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08.11.12 22:08

근대 동아시아의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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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아시아의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

- 수운의 시천주운동을 중심으로

이 길용(종교학)


1. 여는 글

이 글은 수운(水雲 崔濟愚, 1824~1864)의 동학운동을 중심으로 근대 동아시아의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한 탐구를 주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시작부터 적지 않은 난관이 이 글의 흐름을 막아서고 있다. 우선 근대라는 개념이다. 기실 근대, 혹은 근대성이라는 용어는 동쪽의 전문용어가 아니었다. 1874년 나시 아마네(西周)가 ‘modern’이라는 서구어를 ‘근대’(近代)라 번역하면서 이 용어는 본격적으로 동쪽 세계에 자리를 잡게 된다. 본디 서구에서 사용되는 근대란 용어의 용례와 변천은 단순하지 않다. 애초에 이 단어는 라틴어 ‘modernus’로부터 시작된다. 이 단어는 기원 후 4, 5세기 이후의 로마 사회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였다. 따라서 ‘modernus’란 단어는 국가의 중심축을 그리스도교로 바꾼 로마 사회를 이전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후 철학 사상의 영역에서는 헤겔에 의하여 이 ‘근대’란 용어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헤겔이 ‘주체성 정립’을 철학의 근대적 특징으로 규정한 것이 철학사에 나타난 근대라는 용어의 활용이었다. 이렇듯 근대란 용어는 계보학적 용례와 의미의 변천이 매우 다양하며 또 정밀한 분석을 기다리는 대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이 근대라는 개념의 엄밀한 계보학적 분석을 주로 하는 것이 아님으로 가급적 일반적 의미에서 통용되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고 있음을 먼저 밝힌다. 즉 이 글에서 언급되는 근대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관이 서구의 도전으로 인해 균열을 일으키게 되는 18-19세기 이후로 한정토록 하겠다.

두 번째 이글에서 다루게 되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은 주로 중국과 한국으로 제한한다. 무엇보다 이 두 나라는 ‘명분론적 외교’라는 기존의 전통적 국제관계를 19세기까지 고수하고 있어서 근대 동아시아의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다루는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시 동아시아의 핵심적 정치이념이었던 유교가 선택되었다. 유교라는 사유체계가 지니는 강력한 사회 에토스 장악능력, 그리고 그것을 통한 정치와 종교의 일치는 당대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이 선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전제와 제한을 가지고 이 글은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나아갈 것임을 밝혀둔다. 우선 이 글에서 시기적으로 한정된 ‘근대’, 즉 19세기 동아시아의 상황을 개략하여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살피기 위해 유교가 가지는 정교일치적 특성에 대하여 살펴 볼 것이다. 이 글에서 주로 언급할 유교는 원(元, 1271~1368)대 이후 동아시아 지배이념으로 자리를 잡은 주자학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를 ‘주희(朱熹, 1130~1200)의 사서(四書)운동’이라 이름 지어 주자학이 가지는 ‘정치=종교’라는 구조적 특징을 부각시킬 것이다. 끝으로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수운의 동학을 또 다른 형식의 정교일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마무리하고자 한다.

