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08.07.17 08:05

뇌과학과 종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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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과 종교연구


1. 물음을 부르는 몇 그림들

몇 해 전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이름의 한 드라마가 방송을 탔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현직 경찰인 30대 후반의 한 가장이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조발성 알츠하이머Alzheimer병’에 걸려 기억과 인격이 파괴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주인공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그 가정의 사랑확인은 좀 더 분명해지고 또 깊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채로 있었던 뇌질환에 관한 정보 외에는 특별한 구석을 내세우기가 머쓱한 그저 그런 평범한 멜로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드라마는 나이 먹은 이들에게 주로 걸린다고 알려져 있던 치매라는 뇌질환이 상당히 이른 나이에도 생길 수 있다는, 당시 통념에서는 매우 낯설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하나를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다.

알츠하이머병은 초로치매의 주요원인이 된다. 이 질병은 대뇌피질의 신경세포가 어떤 이유로 죽어가게 되고, 그로 인해 기억력과 인격이 해체되어 끝내는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질환이다.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는 현대 의학에서도 아직은 이병의 구체적인 발발 원인과 그에 따른 효과적 치료법은 찾아내지 못한 상태이다. 그야말로 걸리면 죽음을 기다려야만 하는 무서운 질병이 바로 알츠하이머병인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종교연구를 업으로 하는 연구가에게 그냥 가벼이 스쳐지나갈 수 없는 매우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바로 이 드라마에서는, 또렷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기존 종교에서 취급하고 있는, 혹은 종교만의 전유물로 강조해왔던 것들에 대한 ‘근본적 물음 제기’를 반복해서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 ‘신’, ‘정신’, ‘마음’, ‘구원’ 등 너무도 종교적이고, 또 물질적 영역 내에서는 취급하기 곤란한 것이라 여겨지는 많은 주제들에 대한 메타적 질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 꾸민 이야기를 통해 좀 더 극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종교인이 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종교전통 내에서 매우 성실한 수행을 하고 있었고, 또 그로부터 얻어낸 종교적 가르침을 성실히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이 속한 전통에 대한 분명한 체험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신적 존재 혹은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 역시 충만했다. 이로 인해 그는 구원의 문제에서는 누가 무어라해도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종교인에게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찾아온다. 그에게 알츠하이머라는 이름의 뇌질환이 생긴 것이다. 초로성 치매에 걸린 이 종교인은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도 점차 뇌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기억과 인격마저 해체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결과는 매우 참혹했다. 특히 종교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결과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알츠하이머에 의한 뇌기능의 쇠퇴는 결국 그가 주장해 마지않았던 소속 종교전통 내의 모든 교리와 의식, 심지어 신에 대한 체험마저 무의미한 영역으로 밀어 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로부터 진지한 종교체험이나 깨달음의 고백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이전에 그가 했을 것이라 여겨졌던 그런 유의 체험에 대한 반추는 이제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체험, 혹은 고백은 대뇌피질의 화학적 작용의 한계 내에서만 머물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에게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와 같은 가상의 이야기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며 종교를 물질보다는 정신, 혹은 영혼의 영역에 묶어두려 했던 기존의 종교연구 방식을 180˚ 다르게 살펴볼 수 있는 성찰적 여유를 제공한다. 그리고 사실 지금 많은 뇌과학자들은 ‘정신’, ‘마음’이라는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역에서 주로 쓰이던) 용어를 ‘물질의 언어’로 치환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이전보다 훨씬 풍부해진 뇌에 대한 연구 결과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뇌는 여전히 많은 부분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있긴 하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분명히 이전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뇌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와 근거를 마련해 주었고, 이들 연구 결과들은 이전 데카르트가 보여줬던 실체에 대한 이원론적 도식을 많은 부분 교정해주고 있다.
바로 이런,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최근의 뇌에 대한 연구들이 이 글을 이끄는 주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글이 최근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다양한 뇌연구들의 성과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것만을 주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뇌연구의 흐름과 결과들이 종교연구에 어떻게 쓰일 수 있고, 또 종교연구의 흐름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 가를 거칠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이 가지는 본래의 목적에 더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뇌를 통해 세계를 본다는 것의 의미

