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이란 무엇인가
2006.05.29 19:31

I. ‘무엇에 대한’ 학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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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무엇에 대한’ 학문인가?

‘종교’란 단어: 그 다양한 이해들

‘종교’란 단어는 마치 미로와도 같다. 그 손에 실 다발을 쥐고 있지 않은 사람은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문지방 바로 뒤에서 우리는 하나의 모순에 직면하기도 한다. ‘종교’란 단어는 일요일과도 같이 독일의 익숙한 일상생활에 속해있다. 그러나 ‘종교학’이라는 단어는 어떤 일에 정통한 지식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 외에도 이 단어는 어떤 불명확한 느낌을 표현한다고도 생각한다. 그것은 신학 혹은 그런 종류의 것들과 관계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이유를 더 이상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유럽의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라틴어 단어인 ‘religio’는 독일어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유럽문화가 기독교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종교’란 단어를 들을 때 가장 먼저 기독교를 떠올린다. 그래서 대강의 것을 명백히 채워 넣으려고 하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무지(無知)의 나무에서 많은 단어들이 자라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텅 비어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나 단지 기독교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적 종교’ 역시 대강 표현되어진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시 계속 발전해 간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생각할 때 로마 가톨릭, 개신교, 침례교, 감리교,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다른 다양한 종파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통일된 그리스도교를 표현하고자 할 때는, 특별히 공적이고 법적인 영역에서는 ‘그리스도교’라는 용어대신 기꺼이 ‘종교’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예를 들어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의 경우가 그렇다. 거기에서 ‘종교’란 단어는 공히 가톨릭과 개신교 쪽 전문가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즉 각 주에 속한 문화부의 경우 ‘종교수업’이라는 이름 안에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포괄해서 부른다. 또한 ‘종교’과목 교사들을 위한 재교육에서도 ‘종교학’이라는 명칭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의 교수들을 묶어서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때 사용되는 ‘종교’란 명사는 구체적인 사실은 아니다. <독일연구협회>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의 경우가 좋은 사례가 된다. 그들 리스트에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은 독립학과로 올라와 있지만, 종교학이란 학과를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의 종교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종교비평가들에게도 유효하다. 그들은 추상화라는 저 꼭대기로부터 명백함이라는 이 바닥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난후 그들은 최소한 하나의, 바로 특정적인 한 종교에 대해서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종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철저하게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들이 유럽인들이기 때문에, 비평가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특정한 종교로는 그리스도교가, 즉 그리스도교 종파 중의 하나가 떠오르게 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특별히 로마가톨릭이, 스웨덴에서는 루터 교회가, 러시아에서는 특별히 정교회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종교’라고 하는 단어는 그것을 듣고 말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계속 분화되어 간다. 참된 종교는 잘못된 종교에 맞서게 되거나 혹은 명백한 이성이 종교적 둔감함에 맞서게 된다. 계속되는 분화는 종교성의 안과 밖을 나누게 한다. “나는 어떤 종교를 고백하고 있는가? 당신이 내게 일러준 그 모든 것들 중에는 없다. - 그렇다면 왜 없는가? - 종교여 나가라!” 쉴러는 이 둘 사이의 대립관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유럽인들 역시 꽤 오래전부터 비그리스도적인 종교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미 그들 사회 한 가운데 거주하고 있었고, 무슬림들은 거룩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황금과 후추를 찾아 나선 유럽인들은 중국인과 인도인, 아프리카인, 남태평양 제도인들을 발견하였다. 늦어도 19세기에는 유럽 외부에 수천의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
사람들과 관련된 것은 바로 그렇다. 우리는 몇몇 종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종교들의 이름과 더불어 제법 많은 것들을 안다. 또한 관찰을 통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기도 한다. 그런 후 그 모습들은 익명의 다수로 더 나아가 시민들의 수만큼, 그리고 불명확한 인간성으로 인해 흐릿해진다. 우리는 다양한 종족들과 문화들, 그리고 다양한 직업들과 관심들을 지닌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을 인류Gattung Mensch라는 개념으로 요약한다. 종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유類, Gattung개념과도 같이 종교 역시 자신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인식된다. 유럽의 사상가들은 종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알려진 것을 이미 세상에 내어 놓았다. 본질적인 것은 종교들을 통합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은 종교들을 나눈다. 종교를 나뉘게 하는 것은 종교가 가지는 독특성이다. 종교를 유개념으로서 말하는 사람은 고유한 것들을 무시할 수 있다. 보통 대부분이 그렇게 한다. 유럽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종교 그 자체는 두 가지 극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에 있는 것을 유럽인들은 알지 못한다.