2. 1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환경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있어서 19세기란 한마디로 전환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요청은 안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제기되었다. 18세기 산업기술의 혁신적 발달 덕분에 다른 세계에 비하여 강력한 국력을 소유하게 된 서구 열강들이 전면적으로 동아시아 세계, 특히 중국의 개방을 요구하게 되면서 동아시아 세계는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변화 요청을 외부로부터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서구열강과 동아시아 전통세계와의 만남과 갈등은 ‘1차 중영전쟁’의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른 바 ‘아편전쟁’이라 불리는 제1차 중영전쟁은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세력과 서구 열강이 전면으로 충돌한 최초의 본격적 무력투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영국의 승리로 이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향후 동아시아 세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영국은 이미 초강대국으로 세계를 향해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트라팔가(Trafalgar, 1805)와 워터루(Waterloo, 1815) 해전의 승리로 유럽 해상권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빨리 발달한 산업혁명으로 인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막대한 자본과 또한 그것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은 발달된 은행시스템도 구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을 발판 삼아 영국은 당대 가장 앞선 나라가 되어 있었다. 최선진의 산업국가로서 영국은 넘쳐나는 잉여생산물을 처리할 시장이 필요했고, 그런 점에서 거대한 인구를 지닌 중국은 매우 매력적인 국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명분론에 의거한 조공무역을 고집하는 전통적인 중국의 외교는 당시 서구 열강의 눈에는 매우 폐쇄적이고 불평등한 교역체계로 읽혀졌다. 이렇듯 동일한 사안(국제 교역)을 조공무역(동아시아 전통교역 체계)과 (서구 개방무역 입장에서는) 불평등한 교역으로 보는 양 문화권의 상호 이해부족과 갈등이 1차 중영전쟁을 촉발케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1차 중영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 19세기 동아시아 국제 사회는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동아사이의 국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힘의 중심축이 이동하였던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는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하여 그와 조공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원만한 동북아 국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지금까지 균형추 역할을 하던 중국이 서구 열강에 패퇴함으로써 동아시아 사회도 이전과는 다른 국제 질서가 요청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한 첫 번째 변화는 중국의 전통 번속국들의 이탈로 나타났다. 네팔, 미얀마, 필리핀 등을 위시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많은 국가들이 서구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중국은 입술을 잃게 되어 이가 시린 형국(脣亡齒寒)이 되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이 중국을 일탈하여 서구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런 상황에 중국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은 전통적 우방국인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진하게 되나, 이 역시 서구열강에 뒤이어 신흥 산업국으로 성장한 일본 때문에 사사건건 제동과 충돌이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서구 열강에 의해 패퇴한 중국을 이어 동아시아 주도국가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영향권 확보를 획책하고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자국 산업의 지속적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넓은 시장을 확보해야 했으며 이런 점에서 조선은 일본의 좋은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양대 세력의 각축전 가운데 1894년 동학민중항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당시 스스로 이 민중의 저항운동을 제압할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청에게 지원병을 요청하게 되었고, 일본 역시 기존 청과 맺은 조약과 또한 자국민 보호라는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게 된다. 이 양군대의 갈등은 결국 청일전쟁으로 번지게 되었고, 1895년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게 됨으로써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1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을 정리하자면, 한마디로 전통과 새시대의 충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외부적 요소, 즉 서구 열강의 등장으로 인해 근대적 개념으로 변환되는 시기가 바로 이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 정치와 종교의 중앙에는 바로 유교라는 사유체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교에 대한 정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3. 동아시아에서의 종교와 정치

주희와 수운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종교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실 종교란 단어는 앞서 언급한 ‘근대’라는 개념과도 같이 전통적으로 동쪽에서는 잘 사용되던 용어가 아니다. 종교학자 W. C. 스미스의 지적과도 같이 현대인들은 종교라는 단어를 쉽게 물상화(物像化, reification)시켜서 이해한다. 즉 현대인은 종교란 단어를 마치 셀 수 있는 대상들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화되고 조직화된 각각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은 유교, 불교, 도교, 그리스도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등으로 종교를 거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란 단어의 처음 쓰임새는 명사라기보다는 오히려 형용사에 가까웠다. 즉 라틴어 ‘religio’는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대상적 종교를 지칭했던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지닌 ‘경건’한 자세에 가까운 뜻이었다고 한다. 즉 종교라는 단어는 본디 ‘믿음’, ‘성실’, ‘경건’ 등으로 새겨졌는데 이것이 18세기 이후 서구 세계가 비그리스도교 계통의 종교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게 독립된 이름을 붙임으로써 마치 종교가 명사적 대상인 것처럼 ‘오해’되기 시작했다고 스미스는 지적하고 있다.