뇌는 인간의 생체조직 중에서 매우 중요한 기관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뇌라는 조직의 특수성에 기인하기도 하는데, 뇌는 인체 조직 중에서 유일하게 관찰자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살펴볼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누구도 살아있는 자신의 뇌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없다. 아니 자신의 뇌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살아있는 뇌를 직접 관찰하며 그것의 기능과 역할을 세밀히 살펴본다는 것은 사실 꿈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뇌에 대한 연구는 혁명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단한 외골격 안에 감추어진 뇌를 쉽게 이미지로 만들어 살펴볼 수 있는 기기가 만들어진 것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자기공명영상(MRI)magnetic resonance imaging이나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과도 같은 기기들은 살아있는 인간의 뇌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장비들의 도움으로 지금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뇌가 어떤 메커니즘을 따라 움직이고 기능하는지를 매우 세밀한 그림을 통해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두개골을 여는 위험부담 없이도 뇌가 외부의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심지어 실시간으로! 이와 같은 의료기기의 변화는 뇌연구가들로 하여금 이전에는 살펴볼 수 없었던 영역으로까지 관심을 넓히도록 해주었고, 그 결과 이제 인간은 전에는 종교와 철학의 영역에 주로 묶어두었던 정신을 ‘과학적 탐구와 분석’을 위한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지금 많은 뇌연구가들은 마음과 의식은 ‘물질’의 문제와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데카르트 이후 상식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깨지지 않고 있던 ‘심신이원론’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위해 다른 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체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실체로 정신과 물질을 꼽았다. 정신은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이고, 물질은 ‘외부 물질계에 자리를 잡고, 그것을 이어가는’res extensa 실체이다. 데카르트는 이 두 가지 실체는 서로 뒤섞일 수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보았고, 거기에 하나의 실체, 즉 앞서 설명한 두 개의 실체를 창조한 존재로서 신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최근 뇌연구는 이와 같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의식이나 마음, 그것들은 물질과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바로 물질, 즉 뇌 때문에 생겨난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일본의 해부의학자 요로 다케시는 ‘구조’와 ‘기능’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물질인 뇌가 구조라면 마음은 그 뇌의 기능일 뿐이다. 따라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의 영역을 벗어나있는 것이고,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고차원적인 것으로 구태여 해석할 필요가 없다. 이 문제는 뇌와 마음 외에도 다른 몇 가지 예를 통해 좀 더 분명해 질 수 있다고 요로 다케시의 설명은 이어진다. 즉 ‘심장’과 ‘순환’도 이와 같은 범주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장 역시 물질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체 가운데 하는 일은 ‘순환’이다. 하지만 심장을 아무리 해부한다고 하더라도 순환이라는 기능을 실체로서 살펴볼 수가 없다. 이처럼 마음은 분명 물질은 아니지만, 물질적 존재인 뇌의 기능으로 발현된 것이다. 따라서 뇌라는 물질 없이 마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 혹은 마음이 뇌의 활동 때문이라는 것은 우울증 및 여러 정신병 치료에 향정신성의약품들이 쓰이고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마음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징후들이 물질인 약물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조절 가능하다는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을 초월해서 있다고 볼 수 없는 구체적 증거가 된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재미있게도 근세를 여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설보다는 영혼마저도 물질적 원자의 조합으로 읽었던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이 현대 뇌과학에서 보는 마음이해에 오히려 더 가깝다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과학자들은 뇌에 대한 정보를 쌓아올릴 수 있었을까. 재미있게도 그것은 뇌 기능 손상을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부터이다. 물론 이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데에는 앞서 언급한 여러 기기들의 발달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여하튼 다양한 뇌손상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뇌과학자들은 이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뇌의 많은 기능과 특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몇 개의 예를 들자면, 우선 우리는 철도 노동자였던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의 사례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그는 1848년 9월 13일 철도 공사장에서 암석을 폭파하는 작업을 하다가 두께 3센티미터, 길이 90센티미터의 충전용 쇠파이프가 머리를 관통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런 끔찍한 사고 가운데에서도 천만 다행으로 게이지씨는 죽지 않고 목숨을 이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뇌 역시 여전히 큰 무리 없이 기능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고 후에도 게이지씨는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활동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변화는 의외의 영역, 즉 성격에서 나타났다. 사고 후 게이지씨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전과는 달리 자제력을 쉽게 잃었고 괴팍스럽고 고집이 센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런 게이지씨 사례를 통해 연구자들은 인간의 인격형성과 관계된 합리적 결정과 판단을 주관하는 뇌의 영역이 전전두피질prefrontral cortex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뇌의 각 부위는 각자 맡겨진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한 또 다른 사례는 링컨 홈즈의 경우이다. 홈즈씨는 오래 전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그는 치명적 상황에서 벗어나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이전에는 없던 색다른 장애가 생겨났다. 사고 후 그는 외부 사물을 바라보는 데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구별해 내는 데에는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였다. 단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경우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얼굴을 확인해야 할 사람의 숫자가 둘 이상 늘어나게 될 때에 홈즈씨는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쇼핑센터에서는 자신의 아내마저도 제대로 구별해내지 못했다.