물론 우리가 미디어들과 다양한 다른 곳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이, 지식인들은 매우 기민하게 ‘세계종교들’, ‘유일신적인’, ‘고등종교들’, ‘주술적인’, ‘자연종교들’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여러 단어들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유럽단어들을 가지고 유럽을 벗어난 지역의 종교들을 조망한다면 우리가 그들로부터 볼 수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누가 정말로 정통하단 말인가? 즉 어떤 유럽인들이 유럽 밖에 있는 수천의 종교들 중에서 하나 혹은 몇 개의 종교들을 단지 듣고서만 알 수 있겠는가? 낯선 종교를 안다는 것은 많은 노력과 인내 그리고 애정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취되어진다면, 그로 인해 밀접한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매우 비싼 편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은 직업상 종교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종교’란 개념: 어떻게 그것에 대한 추적은 점점 불분명해지는가?

어린이들에게 오해란 잘못된 표현을 뜻한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중적인 것보다는 보다 분명한 표현을 선호한다. 자연과학자들의 경우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종교학자들에게는 크디 큰 난관이 되기도 한다. 그처럼 종교학자들은 그들이 인식한 것들을 결코 공식이나 수치로서 발표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단어들을 가지고 자신들이 인식한 바를 정확히 표현해내야만 한다. 정확히 표현된 단어들 바로 그것이 개념들이다. 대부분의 종교학적인 개념들은 종교학자들의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종교학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종교학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다른 분야의 학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종교’란 단어 역시 모든 가능한 학문분야의 전문가들에게 하나의 명사로서 사용된다. 하지만 이 단어는 언제나 그리고 전적으로 항상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단어의 정의는 한 개념이 포괄해야만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라고 하는 단어의 개념규정은 우리에게 무엇이 종교를 형성하는 것인가를 밝혀주어야만 한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자리한다. 사실 종교에 대해서는 수백 개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정의들이 있다. 게다가 심지어 새로운 정의들이 계속해서 내려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대했던 만큼의 결과는 얻지 못하고 있다. 즉 어느 누구에게도 반대를 받지 않을만한 종교에 대한 정의는 찾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종교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영혼에 속한 것’이라고 단언한다면, B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영혼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그보다는 구원에 대한 약속이야”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면, 그는 경우에 따라 맑스주의를 종교들 바로 아래에 집어넣기도 한다. C는 종교란 인간들에게 자기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D는 이에 반박하면서 종교는 정신의 허약함에 다를 바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인류는 가능한 빨리 이것으로부터 치료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정의를 내릴 때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그리스도교의 의미를 가지며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커다란 배려를 하지 않는다. 힌두교, 이슬람교 그리고 다른 종교에 속한 지성인들 역시 이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믿어오던 것을 ‘종교’라 규정한다. 모든 이들이 하나의 정의에 동의를 내리게 되는 그런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어느 누구도 그것을 장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와 관점으로 흥을 내기 전에, 그 개념들을 먼저 명확히 해야만 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법칙이 따르며 그것을 인정하는 이는 많은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딱 맞는 격언이 하나 있다. 바로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가 그것이다. 실제로 종교학의 경우 종교의 본질에 대한 그 어떠한 합의점도 이끌지 못하는 한, 종교학이란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예외란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아주 오래전에 생겨난 다른 학문들과 더불어 종교학도 있을 수 있게 된다. 신학자, 생물학자 혹은 심리학자들 역시 ‘신’, ‘인생’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종교학자들은 ‘종교’에 대해서 그런 것이다.
