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그 낱말의 어려움?
독일의 신진 철학자 본 대학의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쓴 <나는 뇌가 아니다>를 우리말 번역본과 독일어 원본으로 읽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말로 읽다가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원문을 대조하는 방식으로요~
우선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1980년 생으로 20대 후반에 본대학의 철학교수로 임용된 독일의 잘나가는 신진 철학자입니다. 최근 활발히 연구 성과물을 쏟아내는 신경과학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유물론적 입장에 경도되는 것과는 달리, 가브리엘은 비물질적 실재를 인정하며 정신철학을 전개하는 철학자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생각은 아니고.. 번역어 관련 문제를 이슈로 다뤄볼까 합니다.
이 책의 서론을 우리말로 읽고 있는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 중에 어느 쪽이 궁극적으로 옳으냐는 질문은 철학이라는 학술 분야를 위해서 뿐 아니라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느낌이 좀 쎄해 집니다. 바로 '인문학'이라는 용어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 대부분 '인문학'이라는 단어의 경계는 모호하고 쓰이는 용례 또한 광범위합니다.
본디 인문학을 가리키는 라틴어는 'humanitas'로 <3학 4과>라 불리는 학부에서 배우게 되는 7개의 과목(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말합니다. 이들 수업이 행해지는 것을 '자유학예'라 부르고, 이 과정을 마치면 대학원 과정으로 의학, 법학, 신학을 선택하여 학업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사회 광범위하게 퍼진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교양학'이라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뭐 전에도 한번 비슷한 이야기를 했으니 여기서 이 주제를 다시 재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그런데 저 가브리엘 글에서 제가 신경에 쓰인 것은 인문학의 짝으로 등장한 단어가 '자연과학'이라는 데 있습니다. 보통 자연과학이라 썼다면 그 대칭으로는 분명 '정신과학'을 썼을 겁니다. 예, 바로 빌헬름 딜타이의 사례를 따라 말이지요.. 그래서 원문을 살펴봤습니다.
"Die Frage, ob der Naturalismus oder der Antinaturalismus letzlich Recht behält, ist nicht nur für die akademische Fachdisiplin namens Philosophie sowie für das Verhältnis von Natur- und Geisteswissenschaften zueinanger von Beduetung."
번역이야 위 문장도 깔끔하게 되어 있긴 하지만, 인문학이란 단어의 원문은 Geisteswissenschaft(en)였고, 이는 연구의 대상을 화석화하여 특정 사실을 보편화하여 '설명하는'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과는 달리 살아있는 유기체를 연구하는 정신과학은 경험과 체험을 중시하며 시공 속 연구 대상을 '이해하는 데' 집중한다는 딜타이의 구분을 명확히 살리는 가브리엘의 기술인데.. 그것이 졸지에 '인문학'으로 왜곡되는 순간이죠.
용어의 정확한 사용이 무엇보다 중요할텐데.. 의외로 적당히 본질과는 다르게, 혹은 편의에 따라 오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번 경우도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번역이라 할 수 있겠네요.
추가) 역자의 잘못된 단어 선택은 계속 반복됩니다.
21쪽 상단 번역 부분을 보면,
"진실은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진실은 사회과학과 인문학, 예술, 종교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예컨대 여름에 고속열차에서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잦음을 알아채는 것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발견된다."
독일어 원문을 보면,
"Wahrheit ist nicht auf Naturwissenschaft beschränkt, man findet sie auch in der Soziale- und Geisteswissenschaften, in Kunst, Religion und unter ganz alltäglichen Bedingungen, wenn man etwa herausfindet, dass im ICE im Sommer viel zu häufig die Klimaanlage ausfällt."
여기서도 가브리엘은 자연과학(단수형)에 비견되는 학문들로 사회과학과 정신과학(복수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예술과 종교, 그리고 인간의 일상적 체험 속에서도 진리 인지가 가능함을 강조함으로써 자연과학이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고 '고집'하는 현 세대의 일방적 주장에 교정을 요청하고 있는 문장이지요.
따라서 저 위의 번역은,
"참되다 하는 것은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참된 것은 사회과학과 정신과학(들), 예술과 종교에서, 그리고 매우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예를 들어 여름철 ICE(독일의 고속 전철)안에서 종종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알아채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더 읽어봐야 겠지만, 가브리엘은 일관적으로 자연과학은 단수형으로 그 외 사회과학이나 정신과학은 복수형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연과학은 단수로 묶어도 될 만큼 동질적 연구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반면, 사회과학이나 정신과학은 거기에 묶인 분과학문의 수만큼이나 연구 입장과 방법, 그리고 연구자의 태도 등이 다양하기에 복수형으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잠정적 추정을 해봅니다. 이 부분은 계속 읽어가면서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근데 책 안에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직접 물어보는 수 밖에 없겠지요~ ㅋ)
Prof. Markus Gabriel(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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