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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현대인을 위한 비신화화?

신년맞이를 온 가족이 극장에서 했습니다.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기로 한 것이죠. 저희들의 계획은 그런대로 잘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4살이 된 막내의 인내가 간간히 틈을 보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전 가족 영화보기는 큰 무리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미야자키의 이번 영화는 기존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는 미야자키를 만난 듯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3년 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까지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었던, 그의 집요한 목표의식이 이번 영화에서는 핏대를 세우는 고함이 아니라, 인자한 할아버지의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바뀐 듯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하는 인간, 그리고 생산성으로 상징되는 여성에 대한 배려, 공공의 목적과 선을 위한 투신 등.. 그의 가슴을 울리던 주제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이 영화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환갑을 훌쩍 넘어버린 미야자키는 이제 관심의 초점을 점차 인간에게로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웃집 토토로"나 "붉은 돼지" 등을 통하여 인간성에 대한 질문던지기를 지속적으로 잊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 작품만큼 인간 그 자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

다이애나 윈 존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번 작품을 저는 "비신화화"라는 관점에서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미야자키와는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신화 혹은 주술걸기(Zauberei)에 대한 미야자키의 관심이 이전만큼 그 동선이 확연하게 노출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즉 파괴하는 이와 그것을 막으려는 이, 공동을 위하려는 이와 그것을 해체하려는 이, 선을 택한 자와 악의 편에 서있는 자 등등.. 조금은 그래도 맘 편하게 그들의 위치를 규정지을 수 있었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이분법적 구도가 조금은 희석된 채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 좋은 편인지, 혹은 나쁜 편이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단서들이 마구 섞여가며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의 마음을 때로는 불편하게, 때로는 귀찮게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18세 소피의 마법에 걸린 과정과 그 이후 소피의 변화무쌍한 모습의 전개를 지켜보고 있자면 적잖은 현기증까지 유발됩니다. 때로는 90세 노파로, 혹은 60대 할머니로, 가끔은 4-50대 중년 아줌마의 모습으로, 간혹 젊은 18세 아가씨의 모습으로 미야자키는 참으로 편안하게 소피의 변모를 즐기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미야자키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 답은 편하게 얻을 수 있겠지요. 그런 변화의 과정에 작가의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요? 있었다고 봐야겠죠. 게다가 상대가 미야자키라고 하는 거장이니.. 분명 어느 정도의 계산된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요? 바로 그런 의도를 조금이나마 추적하고 싶은 것이 오늘 제 글쓰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요.

저는 소피의 변모를 통해 하고자 했던 미야자키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인류사에 있어서 근대의 시작은 주술로 부터의 탈출입니다. 예 바로 비신화화죠. 신화적 시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던 시기로부터 벗어나 이제 근대의 시대는 도구적 이성으로 인해 모든 것을 측정하고 예측할 수 있는 날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반이성적인 견해로 세상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미야자키는 거기에 대해 보다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주술로부터 탈출한 인간들 과연 그들은 주술로부터 자유로운가? 작가는 영화 내내 정상적이나 각각의 주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수도없이 제시합니다. 뛰어난 역량을 지닌 마술사 하울이 지난 얼짱 콤플렉스, 화려한 왕궁의 시절을 잊지 못하는 명예의 주술에 매여 있는 황양의 마녀, 허수아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웃나라의 왕자님(미야자키의 유머가 도드라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업에 충실하게 살고 있긴 하지만 18세의 로망을 펼치고 싶어 하던 소피의 주술..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여전히 인간들이 非化시키지 못하는 수도 없는 주술의 그물들을 미야자키는 은근 슬쩍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야자키는 또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분명 18세 소피를 90세의 노파로 만든 저주는 마녀의 저주에 기인한 것이지만, 과연 그런 것인가? 미야자키의 질문은 집요하게 관객들에게 도전합니다.

저주가 객관적이고, 외부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면 분명 저주의 현상도 일정하게 그 저주의 숙주를 지배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장난이라도 하는 듯이 수도 없이 소피의 모습을 변장시키면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주술성에 대한 의견을 혼란스럽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혹시 미야자키는 주술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주술의 현상을 그렇게 객관화시켜서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저의 탐정놀이는 계속됩니다. 그리곤 이런 작은 결론을 잠정적으로 맺게 됩니다.

