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08.03.22 15:47

신화, 그 원초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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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는 시간, 시간으로 생겨난 속 깊은 병

어느 때라도 거리에 나오게 되면 어김없이 우리는 포터블 소형 음향 기기나 멀티미디어 플레이어에 눈과 귀를 맡기고 있는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모습을 거리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중교통 안에서도 공원에서도 쉴만한 공간이 잠시라도 있게 된다면 어디에서고 무언가에 의지해 시간을 ‘때우고 있는’ 많은 이들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만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저토록 잠시라도 홀로 있는 시간을 충분히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질문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답변 하나가 흉물스럽게 걸려있다. 바로 시간. 역시 문제는 시간이다.

화려한 기술문명의 등장으로 인류는 이전에는 좀처럼 경험해 볼 수 없었던, 기껏해야 소수 특정 계급에 속한 이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꽤 많은 ‘남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갑자기 늘어나버린 여가시간.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꼭 선물만은 아니다. 별안간 늘어나 버린 남은 시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고픈 여러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선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또 하나의 부담을 이겨내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늘어난 시간이 주는 존재의 무게를 사람들 스스로가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생존하기 위해 분주해졌고, 따라서 여유와 쉼이라는 정서를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이전과는 달리 꽤 늘어나 버린 여가시간은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을 습격하는 무료함과 지루함, 그리고 심심함이라는 문명적 질병을 현대 인류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미처 준비되지 못한 그 무언가는 여가시간을 선물 받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하나의 짐일 따름이다. 게다가 삶의 공간이 점점 넓어져 하루에도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은 이미 하루의 시작부터 무료함과 싸워야 하는 숙명적 구조를 하고 있다. 전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택시 안에서, 승용차 안에서, 열차 안에서, 그리고 걷는 가운데 끊임없이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 눈과 귀가 무언가를 집중하게 한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드라마 시리즈에 빠지고 이도 저도 아니면 스스로의 존재 의식을 잠 속에 잃어버린다. 너무도 당연한 우리 현대인들의 일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구조적 특징을 쉽게 찾질 못한다. 그냥 당연히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시간을 때우는 줄로만 안다.

하지만 꼼꼼히 이런 인간 행위의 구조에 집중하노라면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시간이다. 앞서도 밝혔듯이 이 모든 문제의 고갱이에는 시간이라는 괴물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고 더 하나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바로 사람들이 그 시간을 무척 실감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문장을 좀 더 분명하게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지루함과 심심함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은 다양한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 행위의 최종적 목적은 바로 시간 넘어서기, 혹은 시간 잊기이다.’

이렇게 정리된 문장을 적는 바로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문제 하나가 주저 없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문제는 이렇게 정리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때로 사람들은 그것을 변화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그것은 물자체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의 경험 이전에 주어진 하나의 형식이라고도 설명한다. 허나 그 어떤 고귀한 설명들이 줄을 이어도 역시 인간에게 시간은 ‘죽음’일 따름이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낡아지고, 또 늙어간다. 그리고 그 낡아감과 늙어감의 끝은 소멸과 죽음일 뿐이다. 문제는 이 낡고 늙어가는 것이 자연스레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그 흘러감은 자연스럽겠지만 그것, 죽음과 종결에 대한 인식이 먼저 인류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 문제의 알맹이가 눈앞에 와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시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별다른 모습을 읽어볼 수 있다. ‘시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존재’. 그것이 사람이다. 자신의 소멸을 생존 시에 실감할 수 있는 존재. 다른 이들의 죽음을 통해 나의 소멸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는 확연한 기준. 바로 시간에 대한 인식이다. 내일을 걱정하며 불안에 사로잡혀 좀처럼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짐승을 하나라도 본 일이 있는가. 이처럼 시간을 인식하고, 앞의 일을 오늘로 불러들여 고민의 길이를 늘이는 존재는 오로지 사람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류의 존재론적 질병은 주변 환경과 사건들을 이해 가능한, 예측 가능한,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야마는 인간의 ‘인과론적 집착’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을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시간이라는 큰 틀의 선후 관계로 파악하고 나서야 안심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습성이 결국 어떤 짐승도 가지고 있지 않는 병, 즉 시간 때문에 생겨난 질병을 가지게 한 것이다.