또 하나 충격적인 장면은 새러라는 여성의 뇌종양 수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뇌종양을 완벽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수술 중에도 환자의 의식은 반드시 각성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환자의 의식이 있는 경우에만 뇌의 중요한 부위가 훼손되지 않고 깨끗이 종양만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료진은 환자의 두개골을 연 이후 다시 환자의 의식을 회복시켜야만 했고, 환자의 의식 유지를 위해서 간호사 한명은 끊임없이 환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했다. 여기서 간호사는 새러로 하여금 숫자를 세도록 하였고, 의사는 종양부위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메스를 대야 할 대뇌피질의 여러 부분을 작은 전기 장치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뇌의 이곳저곳을 조심스레 누르고 있었는데 특정 부위에 전기 자극이 가해지자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새러의 언어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정상적으로 숫자를 세는 일에 열중하던 새러가 갑자기 그 행위를 중단하고 고장 난 오디오처럼 특정 발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곱’을 셀 때, 뇌의 한 부위에 전기 자극이 가해지며 새러는 갑자기 ‘일..’, ‘일..’, ‘일..’과 같은 식의 반복되는 발음만을 내뱉는 것이다.

이런 여러 뇌손상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신경과학자들은 뇌의 여러 부분은 각기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표현하면 <그림2>와 같다. 인용한 그림은 인체의 크기를 뇌에서 다루는 부분의 영역 크기에 따라 재구성하여 그린 것이다. 그리고 뇌의 각 부분에서는 어떤 영역을 취급하는지도 지금은 많이 밝혀진 상태이다.

뇌의 기능과 속성을 살필 수 있는 또 다른 경우는 ‘환지통’幻肢痛, fant me de douleur환자들을 통해서이다. 환지통은 사고나 질병으로 팔이나 혹은 다리를 잃은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세이다. 이들은 사라진 팔과 다리 부위에서도 소실되기 이전의 감각과 심지어 통증까지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런 환지통 환자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뇌는 인간 몸에 대한 지도를 그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 지도에 따라 필요한 조절 신호를 보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사고로 팔을 잃었지만 여전히 정상의 뇌 속에는 소실된 팔의 위치가 맵핑화 되어있고, 이로 인해 뇌의 입장에서 여전히 그 팔은 존재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사고로 잃은 팔이 가질 수 있는 감각과 통증을 위한 신호를 꾸준히 생산해 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뇌는 외부 대상의 세계를 감각기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뒤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자신의 논리기재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본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뇌’가 ‘보는’ 것이요, 그 뇌는 감각기관에 걸린 다양한 대상들을 ‘해석’하면서 ‘모니터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실시간 생중계하듯이 우리는 외부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봄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철저히 ‘뇌의 해석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과 꿈의 세계는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뉴욕대학교의 신경과학 교수인 로돌포 리나스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꿈도 역시 의식의 한 형태이며, 그런 점에서 꿈과 의식의 세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뇌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이 꿈을 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호랑나비 꿈’胡蝶之夢이 과학적 지지를 받게 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이제 세상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뇌’이며, 또한 ‘내’가 아니라 ‘뇌’이다.