모든 법칙은 예외로 인해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예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칙이 요구하는 바는 옳은 것이며 이것은 종교학에서도, 그리고 물론 다른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교이론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가 이해하고 있는 ‘종교’가 무엇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토대가 되는 종교란 개념이 유효하다면, 논리적으로 구축한 이론은 요동치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칼 맑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칼 바르트는 각각 ‘종교’란 아편이요 환상 혹은 불신앙으로 보았는데, 사람들이 그들이 내린 개념규정들에 동의한다면 그것들은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종교개념은 마치 열쇠와도 같이 그 개념이 만들어 놓은 이론에 대해서 해명해 준다. 부적당한 종교개념은 오히려 쇠로 만든 지레와도 같이 종교 자체를 훼손하게 된다.
‘종교’라고 하는 단어는, 수많은 그리고 심지어 상호 모순되는 내용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과 개념으로서는 쓸모없다. 다행스럽게도 단어, 이름, 개념은 그것이 명명한 혹은 규정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종교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따라서 부족한 부분이긴 하지만, 결코 재앙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사실로서의 종교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를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냈고 그리고 여전히 만들어낼 그러한 단어들의 운명은 구체적인 사실로서의 종교에 비해서는 단지 부차적인 것이다.

어떻게 관찰자들은 구체적인 종교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가?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뉴스방송이나 혹은 휴가를 보내는 중 우연한 기회에 구체적인 종교와 마주치게 된다. 그렇게 보고 듣고 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감정들을 나타낸다. “지루해!” “끔찍해!” “매력적이군!” 이것이 구체적인 종교가 주는 우선적인 효력이다. 하나는 그들을 지루하게 하고, 다른 것은 그들을 흔들어 깨운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흔들어 깨워주는 종교들에 대해서만 집중토록 할 것이다.
구체적인 종교는 낯선 이에게는 모순처럼 보일 것이다. 종교는 우리를 끌리게 하고 또한 반발을 일으키게 하기도 한다. 피를 흘리고 있는 시아파 수도사들의 그림, 잔인한 동물공희 장면, 인도의 투구(Thug)에 대한 영국 재판기록을 읽는 것, 자신들과 다른 힌두인들을 제의 속에서 교살시켰던 은밀한 살인자 혈맹, 이러한 것들 아니 그 이상의 더 많은 것들이 관찰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 종교는 또 관찰자의 심장을 뜨겁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이 분노에 휩싸여 있다면 자비를 칭송하기 원했던 붓다의 온유함이나 혹은 생태론적 균형을 위한 하나의 모범으로서 자신들의 종교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도인들, 혹은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하나의 극복으로서 줄루족Zulu이 있다. 그들은 단지 여성들만을 특정한 종교 전문인으로서 받아들이고 여성들처럼 차려입고, 여성들처럼 처신하는 남성들을 용납한다.
관찰자가 구체적인 종교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그들이 어느 곳에 그리고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러한 시대정신과 더불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애착과 혐오 역시 하나의 구체적인 종교를 부정적 혹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몇몇 종족종교들 내에서 발견되는 실천적인 공산주의는 학생들을 대단히 열광케 한다. 거기에 개인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동전의 다른 면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불교도들은 최근에야 우리들이 자아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평가하고 있는 방법들을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해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이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것이 되고 있다. 불교도들은 자비심을 근거로 낙태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한 존재가 사람으로서 태어나기 위한 기회를 다시 잡기까지는 천년 혹은 그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은 많은 이들의 맘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관찰자들이 구체적인 종교에 반응하는가는 또한 그들이 가진 신앙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세상에 세례를 베풀기 위해 나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종말에 유일한 종교가 될 것이라 믿는다.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은 사원과 수도원을 생산 작업소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공산주의 정부의 종교정책을 지지한다. 불합리한 냄새가 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하는 과학맹신주의도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의 정신치료사가 사기꾼으로서 폭로된다면 그들의 영혼은 평온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신앙으로 인해 구체적인 종교를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쉽게 간과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종교에 반대하는 사람은 좌절하게 될 것이다. 만약 합리론자들로부터 계몽적인 사상이 발전한다면, 과학자들이 ‘효과가 없는’것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을 기대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 권력자들은 구체적인 종교가 여전히 군중 속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관리들은 지금까지 군중들을 상대로 했던 그들의 목조르기를 풀어주고 있다. 60년대에 유럽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했을 때, 그리고 우선적으로 백인 선교사들이 그 땅으로부터 추방당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심하게 괴로움을 당했다.