시간을 안다는 것. 그것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일종의 특권이기도 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 미리 약속을 할 수 있고, 나의 미래를 꿈 꿀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적지 않은 축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의 끝은, 그것의 마지막은 생각하기도 싫은 그 무엇이기에. 당장 지금 그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는 당사자의 종말을 뜻하기에, 인간이 시간을 인지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임과 동시에 참혹한 존재론적 저주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이러니 하게 사람들은 시간을 인식하며, 또한 동시에 시간을 잊고자 애쓴다. 시간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시간의 무게를 몸으로 느끼면 느낄수록, 점점 자신의 끝이 가까이 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분명히 인식한다. 날이 가고 때가 지나고, 시간이 쉼 없이 앞으로 돌진하면 할수록 그 시간을 감내하는 주체의 생명력 역시 소진될 뿐이다. 시간이란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그것을 실감나게 느끼면 느끼는 그만큼 더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우리의 생활공간 속에서 온통 시간의 무게만을 느끼고 산다면 순간순간이 적잖은 고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언가 시간을 잊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해진다. 더 이상 시간이라는 괴물이 자신의 영역을 넓힐 수 없는 공간. 마치 모든 것이 멈춰 서있는 듯한, 태초의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곳. 인간은 끊임없이 분명한 무게감을 느끼는 세속의 시간을 넘어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속된 시간에 저항하는 멈춰있는 시간, 즉 거룩한 시간을 통해 사람들은 시간의 무게를 어떻게든 잊고자 한다. 결국 시간 때문에 생긴 병. 시간을 없애버림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2. 신화라는 치료약, 맨 처음 그때로!

시간을 인식함으로써 생겨난 이 존재론적 질병을 해소하기 위해 인류가 선택한 길은 바로 ‘신화’이다. 따라서 신화를 단순히 호기 넘치는 이야기나 신묘한 스토리 정도로 다루어서는 그 본 맛을 깨닫기 곤란하다. 신화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멋진 이야기들로 포장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신화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오산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신화는 시간으로 인해 생겨난 인간의 존재론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제시된 일종의 문화 생약이다.

질병의 원인과 그것에 대한 치유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결국 모든 문제 뒤에는 시간이란 놈이 숨어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시간이라는 괴물이 제공하는 실존적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해야만 한다. 홀몸으로 견디기에는 너무도 벅찬 시간의 무게! 따라서 사람들은 시간의 무게를 덜어줄, 혹은 없애버릴 수 있는 어떠한 장치를 열정적으로 요청하게 된다. 아울러 시간의 무게를 실감나게 만들어 곧 그것을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이끌어가도록 만드는 인간의 인과론에 대한 집착도 어느 정도 충족을 시켜줘야 한다. 결국 이런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신화는 ‘시간 없음’으로의 여행을 선택한다.

illud tempus!

바로 그 때! 모든 것들이 새롭게 생성되던 바로 그때. 여전히 생명의 힘이 강렬하게 작동되며 꿈틀거리고 있는 바로 저 태초의 순간을 신화는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신화는 세속의 공간 속에 성스러움을 잉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의 공포를 잊도록 해준다. 어떻게? 신화를 통해 최초의 시간을 지금 여기서 다시 경험함으로써! 그것이 바로 신화가 시간의 질병을 치유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신화는 처음을 이야기 하며, 기원을 말하게 된다. 저 위대한 바빌론의 신 마르둑의 이야기도 정확히 그 점을 겨냥하고 있다.