주술은 과학적 지식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술은 도구적 이성의 기능이 허약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술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한 방편이요 양상일 뿐입니다. 주술은 인간이 생활세계 속에서 적응해 가는 과정의 다른 이름들일 뿐입니다. 각각의 환상과 집요한 가치관이 각자의 주술을 허용합니다. 마치 사람들은 주술과 저주가 외부로부터 온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석하지만, 대부분의 주술은 자기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따라서 주술은 걸릴 필요도, 걸릴 이유도 없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주술에 걸려있고, 어떤 점에서 주술에 걸린 모든 사람들은 주술을 걸게 한 당사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주술적 세계관을 벗어났고 새롭게 정비된 지극히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지만, 어떤 점에서 인간들은 여전히 주술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시로 인간은 각각의 처하게 되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주술을 걸고, 풀고, 또 걸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소피는 변모합니다. 비록 거울 속에서는 90대의 노파가 한숨짓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청소하는 40대의 아낙으로, 혹은 멋진 얼짱 꽃미남에 이유 없이 가슴 설레는 사춘기 소녀의 심정으로, 간혹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소피는 계속 자신의 주술세계를 확장시켜 갑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주술을 풀려하지 않고, 주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그리고 즐기고 있습니다.

과학이 일천하던 시대.. 우리들은 주술은 좋지 않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신의 경지에 닿고 있는 지금.. 미야자키는 주술은 또 다른 이름의 세계관이었음을 나지막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런 주술적 세계 속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음도 선언합니다. 끝까지 악녀로 남아있었어야 할 황야의 마녀는 갑자기 맘 느긋한 할머니가 되어 감초역할을 하게 되고, 이지적 악녀의 모습을 유지해줘야 할 궁중 마법사 설리만은 어느덧 평화를 위한 해결사로 등장하게 됩니다. 꽃미남 하울은 오히려 신체 콤플렉스에 빠져 사는 못난 청춘이 되어 버리고, 주인공 소피의 변덕은 그녀의 얼굴만큼 많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선악의 구별 하에 보다 지고한, 그리고 인류 공영의 목적을 달성키 위한 하나의 표상을 제시하곤 했던 미야자키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이렇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던 미야자키의 세계관과 인간이해의 흔적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그런가봅니다. 이제 미야자키는 주술마저 즐길 수 있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주술을 잊고 사는, 아니 잊어버렸다 자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술이 주는 또 다른 맛을 미야자키는 하나의 동화로 그려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미야자키는 자신만의 주술을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여러분은 어떤 주술세계에 살고 계시나요?”




추신)

우리는 마법과 과학을 다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60이 되어버린 할아버지 미야자키는 과학이나 마법이나 같은 존재의 다른 얼굴들일 뿐이라고 속삭입니다.

때론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학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환상과 주술 속에 기거합니다.

하지만 60이 되어버린 작가 미야자키는 하늘을 나는 기계나, 하늘을 나는 마법사나 같은 주술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읊조립니다.

이 노인의 이야기에 현대인은 얼마나 귀 기우릴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아내와 함께 Core라는 영화를 DVD로 보았습니다. 지진발생 무기로 인해 지구 자기장에 문제가 생겨 새롭게 조직된 지구 구조 특공대가 지구 핵심층까지 뚫고 들어가 멈춰버린 지구의 엔진을 다시 복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는 내내 전혀 보지 않았던 지구의 내부를 형상화시켜 관객들에게 제공해줍니다.

영화가 끝난 후 전 한마디 아내에게 던졌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는 점에서, 지구 물리학이나 철학이나 다를 바가 없구만.."



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한 주술에도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미야자키의 작은 속삭임이 쉽게 머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계의 약속(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ㅡ엔딩 주제곡)


눈물의 깊은 곳에서 흔들리고 있는 미소는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의 세계의 약속

지금은 혼자라도, 둘의 어제로부터

오늘은 태어나서 반짝인다

처음 만난 날과 같이

추억 속엔 당신은 없어

산들바람이 되어 볼을 어루만져 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오후 햇살의 이별 후에도

결코 끝나지 않는 세계의 약속

지금은 혼자라도, 내일은 무한하다

당신이 가르쳐 주었던

밤에 잠기어 있는 상냥함

추억 속엔 당신은 없어

졸졸 시냇물의 노래에 하늘의 색채에

꽃의 향기에서 영원히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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