구체적인 종교가 존재하는 한 사람들은 역시 그것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개별적이거나 혹은 공동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빠르거나 혹은 늦거나 간에 구체적인 종교를 만나게 된다. 물론 그들은 언제나 각각의 전공 분야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방향을 향해 열려있는 다른 창문들을 통하여 보는 것처럼 구체적인 종교를 한 단면으로 바라본다.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대상이 어떤 종교적인 기능을 했었을까 를 고려한다. 역사가들은 과거 주교, 탁발 수도사 혹은 농부의 종교를 조사한다. 미술사가들은 종교적 그림들을 위한 모티브들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문예학자들은 유럽 혹은 비유럽권 작가들의 작품들로부터 종교의 의미를 연구한다. 사회학자들은 사회 속에서 종교의 역할을 탐구한다. 지리학자들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주거형태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민속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낯선 문화들의 본질적인 부분이 종교와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심리학자들은 망아상태Trance, 개종 그리고 명상 등을 규명한다. 의사들은 병리학적 입장에서 종교들을 다룬다. 법률가들은 주술을 건 가축을 마력에 의해 풀려나게 하는 ‘신비주의자’ 등과 같이 범법행위를 한 종교를 추적한다.
학자들 역시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하여 ‘지루하다!’,  ‘끔직하다!’ 혹은 ‘매혹적이다!’라는 감정을 가지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비록 종교가 그들을 귀찮게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구체적인 사실에 집중해야만 하다. 종교학자들의 경우 훌륭한 전제조건이란 있을 수 없다. 그에 반해 다른 학자들은 때때로 종교를 취급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문적인 문제 속에서 종교가 연루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종교를 취급하게 된다. 그들이 그렇게 종교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문적인 문제들은 종교학이라고 하는 전문 분야의 문제들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종교학자들은 구체적인 종교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구체적인 종교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관점은 우연히 그것을 보게 되는 관찰자들과 또한 다른 분야의 학자들이 갖게 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치 풍경을 보는 것과도 같다. 화가는 농부나 사냥꾼 혹은 환경 보호자들이나 산책하는 이들과는 다른 눈으로 풍경을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구체적인 종교란 무엇인가? 다음 세 개의 문장을 가지고 종교학자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종교들을 감지하는지 정리할 수 있다.

1. 그들은 구체적인 종교를 전체로서 인지한다.
2. 그들은 전체로서의 종교를 4개의 외형으로 인식한다.
3. 그들은 전체로서의 종교가 살아있고, 변화를 멈추지 않는 동안 그것을 관찰한다.

겉으로 보기에 학문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분기점을 향하고 있다. 학문의 전문성이 학자를 만든다. 이 점은 종교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무 바로 앞에서는 더 이상 숲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서나 들려오는 전혀 바뀜이 없는 아주 오래된 노래이다.
전체로서의 종교야 말로 종교학자들과 경우에 따라 종교를 취급하는 다른 분야의 학자들 사이를 가르는 경계점이 된다. 다른 전공의 학자들이 가지는 종교에 대한 관점은 전체로서 다루어지는 그들 자신의 전공분야와의 관련 하에서만 다루어진다. 예를 들어, 법적, 심리학적, 혹은 예술과 그 이외의 주된 전공 분야 내에서 그들은 종교에 대해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종교학자들은 전체로서의 종교에 각각의 전문적인 종교적 관점을 집중하게 된다.