아주 멋 옛날 저 먼 하늘 위에서는 신들의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은 혼돈의 상징이며, 쓴물의 여신 티아마트와 그를 따르는 신들이 새로운 신들의 세계 구도를 뒤바꾸기 위해 봉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용의 이미지를 한 티아마트는 모든 신들을 낳은 신들의 어머니. 하지만 자식들의 권력찬탈 과정에서 남편을 잃고 한으로 똘똘 뭉친 여신이 되고 말았다. 여인네의 한은 행동을 개시한다. 곧 티아마트는 킹구라는 강력한 전사를 새 남편으로 맞아들이고 자신이 낳은 신들과 맞서 싸운다. 거대한 킹구가 지휘하는 부대와 그를 돕기 위해 티아마트가 친히 만든 여러 괴물들의 위세 앞에 반대편에 서 있던 신들은 매번 싸움에서 패하게 되고, 급기야 신들의 왕국 전체가 티아마트의 손아귀에 들어올 모양새가 되었다. 허나 반대쪽에도 마지막 패는 있는 법. 그들의 희망은 거대한 괴력을 소유한 신들 중의 신 마르둑이었다. 이 젊은 신 마르둑은 신들을 대표해 자신의 할머니뻘인 티아마트와 최후의 한판을 벌이게 되었다. 젊지만 현명했던 이 신들의 대표자는 티아마트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심리전을 통해 쓴물의 신 티아마트가 흥분하기를 기다린다. 여기 잠시 마르둑의 입을 통해 흘러나와 티아마트의 심장에 박혀버린 한 토막의 노래를 인용해 보자.

“그대의 힘이 막강하고
그대 분명 모든 신들 중의 여왕이었으나
그대 마음속엔 옳은 것이 간직되어 있지 않고
분쟁과 다툼만이 있을 뿐.
그대를 우리의 고조할머니로서 깍듯이 모셔 왔으나
마음속엔 원한만이 가득하여
형제가 형제끼리 다투고
자식이 아비에게 대항하도다.
잔인하고 비열한 흑심덩이,
생자나 사자의 신뢰를 저버리고,
아푸스가 떠나가자,
킹구를 맞이하였도다!
이 무슨 만용이며, 무례한 꼴인가?
옛 신들에게 도전타니,
괴물들에나 의존하여
그것들을 이끌고 진격하다니.
내 이르노니, 그대 혼자 오라!
부하들은 눈앞에 알짱거리지 말라 하고
단 둘이 겨루어 보자.
단 둘이서 자웅을 결해 보자!
(T. H. 가스터/이용찬 역,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평단문화사, 1985, 68쪽에서 재인용)

까마득한 손자의 놀림에 흥분한 티아마트는 결국 싸움에서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승리의 신 마르둑은 티아마트를 두 동강으로 나누어 한쪽으로는 하늘 위의 물을 바치는 천정을,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땅의 물을 가리는 덮개로 만들었다. 이렇게 땅과 하늘을 구분한 후 티아마트를 도와 반기를 들었던 킹구의 피로 인간을 만들어 신들에게 봉사하게 만들었다.

이 신들의 이야기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무슨 연고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즉물적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최초의 시간을 재연함으로 우선은 지금 나의 처지와 존재론적 위치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아울러 최초의 때를 여기서 경험함으로써 쇠락해진 생명력이 재생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마르둑 신화는 바빌로니아의 신년 축제 때 대규모로 재연되었고, 그 행사 속에 그들의 왕은 죽음과 재생을 반복함으로써 권력의 생명력을 새롭게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신화는 종교의식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는 신화가 단순히 스토리텔링에만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대 시대 대부분의 신화들은 구체적인 의례행위와 밀접하게 묶여있다. 신화는 이처럼 ‘참여의 현장’이다. 단순히 팔짱끼고 앉아 구경하기 위한 문화적 부산물이 아니라 공동으로 참여하여 공동으로 경험하는 참여의 문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공연을 통해 신화 속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원초적인 존재 체험을, 생명의 체험을 이 신화를 통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이미지가 상당히 직감적이고 촉각적이며, 자극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맥락에서는 잘 포착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런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에 주목해 보시라! 바로 그것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필요한 힘을 충분히 보충하기 위한 땅위의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일종의 안전장치인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과 세속의 지루함으로 인해 소실되어 가는 생명력을 다시 회복하는 의례, 바로 그것이 신화이며 신화적 제의인 것이다. 따라서 그 제의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은 원초적 존재 체험과 태초의 시간으로의 도피여행을 통해 지금의 문제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 속에는 태초와 현대의 이미지가 함께 녹아있다. 우선 맨 처음의 그때를 지금 여기에서 반복함으로 시간의 무게를 덜어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저 먼 옛날에만 멈춰 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를 풀어주는 일도 하게 된다. 즉 원초적 존재체험을 통해 지금의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다시 생활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생명력 넘치는 동기의 부여. 신화는 이러한 인류의 실존적 문제 해결에 대한 복합적 해결을 내리는 이미지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적 의례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재생을 경험한 이들은 새롭게 생활세계로 투신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화의 이미지와 관계된 또 하나의 문장을 뽑아낼 수 있게 된다.

