자의 필사인에 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 속에 필사인으로 등장하는 안나 홀츠라는 이름의 20대 초반의 작곡가 지망생 아가씨는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귀가 먹은 베토벤이라는 거장의 말년에 어떤 식으로든 다양한 이들의 도움을 받았을 추정 하에 극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여하튼 성질 괴팍한.. (그 정도 환경과 재능을 가지고 성질까지 좋아버리면.. 어떡하죠?) 베토벤은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이 될 9번 합창의 창작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의 악보를 필사하던 이가 몸이 쇠약해진 관계로 새로운 필사자를 찾게 되고, 그때 베토벤의 눈 앞에 등장한 것은 손녀뻘 되는 새파란 안나 홀츠라는 한 아가씨였습니다.

영화는 대략 이런 만남을 통해 진행됩니다. 그리고 긴긴 시간 무척 지루하고도 따분하게 이들의 대화를 통하여 베토벤이라는 영혼의 작곡가가 가지는, 혹은 가졌을 음악철학에 대한 심도깊은 강의를 진행합니다. 바로크에서 고전파로, 그리고 고전파에서 낭만파로 음악적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베토벤의 예술 철학을 나름대로 이 영화는 걸죽하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영혼이 빠진 음악..
음악은 신의 소리야..
작곡자는 그 소리를 훔쳐 듣는 이들이고..
음악은 귀가 아니라 배로도 느끼지..
왜 음악에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지..
음악은 자유, 그 자체야..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일상이 음악이요 소리야.. 그걸 들으면 손으로 쓰지 않을 수 없지..

뻔할 수 있는 베토벤의 대사는 음악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의 허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주는듯 합니다. 여하튼 영화는 이런 매우 소소하고, 또 단촐한 주제를 가지고 두시간 가까이 끌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심금을 울리는(서양악기를 사용하면서도... 심장을 이처럼 두근거리게 하는 이는 베토벤이 최고가 아닐까 싶네요) 다양한 이 야수(베토벤의 별명이기도 합니다)의 음악이 군데 군데 영화의 지루함을 몰아내 줍니다.

결국 이 영화는 무려 십여분 이상이나 9번 교향곡의 초연 실황을 중계(?)하고 있는데, 전 이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초연을 앞둔 베토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이 될 작품이긴 하지만.. 그래서 꼭 스스로 초연을 지휘하고 싶지만.. 문제는 그의 귀였습니다. 모든 음악은 자신의 심장 안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을 재연하는 이들과의 교감은 귀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리고, 고통스럽고, 절망에 빠진 이 거장 앞에 안나 홀츠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즈막히 공기를 갈라 베토벤의 심장에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여기 그들의 기막힌 대사가 있습니다.


안: 절 보자셨어요?
베: 칼(베토벤의 조카)이 안왔다고?
안: 안왔어요
베: 아픈가봐
안: 분명 그럴거에요
베: 올 수 있었으면 왔을거야
안: 제가 있잖아요
베: 모두들 내가 침묵 속에 사는줄 알아. 그렇지않아
내 머릿속엔 소리로 가득차있어 절대 멈추지 않아
나의 유일한 위안은 그걸 쓰는 거야. 신이 내마음을 음악으로 감염시켰어
그리곤 어떻게 했지? 귀머거리로 만들었어
내게서 모든 사람이 갖고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어, 내 곡을을 듣는 즐거움을
그게 신의 사랑인가? 친구가 할 짓이냐구?
안: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예요
베: 내 아버지는 사나운, 주정뱅이였어
신이 내 아버지면, 인연을 끊겠어
아마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자네 생각은 어때?
안: 하느님께서 선생님께 말씀하시는 거라 생각해요. 전 알아요
베: 이거 못하겠어, 안나 홀츠.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루게 못해
안: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선생님이 절 보실 수 있는 곳에 서있을게요
제가 박자를 맞춰드릴게요, 들어가는 곳도 알려드리구요
걱정 마세요
베: 그들도 왔어? 독수리들?
안: 네
아치듀크(대공)
모든 작곡가들
비엔나 사람들 모두요
베: 내 겉옷 주게

베: 안나 홀츠
안: 네?
베: 여인 처럼 보이는군
안: 감사합니다


이 대사 후에 두 사람은 각각 지휘대와 그 맞은 편 연주자들 사이에 서로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장내는 조용해지고, 드디어 귀머거리 저주받은 천재 작곡가 베토벤의 지휘가 시작됩니다. 물론 지휘 신호는 안나가 보내고 있습니다. 연주가 진행될 수록 두 사람의 지휘자는 서로를 교감하며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갑니다. 무려 10여분 이상이나 이 두사람의 교감행위는 반복되고 이어집니다. 그 어느 러브신이 줄 수 없는 세세하고, 세밀하고, 은밀하고, 밀도높은 두 영혼의 교감이 음악과 더불어 교차되며 반복되며 이어집니다. 때로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포기합니다. 이미 영혼의 교감을 이뤄낸 이들에게 시신경의 확인은 큰 의미조차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게 감독은 두 사람의 교감을 서술합니다.