현대 종교학에서는 이 종교란 용어를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미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Ninian Smart, 1927~2001)는 종교학의 과제를 ‘세계관 분석’으로 보고 있으며, 독일의 종교학자 라이너 플라쉐(Rainer Flasche)는 종교를 ‘세계 설명체계’(Welterklärungssystem)와 ‘인생문제 극복체계’(Lebensbewältigungssystem)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종교를 규정하게 되면 이전, 즉 성스러움, 신 존재, 구원의 여부에 따라 종교를 구분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종교의 정의는 보다 광범위해진다. 즉 종교는 각 개인이 생활세계 내에서 그 세계와 조우하며 형성하게 되는 일종의 세계관이며, 아울러 그것은 각 개인이 지닌 삶의 문제를 극복하는 체계로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구도에서는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 라는 주제는 매우 낡고 고루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는 동아시아에서는 원대 이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고, 특히 조선은 중국보다도 더 치밀하고 철저하게 유교적 가치관으로 유지되던 사회였다. 아울러 유교는 중국과 한국의 정치의 중추를 이루는 관료양성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교육시스템이었고, 이들에 의해 유교적 가치관은 유일한 사회적 에토스로 자리 잡아 유교중심 국가, 특히 조선조 사회의 경우는 마치 중세의 그리스도교와도 같은 일종의 종교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선조라는 유교 종교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토대는 그 중에서도 주자학이라는 특정 사유-가치 체계였다.

무엇보다도 주자학은 ‘군신 공치주의’를 이상으로 하여 물리학과 윤리학(정치학)의 통합을 시도한 세계관 운동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송(南宋, 1127∼1279)시대에 완성된 주자의 학문에는 당시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던 향촌 지주들의 대 사회 영향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스며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주자는 자신의 출신계층이기도 했던 향촌 지주층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군왕의 영향력을 제한했어야 했으며, 그를 위해 핵심 기재로 사용한 것이 바로 ‘천리’(天理)라는 개념이다. 즉 일국의 군왕, 황제라도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법도를 정치 전면에 내세우고, 또한 그것을 강력히 이념화 시켜 임금과 신하가 공히 권력을 나누어 갖는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충실히 현실에 적용한 사회가 바로 조선왕조였다. 왕세자와 임금을 서연(書筵)과 경연(經筵)이라는 명목으로 유교적 도학정치 공부를 시키며, 꾸준히 신권의 영향권 아래 묶어두고자 했던 조선조 정치의 흐름은 ‘군신 공치주의’ 실현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종교국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조선조 정치이념의 근간을 이루게 된 송대 주자학의 특징과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자.

3.1. 주희의 사서 운동: 정교한 정교일치 사상의 등장

앞서도 언급했듯이 주희에 의해 종합된 새로운 형태의 유교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서는 ‘신유학’(neo-confucianism)이라, 그리고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성리학’이라 불린다. 그만큼 주희에 이르면 성과 리가 매우 주요한 종교-정치사상적 용어가 된다. 물론 이는 주희만의 사유결과물은 아니다. 주희 이전에 이미 많은 유학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다양한 논의의 종합적 결과가 바로 주희의 성리학이다. 멀게는 북송(北宋, 960~1126)시대 주돈이(周敦頤, 1017~1073)로부터 새로운 경향의 유교가 시작된다. 주돈이는 도덕 규범 설립을 위한 사회 철학적 정신활동 정도에 머물러 있던 이전 유교에 우주론을 결합시켜 유교적 논의를 형이상학적으로 한 단계 올라서도록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주돈이의 이런 작업으로 인해 불교와 도교에 뒤쳐져있었던 유교의 형이상학적 담론이 추진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유교의 흐름은 정명도(程明道, 1032~1085)-정이천(程伊川, 1033~1107)으로 이어지며 보다 세련된 성(性)-리(理)-담론이 보충되어 바야흐로 도-불 전성기에 새로운 유교가 배태될 사전 작업이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상적 정황에 사회적으로는 또 다른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향촌 지주계급의 유의미한 성장이다.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에는 ‘강남농법’이라는 신기술이 크게 한몫을 하고 있었다. 남송대에 이르러 중국은 적잖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농업기술의 발전이다. 동물의 변과 자연적 지력에 의존하던 이전의 농법과는 달리, 강남농법에서는 인분을 비료로 활용하게 되었고, 모내기를 통하여 벼의 병충해 예방과 방지에 효과적인 결실을 얻으며 소출의 확대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일모작에 머물던 이전과는 달리 다모작 농사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는 향촌 지주층에게도 의미심장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소규모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향촌 지주들도 이전보다 늘어난 수확량을 중심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는 이전보다 늘어난 여가시간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얻어진 여가 시간에 그들은 독서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독서 행위는 곧 사회경영의 큰 꿈을 꾸게 만들어 이들의 정치적 욕구를 증대하는데 또한 한몫을 하게 된다. 바로 이런 사회적 변화에 향촌 지주층들의 사상적 젖줄이 되어준 것이 바로 주희의 사서운동이다.