왜 세상을 보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뇌라고 했는가? 이 문제는 인간의 반응 운동 메커니즘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상식의 영역에서 우리는 감각기관의 주관주체로서 ‘자아’를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언어세계 속에서도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움직인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 우리 몸의 운동 메커니즘을 유심히 관찰하면 보고, 듣고, 움직이는 주체가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생리학자인 패트릭 해거드의 실험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 주요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해거드는 피실험자의 두개골에 전극을 설치하고 운동피질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기록하는 실험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의식적으로 자아가 운동여부를 결정한 이후에야 운동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봐야 하겠지만, 실험 결과는 우리의 예상을 보기 좋게 벗어났다. 즉 운동 피질이 먼저 활성화하고 나서 대략 1초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의식이 운동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몸의 주체자인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특정한 행위를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화된 자아는 오히려 무의식적 자아의 판단과 결정을 뒤에 깨달을 뿐이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 몸을 실제로 관장하는 세력은 의식이 아니라 ‘잠재의식’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뇌라고 하는 물질기관의 부차적 조건이지 절대적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 이 실험결과가 보여주는 웅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유의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우리는 상식적 수준에서 여전히 우리 몸을 제어하는 주체로서 의식적 자아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와는 달랐다!

이제 뇌과학자들은 조심스레 결론을 내리기 시작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의식과 마음의 문제를 물질의 차원으로 치환하는 결정이다. 이제 적어도 신경과학 내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독립적 실체로 해석하지 않는다. 수많은 물적 증거들로 인하여 이제 과학자들은 과감하게 마음을 물질인 뇌의 한 작용, 혹은 기능으로 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현대의 과학은 데카르트의 세계 이해를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는 마음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 모습을 상호 정보교환을 위해 전기신호를 발생하는 신경세포, 즉 뉴런neuron에서 찾을 수 있다. 뉴런은 우리가 의식, 혹은 마음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하나의 세포인데 입력과 출력기능을 갖춘 독특한 모양의 신경세포이다. 뉴런의 입력부분을 맡고 있는 부분을 수상돌기dendrite라 부른다. 수상돌기는 가는 전선 모양으로 생겼는데 하나의 뉴런에 보통 10만 여개 정도 있다고 한다. 이 수상돌기는 이웃 세포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세포체 중앙 통제영역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후 세포체 중앙 영역 내에 도달한 정보는 판단과정을 거쳐 역시 가는 전선 모양의 출구인 축색을 통해 외부로 보내진다. 많은 수의 수상돌기와는 달리 축색은 뉴런 당 한 개씩만 존재한다. 이 축색돌기 말단과 다른 뉴런의 수상돌기 사이에는 시냅스synapse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축색돌기의 전기 신호는 이 시냅스를 통해 신경전달을 위한 화학물질로 바뀌게 되고 이를 통해 뉴런들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나누게 된다. 따라서 뉴런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끝부분이 미세하게 단절된 불연속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우리 뇌에는 대략 1,000억 개 정도의 뉴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각각의 뉴런에 십만 개 이상의 수상돌기를 생각해보면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기묘한 불연속적 신경세포들의 조합과 정보 교환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뇌가 세상을 보는 방식 그리고 종교연구