종교학자들이 그렇게 전체로서의 종교에 전문적인 종교적 관점을 집중하였다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분야의 학자들은 어느 종교의 전체를 가지고 작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종교학자들은 종교가 모든 이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종교를 전체로서 바라 볼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종교학자가 자신의 전문적인 연구들을 전체로서의 종교에 집중하는 한에 있어서만, 그는 전문가인 것이다. 누군가 종교를 사회와 연관시킨다면, 그는 아마추어 사회학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문학과 종교를 연관시킨다면 그는 아마추어 문헌학자가 될 것이다. 누군가 종교와 정치를 관련시킨다면 그는 아마추어 정치학자가 될 것이다. 그 외도 마찬가지다. 아마추어를 막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은 즐거움을 주고 또 여가시간을 채워준다. 하지만 전문적인 작업은 일반적으로 전문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종교의 개념과는 달리 구체적인 종교는 단지 연구자의 머릿속에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종교는 외부에 실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교는 그들의 눈앞에 있게 된다. 구체적인 종교는 따라서 구체적이다. 혹은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구체적인 종교는 언제나 ‘하나’의 종교이다. 선택되고 연구될 수 있는 수천의 종교들은 각각 4개의 외형으로 그 전체를 드러낸다. 즉 종교는 공동체, 행위, 교리 그리고 경험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종교들의 조직 대부분은 하나의 분명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것의 공동체적 형태는 말하자면 다른 나머지 모두를 포괄하는 외부적 한계를 표시해준다. 공동체는 외부로부터 내부적인 것을 분리해 낸다. 신앙인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 태어난다. 외부에서 태어난 사람은 새로이 태어나기 위하여 적응해야만 한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공동체들은 외부인을 받아들이기 위한 결심을 주저하며, 단지 개별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에 반해 몇몇 종교들은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가능한 많은 이방인들을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케 하려 한다.
종교는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인간들이 죽거나 혹은 다른 공동체로 옮겨가게 되면, 그들이 속해있던 이전의 오래된 종교는 생존을 멈추게 된다. 종교적인 권위로 인해 상호간에 다투게 된다면, 종교공동체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것은 서서히 좀 더 갈라질 수도 있다.
많은 종교들을 보면, 사람들은 거대한 종교 공동체 안에 또 다른 특별한 모임들을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평범한’ 신앙인들을 자신들의 밖에 머물게 한다. 내부에 속한 그들은 신비주의자, 금욕주의자, 비범한 수준의 경건한 이들이다. 그들은 외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긴밀한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비범한 목적들이 분명히 성취되기를 희망한다.
만약 종교연구가가 종교공동체라는 경계를 넘어섰다면, 그 연구가는 전체로서의 종교가 가지는 두 번째 형태인 ‘종교적 행위’ 앞에 서있는 것이다. 교리보다도 행위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종교들이 있다. 다른 종교들은 교리 안에서 행위들을 주변적인 것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단지 의례의 단편들이라고 할지라도, 전적으로 종교적 행위 없이 어떤 종교도 살아남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이론가들의 공동체, 학원, 그리고 철학적 모임이 될 뿐이다.
우선 종교연구가들은 종교적 행위를 의례와 규범이라는 형태 속에서 배우고 파악한다. 그런 후 그들은 종교의 세 번째 현상, 즉 교리를 연구하게 된다. 의례적 행위는 상징적인 제스처와 용어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스처와 용어들은 신화가 가지는 상징적 언어에 의해 이해된다. 종교적인 교리 안에서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규범규칙Sittenregel들을 찾는다.        
바로 거기에서 신들이 오래전에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였다고 하는 종교 교리의 특수한 형태가 생겨났다. 말씀들은 좀처럼 명백하지 않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말씀의 의미를 찾는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지난 후 그들의 입장에서 해명을 했던 주석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신화들과 상징들은 특별히 종교적인 소식들을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적당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언어’로서 말한다면, 신화들은 형상으로 말하는 것이다. 드러난 것은 문헌학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해독된다. 그에 반해 문헌학적인 지식, 즉 지성은 해석되어야만 하는 계시의 전달을 규정한다.
종교연구가들이 볼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공동체, 행위 그리고 교리들이다. 이것들은 비밀공동체로부터 유래되었거나, 비공식적인 의례들 혹은 제사장들에게만 전해지던 비밀스러운 교리이었는지도 모른다. 종교연구가들이 이런 것들을 알게 되는 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그것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에 알려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 스스로가 제사장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연구자들은 이전에는 제사장 혹은 비밀공동체의 일원이었던 배교자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변절자들은 그들이 떠나온 종교에 대해 즉각 열정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아는 비밀들에 대해서 떠벌리는 것에 대하여 오랫동안 두려워한다. 다행스럽게도 종교학자는 방해받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신앙인들의 믿음‘만’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종교들은 충분히 많다.