주희는 무엇보다도 이들 서물이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요소에 주목하였다. 주희의 입장에서는 이들 책이 공맹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당시 횡행하던 도불의 형이상학적 논의를 뛰어넘으면서도 이들보다 더 뛰어난 점은 자기 수양과 국가 경영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 보았다.

무엇보다 주희가 사서운동을 통해 전면에 내세우고자 했던 것은 물리와 윤리의 통합이다. 이런 구도야 말로 당시 남송이 취하고 있던 귀족중심의 정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정치 하에서는 유교 지식인들의 국가 경영 참여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를 수련하고(修身), 가정을 평탄케 하고(齊家), 국가를 경영하여(治國), 세상을 평탄케 해야(平天下)하는 도덕적 사명감을 현실세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혈연과 신분 중심의 견고한 귀족 정치를 파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주희는 이를 하늘로부터 찾고 있다. 하늘의 이치(天理), 즉 사물의 존재이유를 규범화하고, 또한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특성을 구성한다는 주장을 통하여 주희는 귀족이나 황제도 어찌할 수 없는 도덕률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주희의 입장은 당시 사회에 생겨나는 문제들은 “황제가 하늘의 이치를 좇아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의 큰일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주희는 이러한 자신의 정치철학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종합한다. 특히 사물과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는 천리는 주희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도덕률의 뿌리가 된다. 하늘의 마땅한 도리는 자연 만물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며, 마땅히 사람들도 그러한 천리를 기준으로 도덕의 규범을 삼아야 하며, 이 점에서는 천하 만민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임금이라, 더 나아가 황제라 하더라도 천리의 준엄한 준거 앞에서는 침묵하고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주희의 도덕적 요청에 “하늘이 명한 것이 性이며, 그 성을 따르는 것이 道이고, 도를 닦는 것이 가르침(敎)”이라는『중용』의 첫 구절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보편적 도덕률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주희의 목적의식과 정확히 맞아떨어졌고, 주희는 이를 근거로 그의 이기론을 더욱 확장시킨다. 주희는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만물이 하늘이 부여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하늘과 만물을 존재론적으로 연속선상에서 파악함으로써 주자학의 인간이해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이러한 주자학의 긍정적 인간 이해는 누구나 학습을 통해 聖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명제로 발전해 간다. 유교적 맥락에서 성인은 공맹 등을 위시한 옛 스승들에게 부여하는 명예로운 이름인데, 이때 성인은 단순히 도덕적 모범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실생활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존재로도 이해된다. 각자는 수련을 통하여 하늘이 부여한 성품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그리고 그러한 영향을 일반인들의 생활공간에도 미치게 하여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 그들 정치철학의 목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누구든지 학습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이렇게 유교적 학습을 통해 스스로를 수련한 이들은 임금을 돕는 관료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로 주희의 세밀한 심성론 전개로 인해 그의 작업이 형이상학으로 치우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주희 스스로는 학문의 목적을 추상적 세계에 두지 않았다. 주희가 생각하는 배움의 목적은 바로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이었다. 치지, 즉 앎에 이르고자 한 것은 생활세계에 통용되는 분명한 당위성을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역행은 각 개인의 심성을 변화시켜 도덕적 인간으로 만드는데 있는 것이다. 주희의 지향점은 생활세계에 구체적이고 능동적 변화를 야기하는 철학화에 있었으며, 따라서 단순히 그가 펴놓은 사상적 담론을 ‘도덕형이상학’(moral metaphysics)이라는 이름으로 추상과 사변의 영역에 묶어둘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앎에 이르기 위해 행하는 공부, 즉 학습이다. 이때 언급되는 유교적 학습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성현들의 지혜를 이어받는 것이 된다. 이는 곧 경전에 대한 독서법으로 발전한다. 물론 주희의 격물치지를 독서행위라는 하나로만 좁혀 볼 수는 없긴 하지만, 당대 여러 상황 속에서 주희가 제시한 수행법은 독서행위로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되면서 성리학의 담지자들은 독서 가능한 여가시간을 확보한 향촌지주계급들로 한정된다. 이렇게 하늘의 이치를 궁구한 유교 지식인은 우주의 법도를 인간 사회에 적용시켜 도덕률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하지만 기존 송대의 귀족 정치는 향촌 지식인들의 관계진출에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주희의 원대한 꿈은 한족이 아닌 몽골이 중국을 통치하는 원대에 이르러서야 제도적인 밑받침을 얻게 된다. 아무래도 소수민족 지배자로서는 귀족중심의 정치보다는 관료중심으로 중국전체를 장악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했을 것이고, 그런 그들의 목적에 주희의 주장은 매우 효율적이고도 매력적었을 것이다. 이후 중국사회는 주자가 펼쳐놓은 기획아래 전국이 철저한 성리학적 사회로 변모하게 된다. 향후 명, 청대를 거치며 양명학과 고증학 등이 반주자학적 목소리를 높이긴 했으나 천리의 사회적 실현을 정치로 본다는 주희의 정치철학적 구도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여전히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3.2. 주자학 왕국 조선