마음과 의식이 뇌라는 물질기관의 영역 내의 것이라는 잠정적 가설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종교연구에 있어서도 이 뇌라는 기관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면밀히 이 뇌라는 기관의 특성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기실 뇌라는 인체의 기관은 ‘운동’ 때문에 존재한다. 따라서 움직임, 그것도 외부 조건에 응하는 매우 민첩한 반응이 필요 없는 식물의 경우는 당연히 뇌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명체라고 반드시 뇌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밝혔듯이 식물은 뇌를 필요로 하지 않고, 동물이라 할지라도 움직임이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뇌가 퇴화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렁쉥이sea squirt의 경우를 보자. 우렁쉥이는 등뼈의 기원이 되는 척색notochord을 가진 동물이다. 이 생명체는 일생동안 두 번의 변형을 경험한다. 유생기의 우렁쉥이는 300여개 정도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 뇌와 유사한 형태의 신경절을 가지고 있고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면서 살아간다. 마치 올챙이처럼 생긴 우렁쉥이 유생은 성충이 된 다음에는 일정한 자리에 고착하게 된다. 그리고 위치가 고정되면서 유생기의 뇌 조직 대부분은 몸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즉 성충의 완성기에는 신경계가 필요 없는 생명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뇌라는 조직이 독립적으로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렁쉥이에게는 더 이상의 움직임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렁쉥이의 경우를 통해서도 우리는 뇌라고 하는 조직은 결국 민첩한 움직임을 위한 조직이고, 그런 점에서 신경계의 최종적 조정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움직임이 필요 없는 환경에서 뇌는 더 이상 뇌의 필요성은 없게 된다. 즉 움직이는 생명체가 외부의 위협에 적절하게 반응하게 자신의 생명을 효율적으로 연장하기 위해 세밀하게 기획된 조직이 바로 뇌인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의 입장에서 뇌는 효율성의 극대화일 뿐, 생명 그 자체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몸은 세포의 군집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포의 모임은 크게 나누어 ‘신경’과 ‘근육’으로 나눌 수 있다. 신경은 외부의 정보를 해독하며 가급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정보는 해당하는 근육의 움직임을 유도한다. 따라서 신체의 움직임을 이루게 되는 마지막 행위자는 바로 근육이다. 이 간단한 구도에 뇌는 가능한 한 정확한 ‘판단’과 ‘예측’이 이루어지도록 움직인다. 즉 외부의 자극과 변화에 대해 가급적 자신이 속한 몸을 안전하게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뇌는 기능이요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 속에서 뇌는 당연히 자신의 해야 할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기대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협되는 요소의 진행방향을 정확히 예측하여 미리 피할 수 있다면 이는 세포 군집체의 생명연장에 매우 요긴하고 효율적인 메커니즘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한 스포츠 경기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야구경기에서 타자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투수의 공을 육안으로 확인한 후 대응하는 방식으로 타격하지 않는다. 능력 있는 타자의 경우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 미리 공의 궤적을 ‘예측’하고 정확히 자신이 점찍은 비어있는 공간을 향해 배트를 휘두른다. 그리고 이 예측의 정확도에 따라 타자의 능력과 실적은 비례된다. 이처럼 예측이라고 하는 것은 뇌가 가지는 본질적 특성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뇌는 이러한 예측 능력을 통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효율적으로 외부의 대상이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뇌가 속한 개체의 생명유지에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 없는 에너지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라도 뇌는 예측이라는 방식을 자신의 주 기능으로 사용하게 된다.