‘신화는 맨 처음과 지금이 만나는 곳이다.’


3. 성공하는 신화, 그렇지 못한 경우

맨 처음과 지금이 만나는 곳. 바로 거기에 신화적 이미지의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 무조건 신들의 이야기라 해서, 화려한 묘사와 서사가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해서 신화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신화를 모태로 삼은 문화콘텐츠들이 등장을 해도 어떤 경우는 성공하고, 어떤 경우는 관객들의 무관심 속에 기억 저편으로 사그라진다. 왜 그럴까? 무엇이 이들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일까? 그것은 꾸며진 신화들이 본디 가지고 있어야 할 요소들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지 여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콘텐츠가 제대로 된 신화의 존재론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지금의 문제를 풀어주는, 혹은 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가 콘텐츠로서 신화가 지니는 성패의 기준이 된다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미야자키 가문에서 만들어낸 두 개의 작품이 보여주는 대비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하나는 아버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께 히메>(1997)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고로의 데뷔작이기도한 <게드전기-어스시의 마법사>(2006)이다. 물론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다만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게드전기>는 지브리의 작품치고는 매우 참혹한 성적표를 받아들긴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흥행 성적은 두 영화 모두 괜찮은 편이었다. 구체적인 흥행 수치를 살펴보자면, 우선 <모노노께 히메>의 경우 결산 수익이 192억 엔에 달한다. 그리고 이 수치는 에니메이션과 극영화를 통틀어 일본 역대 영화 흥행 수입 3위에 해당한다.(물론 역대 흥행 수입 1, 2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다. 먼저 1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으로 무려 304억엔을 벌어들였다. 그리고 2위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으로 196억 엔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반면 하야오의 아들 고로가 만든 <게드전기>는 총 76억 5천만 엔 정도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이 수치는 개봉당해 일본 영화들 중 수입 1위이며, 지브리 자체만 따지고도 역대 흥행 4위에 해당하는 준수한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게드전기>를 그리 후하게 평할 수 없게 된다. 수치상으로 분명 <게드전기>는 나름대로 선전하기는 했지만 작품 자체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게드전기>에 대한 혹평은 한국 내에서의 흥행실패로 과장된 것이 아님이 증명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의 흥행 성공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한국과 일본 관객들의 취향이 각기 달라서 생겨난 일인가?

거기에는 설명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뗄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미야자키의 작품을 위한 지브리였고, 따라서 미야자키 없는 지브리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미야자키도 인간인지라 이미 60을 넘어선 고령의 감독에게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미야자키 자신도 <모노노께 히메>를 마지막 작품으로 은퇴를 하겠다는 호언까지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이후에도 미야자키의 작품활동은 계속 이어지긴 했지만, 미야자키 이후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지브리로서는 새로운 대표감독을 발굴하거나, 혹은 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 속에 거장의 아들이야 말로 지브리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대타였을 것이다. 잘만 포장하면, 그리고 조심스레 가꾸어간다면 미야자키가의 맥을 잇고, 아울러 지브리의 명예와 사업도 유지할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 바로 아들 미야자키였을 것이다. 이런 구도 아래 지브리는 그동안 일본 역대흥행 1-3위를 독식하면서 얻어놓은 자본력을 적절히 활용하게 된다. 지브리는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위해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홍보와 판촉에 나서게 되고, 결국 이러한 지브리의 물량공세는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게 된다. 가뜩이나 아버지 미야자키의 활약으로 인해 어느 정도 고정팬이 형성된 환경에다가,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이미 이름이 높은 원작을 무기로 <게드 전기>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를 멀찌감치 떼어놓게 된다. 하지만 개봉당시 평단은 <게드전기>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게 훨씬 우호적이었다. 여하튼 그러한 대규모 물량공세를 통해 어느 정도의 성적표는 받아들었지만 그것은 단지 일본 내로 국한될 뿐.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만 했다.