앞서 언급했듯이 주희의 정치철학은 그 뿌리에서 이미 정교일치 성격이 강하다. 하늘의 구성 원리를 인간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늘의 이치에 대한 충실한 확신과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자학파는 이러한 주희의 정치철학적 기획을 보다 더 철저히 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해『주자가례』를 편찬하게 되며, 이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뿐만 아니라, 일반 생활인들의 법규와 관례, 관습마저 정교일치적 주자철학과 하나가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주자학파의 기획이 보다 철저히 시행된 것은 기실 본향인 중국 대륙이 아니라 한반도에서였다. 고려 말에 유입되어 향촌 소지주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주자학적 성리학은 조선의 창건과 더불어 국가 이념으로 승격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창건에는 무인세력 이성계가 정점에 서있었긴 하지만,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는 무엇보다 성리학적 경세관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은 왕조 교체기부터 철저한 유교적 세계관으로 국가의 틀을 새롭게 짜기 시작하였다. 물론 유교적 경세관은 그것이 한반도로 유입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한국 정치현장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해왔지만, 조선조에서의 성리학은 이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지닌다. 조선조 성리학의 국가이념화는 이전의 다원적 정치 환경을 일원화시킨다는 분명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삼국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직전 고려왕조만 하더라도 국가 운영의 많은 부분을 유교로부터 빚지고 있었긴 하지만, 여전히 당시에는 토착세력과 불교라는 유교에 비길만한 견제세력이 엄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무교, 도교, 불교 등 기존 이념의 축들이 성리학 일변도로 정리되면서 본격적인 유교 일원사회가 시작되었다. 이는 마치 서구의 중세가 ‘그리스도교 보편국가’(res publica christiana)의 형태를 띤 것과도 같은 형태라 할 수 있다. 특히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지니고 있었던 중국과 달리 적당한 규모의 한반도는 공적 법제, 의례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모든 규례와 관습마저 주자학적 구도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철저한 주자학적 종교 사회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조 사회는 철저한 ‘주자학 왕국’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성리학이 지닌 정교일치의 특징을 가장 잘 현실에 구현한 왕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 초기에는 이러한 주자학적 통치구도는 주로 중앙의 계획 하에 시행되었고, 후반으로 갈수록 지방의 사림(士林)들에 의해 이는 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해져 조선조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사회적 에토스로 확대되어갔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영남지방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지식인들이 등장하여 소학(小學)에 기초한 유교 생활윤리를 향촌 깊숙이 뿌리내리는 작업에 매진하였는데, 이들의 소학운동은 일종의 ‘주자학 원리주의’ 운동으로서 조선조를 더 철저한 주자학적 종교국가로 만드는데 적잖은 공헌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자학이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19세기 동아시아는 여전히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고, 그 상태의 강도에 있어서 조선은 청보다 훨씬 견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정교일치의 조선 사회 한 가운데 수운은 강렬한 체험에 기초한 새로운 종교운동을 펴게 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와 정치가 미분화된 사회 속에 등장한 새로운 종교운동은 분명 종교라는 하나의 항목으로만 제한하기에는 그 영역과 폭이 더욱 넓고 깊다 할 수 있을 것이다.