음악은 점차 절정을 향해 치닿습니다. 결국 막다른 곳.. 길고긴 관현악의 전희가 끝나갈 무렵.. 차분히 가라앉은 소리를 딛고 바리톤의 솔로가 허공을 가릅니다. 그리곤 저 유명한 합창곡의 폭발을 알리는 관악기의 압축된 소리가 이어집니다.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장면이랄 수 있겠죠.

B메이저 혹은 B마이너..

합창단을 부르는 도입부의 음조입니다. 그것이 B메이저일까요, 아님 B마이너 일까요? 영화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애초에 베토벤은 그 부분을 B메이저로 처리합니다. 왜냐하면 이태리가 그것을 원하니까요. 밝고 경쾌한 메이저의 흐름을 이태리와 독수리들은 즐겨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베토벤의 초벌 악보를 필사해 온 안나는 그 부분을 B마이너로 고쳐 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 베토벤에게 이렇게 대답하죠. 그들의 대사입니다.

베: 이건 뭐지?
합창이 시작되기 바로 전 말야,
B 메이저, D 메이저
자넨 B 마이너로 적었군
난 B 메이저로 썼는데 왜 바꾼거지?
안: 바꾸지 않았어요
베: 뭐?
안: 바꾼게 아니라,  교정한거예요
베: 교정을? 자네가 교정했어?
안: 네, B 메이저로 쓰실 의도가 아니셨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베: 정말?
아태리인들은 B 메이저를 썼을거야
롯시니라면 메이저를 썼을거야, 케루비니도 메이저를 썼겠지
베: 선생님은 아니죠
선생님은 한 순간을 위해 바꾸셨을 거예요,
폭발이 있기 전에 서스펜스를 주려구요
허락하신다면...
그건 롯시니도, 케루비니도 아니예요
바로 베토벤이죠
베: 내가 실수로 잘못 적었다는 말인가?
안: 아뇨, 선생님.. 의도적으로 하셨다고 생각해요
안: 덫 이라고 생각해요
베: 닭?
안: "덫" 이요
베: 덫이라고?
안: 슐렘머(베토벤의 본 필사자) 선생을 시험하시려구요.
베: 대체 왜 내가 슐렘머를 시험하지?
안: 진정으로 이해하는지 보시려구요.
베: 뭘 이해하는지?
안: 선생님 영혼요
베: 내 영혼?
베: 마이너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나?
안: 제가 틀렸나요?
베: 내가 쓴 것에 동의하나?
안: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모두 정말 멋져요
베: 맘에 드나?
안: 네, 아주 많이요

이 초반부의 복선을 깔고 음악은 절정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랑의 꼭지점을 완성시키듯이.. 두 사람의 음악을 통한 사랑은 그렇게 결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은 그것을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훌륭하게 묘사해주고 있었습니다.  

감독은 그렇게 음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결실이 아니라 '도구'임을 만천하에 선언합니다. 결국 두 영혼은 하나가 되어 음악을 도구로 교감의 극치를 경험케 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교감은 다른 이들에게도 이어져, 그들의 심장과 뇌리에 강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음악을 제대로 시각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 역시 느끼는 분들만 느끼겠지요. 음악은 귀만 가지고 하는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 영화 전편에 걸쳐 조잘대고 있습니다. 때론 음악만큼 눈으로 하는 놀이도 없음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그리고 구석구석에 조밀하게 장치된 깔끔한 대사는 듣는 이의 긴장을 한숨도 놓지 못하게 합니다.

워낙 베토벤이라는 인물의 삶이 극적이다보니 그에 대한 영화도 여러 편 나와있긴 합니다만.. 나름 이 [카핑 베토벤]은 그에 대한 또다른 시각을 준 것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네요.

다만 아쉬운 것은 한국에 수입은 되어있지만.. 아직 극장에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흥행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겠죠. 이 정도면 올려도 수입가는 뺄 수 있을 겁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기획사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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