한 가지 어려움이 언제든지 종교연구가들의 길을 방해한다. 그것은 바로 전체로서의 종교가 가지는 네 번째 형태이다. 즉 ‘종교체험’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체험은 종교를 생동감 있게 해준다. 종교체험은 온 몸에 혈액을 펌프질하는 심장의 박동과도 같이 교리와 의례들을 전승해준다. 더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믿고 있는 신앙의 진리를 경험하면 할수록, 그들의 종교는 점점 더 힘 있는 모습으로 살아나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체험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그들의 신앙 역시 점점 저항력이 약해지게 된다.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체험들을 안다. 자신만의 체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은 우리가 경험한 것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가 한 경험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그것을 말해 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내적인 것은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단어들 역시 종교체험을 훼손시킬 수 있다. 자신이 한 체험을 이야기하는 사람 역시 그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신의 내면생활에 대하여 종종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중 개개인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유사한 체험을 한 사람만이 많은 단어들 없이도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종교학자가 유사한 그 어떠한 것이라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곧바로 낙심하여 포기하지는 않는다. 예술품, 의례들, 신화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것들 안에서 다양한 형식의 종교적 체험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즉 종교적 체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전체로서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4번째 면은 바로 종교의 중심부에 해당된다. 이 4번째 형태의 특성은 다른 세 가지 형태들 안에서 우리 눈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종교, 많은 이들이 그것을 이런 것이다 혹은 저런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4개의 모습을 지닌 전체”로서의 종교 역시 쉽게 잘못된 이미지로 미혹하기도 한다. 그런 후 종교는 빈틈없고 굳게, 높고, 넓게 그리고 깊게 서있게 된다. 즉 하나의 사물, 하나의 현존재, 그것은 본질과 이유로서 남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인지)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주저 없이 ‘불교’, ‘힌두교’, ‘도교’, ‘신도’ 그리고 그 외의 종교들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만약 종교적인 “주의”Ismus를 언제나 그처럼 그것이 있는 그 대로 볼 수 있다면 인간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주의’는 심지어 언제나 어디서나 변함이 없는 수치를 자랑하는 자연과학을 모방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마치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이 말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종교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이 구체적인 사실은 종교의 역사에서 수천 번이나 입증되었다. 이미 죽은 어떠한 종교의 ‘주의’은 남아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책들 속에 파묻혀 있기도 하다. 세상의 끝 혹은 도서관의 최후까지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살아있는 종교들에 대한 책들은 스냅사진과 비유될 수 있다. 그것들은 어린 시절, 성인 혹은 노년시절의 종교가 지닌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또한 다양한 작가들에 의해 연출된 그럴듯한 종교도 보여준다. 종교들이 보내는 일생 안에 있는 순간들이 역사적인 시기만큼,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남을 수 있다면, 그것들은 순간의 기록들이다.
살아있는 종교들은 쉼 없이 변화한다. 많은 경우 변화는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기까지는 오랫동안 은폐된 채 있기도 한다. 살아있는 종교들, 그것은 이곳 세상 안에서 이어지는 전통과 저곳 피안의 신앙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신학의 교부들과 현대의 신학자들, 그리고 그 당시의 대답들과 앞으로의 질문들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축들 사이에서 때때로 격렬한 폭발과 천둥소리들과 결부된 균형을 강요받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사이의 균형은 필요한 것이다. 그 균형이 종교를 살아있게 하고, 그리고 변화가 균형을 가능케 한다.
종교들의 생명력을 이루고 있는 변화라고 하는 것은 종교학자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종교사학이 여전히 요람에 누워있었을 때, 종교사가들은 우선적으로 개별적인 ‘주의들’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했다. 많은 동시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른바 불변하는 것에 대한 그리고 대부분 많은 이들의 논증을 자신의 편으로 가지고 있는 정통적인 것에 대한 선호가 이러한 이전의 모범으로부터 발전하게 된다. 정통적인 것에 대한 연구가들은 비정통적인 것에 대해서는 적게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단들’이라고 부르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집단들에 대해서도 많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종의 종교적인 전위대들인, 이른바 민간신앙에 대해서도 역시 적게 말한다. 그리고 이미 민속학에서는 오래전에 의미심장한 연구영역이 되었었던 것을 몇몇 종교학자들은 경계하고 있다. 바로 신종교들 그리고 신종교운동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신종교들을 연구한다는 것은 충만한 종교적 삶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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