3.3. 수운의 시천주 운동

이미 알려진 대로 수운은 최옥(1762~1840)이라는 당대 최고 수준의 학식을 소유한 유생을 부친으로 두었다. 그리고 실제로 최옥은 어린 시절부터 수운에게 체계적으로 유교 경전 학습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를 묶고 있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비록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수운이 지닌 유교에 대한 식견은 뒤쳐지지 않는 것이라 충분히 짐작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수운이 남긴 글에는 성리학적 용어의 빈도수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주자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용어인 理의 경우는 <포덕문>에서는 2회, <논학문>에서는 8회, <수덕문>과 <불연기연>에서는 각각 3회에 1회에 그치는 등 의도적이라 하리만큼 수운은 이 理라는 용어를 자제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리자가 사용되는 경우에도 성리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주자학적 용어에 가까운 것이 <포덕문>에서의 용례인데 여기에서조차 이기 이원론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자전적 의미에 가깝다고 봐야 할 정도이다. 반면 주자학적 용어라고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는 天과 人의 용례는 상대적으로 월등히 높은 빈도수를 보여주고 있다. 『동경대전』는 천이라는 글자가 총 46회 사용되고 있고, 『용담유사』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우리말인 ‘한울’이 30차례 나온다. 그리고 人과 사람이라는 글자의 용례는 『동경대전』에서는 총 71회, 『용담유사』에서는 115회에 이르고 있다. 더욱이 관심을 가질 만한 용례는 리와 더불어 성리학의 주요 개념인 性의 사용 횟수이다. 『동경대전』만 놓고 본다면 이 성이란 글자는 단 한 군데에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수운의 용어 사용은 성리학 경전 공부를 마친 지식인으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다음 글에서도 금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성리학을 하는 사람은 理, 氣, 性, 情, 體, 用, 本然, 氣質, 理發, 氣發, 已發, 未發, 單指, 兼指, 理同, 氣異, 氣同, 理異, 心善無惡, 心善有惡을 말하며, 세 줄기 다섯 가지로 천 가지 만 가지 잎사귀로 털같이 나누고 실같이 쪼개어 서로 성내고 서로 다툰다.”

물론 이 대목은 성리학의 사변적 이기논쟁에 대한 정약용의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당대 유학자들은 앞서 다산이 언급한 성리학적 용어들을 입에 달고 있었으며 매우 빈도수 높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충분히 유교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수운은 극도로 성리학적 용어들의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 혹은 무의식적 누락이기 보다는 수운 스스로의 의도적 행위로 봐야 할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운은 극도로 성리학적 용어 사용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으로부터 우리는 수운이 가지고 있는 반주자학적 성향, 혹은 주자학적 국가 질서에 대한 저항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운과 그의 동학이 여러 면에서 유교와 닮았다고 해서 쉽게 유교 친화적이라고 재단하는 행위는 매우 유의해야 할 부분이라 할 것이다. 비록 여러 점에서 수운이 보여주는 모습이 유교의 그것과 닮았다 하더라도 수운은 의식적으로 성리학, 즉 주자학의 자리는 피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 했던가”라는 수운의 선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구도 속에는 당대 유교를 대표하는 성리학의 종결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운은 의도적으로 주자의 리를 대신하여 천이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주자의 리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물의 질서를 이루는 것이며 지극히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개념이다. 반면 수운의 천은 일상 생활세계 속에서 늘 구체적으로 만나고 있는 대상이며 그에 따라 추상적 연상 작업이 크게 필요치 않는 매우 친근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수운은 의도적으로 주자학적 리의 개념을 천으로 대체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하고자 했던 수운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는 그의 경신년 체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수운과 기존 유교 지식인은 확연히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일반 유교 지식인도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고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 경(敬) 공부에 열심을 내곤 하였다. 그리고 수운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전국을 유랑하는 생활을 정리한 후에는 깨달음을 위한 수련의 길에 들어서게 되며, 그때 수운이 행했던 수행의 길 역시 유자들의 경 수행과 크게 다르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덕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인격적 대화가 가능하게 여겨지는 상제란 존재를 수운처럼 체험했다고 하는 다른 선비들의 기록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운과 주자학은 갈라선다고 할 수 있다. 반복되는 독서공부를 통해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천리와는 달리, 불현듯 조우하게 되지만 너무나도 뚜렷하게 각인되는 천, 혹은 상제. 그리고 그 상제라는 존재를 통해 얻게 되는 도덕의 기준들.