일본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떠나서는 힘을 쓰지 못한 <게드전기>, 그리고 일본에서조차 그런 물량공세에도 이전의 지브리 흥행작들의 결과에 훨씬 못미치는 초라한 성적. 이 정도면 10년간의 격차를 놓고 개봉된 이 두 영화의 성패여부는 어느 정도 판가름 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화적 이미지로 포장되어있고, 그리고 그것이 영화를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었는데도 서로 다른 평가와 반응을 가지게 된 연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신화의 이미지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적절한 구현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모노노께>의 경우 거대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미야자키는 이들에게 신의 이름을 부여하며 인간과 동물이 소통 가능했던 미분화된 신화적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들 신이라 불리는 동물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 옆에 있었던 자연을 지키는 수호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는 이들은 바로 인간이다. 철 제조 기술을 몸에 익힌 인간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인공적 세계를 조성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보이고 있다. 이들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관이 영화 내내 충돌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긴장과 갈등을 통해 영화는 태초와 현실의 기묘한 동거를 긴박한 드라마로 그려내고 있다. 즉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시간의 무게를 잠시 잊고, 아울러 지금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일종의 시간 멈춤 현상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갱생을 통해 생활세계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영화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게드전기의 경우, 보장된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지만은 감독의 신화 이미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제대로 된 이미지 전달에 실패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너무도 많은 욕심을 지녔던 탓일까. 고로 감독은 반복적으로 지루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길게 늘임으로써 원작의 의미가 각색을 통해 퇴색되지 않도록 적잖은 신경을 쓰고 있긴 했지만, 결국 이와 같은 그의 작업은 오히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간의 지루함을 더 실감하도록 방기해 버렸다. 신화를 통해 시간을 잊고, 잠시 생명력 넘치는 원초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관객들에게 영화는 다시 지루함과 무료함이라는 시간의 공포를 느끼게 하고 만 것이다. 이런 연유로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흥행을 위한 가속페달을 밟았음에도 그 결과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신화를 소재로 삼아도 콘텐츠들은 서로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게 된다.

단지 신화적 외형을 입었다고 모두 신화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으며 바로 그것을 제대로 전해 줄 때에만 신화는 신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맨 처음과 지금.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시간의 무게를 잊도록 하는 것. 지루함과 심심함이 기억나지 않으며 신화에 참여하는 내내 차고 넘치는 생명력을 제공받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자리에 앉아 3자의 시선으로 지켜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의 현장에 동참케 하는 것. 그것이 본디 신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원초의 이미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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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주의라는 오래된 망령 - 종교를 보는 다르나 같은 눈 몇 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98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선이 있기 전 96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의 국가대표팀은 이란에게 2:6라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그때 국가...
    Date2007.11.01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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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좋은 종교, 그리고 나쁜 종교..