예측을 목표로 삼는 뇌는 당연히 세계를 하나의 ‘법칙 속’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외부의 자극과 위협적 요소들이 불특정하고, 불규칙하다면 예측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움직임을 결정할 수 없고, 그렇게 우왕좌왕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가운데 결국 생명체는 치명적인 상해를 입을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뇌는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를 일정한 규칙과 법칙으로 ‘규격화’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세계 인식은 뇌가 ‘보고 싶은 형식’에 의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과율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한 영국의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은 아마도 최초로 뇌가 가진 선험적 형식을 메타적으로 생각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사물을 원인과 결과라는 틀로서 보고자 하는 뇌의 경향은 실험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1940년대 심리학자 알베르 미쇼트Albert E. Michotte는 피실험자들에게 특정한 동영상을 보도록 했다. 그 슬라이드는 붉은 사각형을 향해 움직이는 검은 사각형의 그림을 담고 있었다. 슬라이드 속의 검은 사각형은 붉은 사각형에 도달했을 때 멈춰 섰고, 붉은 사각형은 달려오던 검은 사각형이 진행하려던 방향과 동일한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미쇼트는 의도적으로 두 사각형 사이에는 물리적 접촉이 없도록 했다. 실험 결과는 검은 사각형과 붉은 사각형 사이의 물리적 접촉이 없었음을 인지한 피실험자들조차 이들의 운동을 원인과 결과로서 지각하려는 성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들이 두 사각형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경우는 달려오던 검은 사각형과 전혀 다른 방향, 예를 들어 직선이 아닌 직각 방향으로 움직였을 경우로 한정되었다. 이 실험을 통해서도 뇌는 그가 지닌 예측성향을 기초로 사물을 인과관계로 파악하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뇌가 보여주는 태도는 지극히 이기적이다. 외부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판단보다는 우선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개체의 안전을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판단하고, 예측한 후 그 일을 개체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는 것이 뇌의 속성이다. 따라서 뇌는, 앞서도 말했듯이, ‘내’가 아니다. 움직임이 주체도 의식적 내가 아니라 바로 뇌일 뿐이다. 인간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뇌의 ‘예측성’과 ‘인과성’의 교묘한 ‘연합작용’으로 생겨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뇌는 그러한 반복된 외부의 자극에 대한 신체의 반응을 프로그래밍화해서 자신의 신경세포 안에 하나의 완결된 지도를 그려놓는다. 효율적으로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한 뇌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 안에 그려진 지도는 그것의 실재여부와는 관계없이 존재성이 부여된다. 이런 단적인 예는 이미 앞서 환지통을 통하여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뇌의 속성은 결국 외부의 대상, 혹은 외부 세계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것들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성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뇌는 외부 세계의 사실 여부에는 큰 관심이 없다. 뇌가 보고, 읽고, 해석하고 있는 세계는 이미 뇌의 세계 이해 방식에 의한 ‘필터링’된 것들이다. 즉 뇌는 자신이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독하기 좋은 방식으로 세계를 풀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손쉽게 이해, 혹은 판단 대상의 실체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뇌가 주축이 되어 일어나는 모든 의식 활동, 혹은 인지과정은 전적으로 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의식의 수준에서 인지하는 외형적 자아는 그것을 실체의 세계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확히 뇌가 받아들이는 데이터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없다. 이미 우리에게 읽혀지고 있는 세계는 뇌에 의해 해석된 세계일뿐이다. 다만 외형적 주체로서 우리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일종의 ‘믿음’을 가지고 뇌가 명령하는 행동에 충실하게 응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뇌의 이러한 성향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실체론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보게 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종교연구에도 특정 방향에 집착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즉 우리는 종교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때, 특히 어떤 종교전통의 교리나 그들 신앙내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자 할 때 주로 실체론적인 접근을 하게 된다. 그래서 흔히 보이는 분류의 패턴이 신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 등등의 도식이다. 그래서 유신론적 성향이 강한 종교전통인 경우에는 그 신의 속성이 어떠하고 다른 유사 종교전통과 비교하여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기술하는데 골몰한다. 하지만 뇌과학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이 기술과정을 반추해 본다면, 어쩌면 이런 유의 연구태도는 뇌가 세계를 인식하는 형식 안에 갇혀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래서 뇌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을 ‘신’이라 지칭하고 그것에 실체성, 혹은 존재성을 부여한 이후 그 특성의 기술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지금의 종교연구는 뇌라는 조직의 인식 한계 안에서 그가 쳐 놓은 환망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연구는 본디 여러 종교전통들이 목적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도 많은 거리를 두고 떨어지는 현상은 아닌지 또한 묻고 싶어진다.