이는 곧바로 공부론의 변화를 촉구하게 된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정교일치를 추구하는 사유체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리학의 규범을 획득하는 일은 공부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 공부는 주로 독서행위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즉 성현의 진리 체득을 독서를 통해 나누어 갖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적잖은 문제가 파생된다. 특정 계층에게만 주어지는 당시의 독서를 위한 여가 시간은 결국 진리의 획득자가 곧 권력자가 되고, 그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정교일치의 이념이 시행되고 유지되는 구조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실 수운 스스로가 이러한 성리학적 세계 질서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리 대신 천을 대체하고자 하는 수운의 의도는 바로 이런 기존의 성리학적 세계 질서의 재편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훈가>에 실려 있는 수운의 다음 노래는 그 의미하는 바가 심대하다 할 것이다.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말가

내 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전혀 믿고

해몽 못한 너희들은 서책은 아주 폐코

수도하기 힘쓰기는 그도 또한 도덕이라

문장이고 도덕이고 귀어허사 될까 보다

열 세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였어라

현인군자 될 것이니 도성입덕 못 미칠까

이같이 쉬운 도를 자포자기 하단 말가

애달다 너희사람 어찌 그리 매몰한고”

결국 이 노랫말은 기존 성리학의 질서를 개편, 혹은 폐지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수운의 웅대한 포부를 담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특정한 소수 계층에 집중되고 있는 권력을 더 많은 백성에게 공유토록 하겠다는 의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수운은 이를 ‘시천주’라는 주문에 담아 본격적 포교활동에 나서게 된다.

이와 같은 수운의 행동은 당대 정교일치 국가의 주류들의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위협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같은 유교 지식인인 줄 알았는데 사용하는 용어는 성리학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학의 그것을 닮았으며, 전통적인 독서 공부법을 폄훼하는 것처럼 보이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 것 등등이 과연 그 당시 주류 유교 지식인들에겐 어떻게 비춰졌을까? 아마도 그것은 체제의 강력한 위협요소로 읽혀졌을 것이다. 즉 당대 주자학에 경도된 위정자들의 시각에 수운이야말로 주자학의 뿌리를 뒤흔드는 사문난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당대 주류들의 상황인식은 수운을 참수케 하는 판결문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동학은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바꾼데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헷갈리게 하고 어지럽혔으니 속히 엄벌을 내리지 않으면 나라 법을 세울 수가 없다.”

아이러니 하게도 사실 수운은 서학에 대한 대체운동으로 동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판결은 그것이 서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가 서학을 위협요소로 생각했던 것 역시 서학이 보여주는 모습이 성리학을 축으로 하는 조선의 통치 시스템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서학에서는 조선조 위정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었고, 제사와도 같은 전통적 제례를 거부하면서 그들만의 전례를 시행하고 있었다는 점 등등이 이러한 판단의 주요 전거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시 조선 정부는 그들의 통치철학의 핵심축이랄 수 있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훼손하거나 인정치 않으려는 세력들에게는 매우 단호히 대응하였다. 따라서 수운의 동학 역시 당시 위정자들의 시각에는 반체제적 운동의 하나로 해석된 것이고, 이는 수운의 시천주 운동이 가지는 정치적 의의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원했건 원치 않았던 건 간에 수운이 의도적으로 성리학적 용어를 회피하고 새로운 개념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은 결국 기존의 성리학 세력들에 대한 기대를 접었음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운의 시천주 운동은 단순한 종교운동으로서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 문명의 변혁적 해체와 재구성을 요청하는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운의 시천주 운동이 가지는 문명사적 의의는 그가 사용한 용어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교의 리와 예 등의 전통적 개념을 폐기하고, 천, 수(守) 등 기존의 신분제약을 파기하는 혁명적 개념을 전면에 배치함으로 성리학적 관료집단에 전면으로 저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동학의 혁명성이 유교관료집단의 거센 압박의 주요한 동기가 되었고, 결국 이러한 문명적 충돌의 결과로 수운의 처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제 수운의 시천주 운동은 단편으로 정리된 종교운동에서 국가 통치시스템 전체를 개벽하고자 하는 문명 운동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4. 맺는 글