    KTX를 타고 있었습니다. 동대구역에서 서너명의 장년들이 열차에 올랐습니다. 이분들 붉은색 조끼와 머리에 두른 띠가 상경 시위를 하기 위한 차림새로 보입니다. 아침 기차였기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 깊고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한참을 지났을까? ...
    Date2007.08.01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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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레-믿음-체험’의 신학자 탁사 최 병헌

    ‘겨레-믿음-체험’의 신학자 탁사 최 병헌 이 길용 0. 여는 글: 한국 신학, 혹은 한국적 신학?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1858-1927)은 21세기 한국교회에 주어진 커다란 숙제이다. 왜 그런가? 그가 이 땅에 의미 있는 신학자로 활동한지가 벌써 한 세기가 넘...
    Date2007.04.28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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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본주의와 종교

    근본주의와 종교 0. 여는 글 오늘 제가 맡은 강연은 위에 적힌 그대로 ‘근본주의와 종교’입니다. 이미 제목에서 풍기는 바와 같이 이 주제는 상당히 넓고 또한 방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난감한 주제를 접하고 어떻게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이유 넘치는 고민...
    Date2007.04.28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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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세구원, 현세구원?

    근자에 일본의 천재적 종교학자로 알려진 시마조노 스스무의 책 하나를 읽어보았다. 현대일본의 종교현황, 특히 신종교들의 발흥을 중심으로 그들이 가지는 종교사적 의의를 개념적으로 정리, 설명한 책이었다. 한국어로는 [현대 일본 종교문화의 이해]로 번...
    Date2006.12.09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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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신론과 범재신론

    의외로 이 부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몇몇 신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이 개념들에 대하여 뒤죽박죽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만나게 된다. 그리스어를 알고 있다면 이 용어들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범신론 Pantheism 범재신론 Pan...
    Date2006.10.01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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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종교학자의 책들

    한국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종교학 관련 서적들을 읽어본다. 뭐 많지도 않지만.. 대부분 그 책들의 저술관점이 상당히 전지적 작가적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긴다. 의외로 한국에 전문적인 종교학자들은 많아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종교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Date2006.09.1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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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화와 생명 살림

    현대문화와 생명 살림 求願諒 ‘현대문화’와 ‘생명’ 이 강연을 이끌어갈 두 용어입니다. 이 용어들은 이른바 ‘거대한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이들 용어는 세밀하고 치밀한 생각의 그물에 잡히기보다는 자칫 허공에 뿌려지는 의미가 반감된 엉성한 ‘설교’가 될 ...
    Date2006.08.1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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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행해지는 종교문화에 대한 연구 모습들

    긴 비가 그치더니 해가 힘을 얻은 것 같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햇볕의 무게가 녹녹치가 않다. 하루 종일 거진 벗은 몸으로 막 유치원 방학을 맞은 막내와 실갱이를 하고 있다. 뭐 서로 덥다보니.. 실갱이도 지치고 그냥 선풍기, 때론 에어콘 바람에 온 몸과 맘...
    Date2006.07.31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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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대 종교는?

    얼마전 통계총에서 인구 센서스 조사 결과 발표가 있은 직후.. 각 종단에서는 다양한 표정이 왔다갔다 한다. 그 중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개신교.. 지금까지 1300여만명 운운하며 한국내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종교세를 과시하다가 이번 조사 결과 정작 ...
    Date2006.06.07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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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리 걸음하는 한국신학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지 신교는 120년 구교는 250년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여타에 알릴만한 신학자가 신학이 이땅에서 형성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나마 서남동, 안병무 박사 등의 민중신학이 한국적 신학의 한 모습으로 서구에 ...
    Date2006.03.25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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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과 교리가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간혹 대화의 패러다임이 서로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묵이 더 좋은 대화가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의 글에 과학적 검증의 칼을 들이밀 수는 없겠죠. 분명 시인은 "나팔 꽃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
    Date2006.02.2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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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 하느님

    작금 한국 개신교에서는 유일신에 대한 호칭으로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태여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유일신에 대한 강조'라는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기존의 한국적인 지고신 명칭은 천공신(sky-god) 혹은 일반신...
    Date2006.02.0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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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모론은 또 다른 모습의 신앙

    지극히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종교들은 기승을 부린다. 세속화된 사회에 세속화된 지식과 정보로 무장했다 자임하는 현대 세속적 지식인들 역시 이 점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종교, 혹 신앙은 기존의 신앙이나 종교시스템...
    Date2006.01.05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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