거친 정리이긴 하지만, 어쩌면 종교는 뇌가 지니는 자기 구성성에 대한 ‘문화적 반발’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설명했듯이 뇌는 자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스스로는 그보다 더 심연에 위치하여 결국에는 몸의 모든 것을 조절하는 절대적 주재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대부분의 종교전통들은, 그것이 구원 혹은 해탈이든 그 명칭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의식의 세계를 해체하고 본질적 존재로의 귀의, 혹은 연합을 제 일의 목표로 삼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가 그렇고, 불교의 ‘니르바나’nirvana 역시 그렇다. 힌두 전통의 명상과 요가 또한 ‘의식적 자아의 해체’를 종교수련의 우선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들 행위는 뇌의 성향에 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형식 하에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뇌가 가진 성향을 이들 종교들은 원초적 형태로 돌리려는 시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체험이 되었든, 열반경험이 되었든 간에 인류 옆에 있는 다양한 모습의 종교들은 끊임없이 자의식의 해체를 통하여 ‘존재론적 피곤함’과 ‘분주함’으로부터 스스로를 피신코자 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종교수련, 혹은 종교행위의 지향점은 뇌의 지각 형식, 혹은 외부 세계 재구성의 덫을 넘어 그렇게 작동하고 있는 뇌 그 자체를 직시하고자 하는 활동의 하나로 재해석할 수 있지는 않을까!

이런 거친 가정들을 납득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제 지금 많은 이들이 행하고 있는 뇌의 인지 형식한계 내에 있는 종교연구의 방향을 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따라서 뇌가 자신의 인식형식에 따라 설정한 가상적 실체에 대한 과밀한 집착보다는 다양한 종교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종교적 경험에 보다 많은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일종의 ‘수양론적 연구방법’이랄 수도 있겠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조직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특정 종교전통은 특정 의례를 통해 특정한 경험 유지를 강조하고 있는가?”, “그것을 유지하는 기술과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4. 성급한 마무리, 그리고 전망

미국의 유전학자 딘 헤이머Dean Hamer는 ‘신의 유전자’라는 용어를 주창했다. 인간의 DNA 속에는 종교적 성향을 보이는 유전인자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유전인자의 예민성 여부에 따라 개인의 종교적 성향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슐라이에르마허와 루돌프 오토가 주창하던 인간의 종교적 선험성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헤이머의 주장은 좀 과도하게 나간 면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살펴본 뇌과학의  연구축적을 생각해 본다면 이 역시 지나치다고만 치부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종교라고 하는 영역을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만 볼 필요가 없는 세대가 성큼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그런 점에서 현대 과학의 다양한 발전들 중, 특히 뇌과학에 집중해 그것이 종교연구에 적용되면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를 거칠게나마 그려보았다. 실제로 몇몇 뇌연구가들은 대뇌피질에 행하는 전기 자극을 통하여 종교적 경험과 유사한 결과를 얻어내려는 실험을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뇌과학자들의 연구로 인하여 기존 종교연구들의 연구 영역이 침범당하거나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문화연구로서 기존 종교연구가 가지는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들 뇌과학의 연구 결과를 충분히 수용하며 종교체험과 현상 그 자체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것 역시 현대 종교학이 충분히 지향해야할 학문적 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자면, 이 글에서 제시되고 있는 바는 ‘초점의 이동’, 혹은 ‘다변화’라 할 수 있다. 눈부신 뇌과학의 성과물로 인해 교정된 세계 이해에 기초하여 종교연구의 초점도 전통적 방식에 묶여있기 보다는 보다 다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점의 지향에는 ‘수양론’이 있으며, 그리고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수양의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학이 다양한 수량적 연구 결과와 방법도 과감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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