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종교와 정치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 주요 코드는 바로 유교이다. 유교 중에서도 12세기 남송에서 형성되어 이후 원대를 거쳐 동북아시아의 절대적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주자학이 근대 동아시아의 종교-정치 관계를 이해하는데 핵심 열쇠 말이 된다 할 것이다. 주자학은 주희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하늘의 이치를 인륜과 통치의 기준으로 삼아 정교한 정교일치 수행을 위한 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중국의 경우 남송의 완강했던 귀족정치는 이와 같은 주자의 프로젝트가 시행되는데 큰 장애로 작용하였다. 결국 몽골이 지배하는 외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주자학은 관학이 되어 본격적인 유교보편국가 형성에 기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정변이 많았던 중국에서 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 사회을 유지하며, 중국보다 적은 규모의 인구와 영토를 지니고 있었던 한반도에서 주자학은 꽃을 피우게 된다. 게다가 이전 불교, 유교 등으로 섞여있던 다원적 통치이념이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 일원적 사회로 재편되면서 주자학 일변도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조선조 사회는 공적인 기구와 시스템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가정의 규례와 관습에 이르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적 에토스를 주자학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전 세계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주자학 왕국, 혹은 주자학을 정점에 둔 종교국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환경에서 여전히 종교와 정치는 하나로 결합된 형태를 띠었고, 조선조는 15세기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소학운동’과 17세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의리사상’ 등을 통해 보다 견고하게 한반도 전체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수운은 1864년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운동을 개창하게 된다. 수운 역시 정통 영남학파의 유학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지만 의도적으로 성리학적 용어를 자신의 글에서는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중친화적인 공부론을 펴면서 정교일치적인 완고한 성리학적 세계 질서를 파하려는 듯 한 모습은 당시 주류층에게는 체제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이러한 수운의 행위는 주류층에 의한 체포와 참형으로 결론이 났다.

이와 같은 긴박한 19세기 말엽 조선조 상황을 살펴본다면 당시 수운이 꿈꿨던 것은 단순한 종교적 깨달음의 확산이 아니라, 기존하는 성리학적 문명의 틀을 전변하여 새로운 평등적 세계를 이끌고자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수운의 이른바 시천주 운동은 현대적 의미로 해석되는 종교운동이라기보다는, 정교일치적 관점이 여전히 유효했던 당시로서는 주자학적 성리학을 대체하여 새로운 국가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또 다른 모습의 정교일치 운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운의 기획은 이후 해월의 지도를 거쳐, 동학민중항쟁을 통해 어느 정도 그 일단의 가능성을 내어 보이기도 했었다. 집강소의 설치와 운영, 그리고 항쟁 이후에도 지속되는 신문화 운동을 통한 사회개혁과 의식개벽의 주도 등 수운이 꿈꿨던 문명의 전환 시도는 여전히 동학의 진행형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운의 시천주 운동은 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열쇠 말로서 보다 세밀하고 주도면밀하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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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일이 생길까요? 간혹 대화의 패러다임이 서로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묵이 더 좋은 대화가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의 글에 과학적 검증의 칼을 들이밀 수는 없겠죠. 분명 시인은 "나팔 꽃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
    Date2006.02.2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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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 하느님

    작금 한국 개신교에서는 유일신에 대한 호칭으로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태여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유일신에 대한 강조'라는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기존의 한국적인 지고신 명칭은 천공신(sky-god) 혹은 일반신...
    Date2006.02.0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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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모론은 또 다른 모습의 신앙

    지극히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종교들은 기승을 부린다. 세속화된 사회에 세속화된 지식과 정보로 무장했다 자임하는 현대 세속적 지식인들 역시 이 점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종교, 혹 신앙은 기존의 신앙이나 종교시스템...
    Date2006.01.05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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