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07.11.18 23:34

무신론자들의 십자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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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들의 십자군운동
- Der Kreuzzug der Gottlosen -

<Spiegel> 2007년 5월 22일 타이틀 기사

새로운 세대의 회의론자들과 학자들이 신앙인들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의 무기는 다윈주의와 인터넷 그리고 고위직의 성직자들과 이슬람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성실한 신앙인인 채 하는 정치가들과 교회의 간섭 때문에 계속 커져만 가는 대중의 ‘불쾌감’이다.


이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교황은 꼭대기가 뾰족하고 둥근형태의 모양을 가진 창문과 조각으로 장식된 모래기둥, 그리고 떡갈나무로 된 정문이 딸린 빅토리아풍의 집에 살고 있다. 그 집은 어찌 보면 교회를 생각나게도 한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오시죠."

리차드 도킨스는 물라(이슬람 성직자의 호칭)와 사제복을 입고 남에게 훈계만 하려는 이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마다않는 각 종파의 전사들로부터 세계를 구원키 위해 행동을 개시한 모든 이들의 스승 뻘 되는 사상가이다. 옥스퍼드 출신의 66세 먹은 이 진화생물학자는 영국의 <Prospect>와 미국의 <Foreign Policy>라는 잡지의 독자들로부터 세계를 이끄는 3명의 지성인들 중의 하나로 선택되기도 했다.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대단히 유명한 진화론에 대한 저술을 내놓은 바 있다. 게다가 최근에 출판된 그의 책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은 미국과 영국에서 30주 이상이나 베스트셀러 목록에 머물러 있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책은 9월에는 독일에서도 출판될 예정이다. 그리고 독일 인문주의자 협회의 홍보실은 “성서보다 더 많이 팔릴 것” 기대하는 자료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 책은 뜨거운 열정과 더불어 뛰어난 문장력으로 쓰였고, 전문도서 목록에서는 교황 라칭어와 피터 하네의 책들 바로 다음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대략 최근 20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매우 경박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라고 리차드 도킨스는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이전에 신앙인들은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고위직의 성직자들은 존경을 받았고 윤리위원회의 멤버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하여 넌더리를 치게 된 것은 최근의 새로운 현상입니다. 물론 이슬람 세력이 강해진 탓도 있겠지만, 결국 새로운 무신론적 사고를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무신론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모토 아래 뭉쳤다.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좋은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자유사상가, 성직자 비판자들 그리고 회의주의자들은 ‘종교로의 복귀’를 막으려는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그들의 무기는 ‘과학’과 ‘이성’이며, 또 하나 포이에르바흐와 볼테르의 시대와는 달리 모든 지식과 망상의 창고이기도 한 ‘인터넷’이다. 이들의 등장은 오래전부터 신에 대한 문제는 저절로 폐기 처분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왔던 이들의 커밍아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은 사회가 어떻게 무신론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아울러 정치와 칵테일파티 장에서 종교와 믿음이 어떤 식으로 반복된 화제가 되고 있는지도 눈치 챘다.

그것은 ‘불편함’이다. 바티칸이 모하메드 풍자에 대하여 무언가 발언한다 치면,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이 설교를 통해 사회와 교회를 향하여 순리에 어긋난다고 질책한다면, 혹은 이란의 대통령이 UN 대회의 중에 자신의 핵계획에 대한 연설을 할 때 ‘숨겨진 이맘의 빛’을 경험하길 원한다고 한다면 느낄 수 있는 그것 말이다.

아마도 신이 계몽주의와의 전쟁에서 승자로 남아있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공황상태 그 자체일 것이다.

도킨스는 지하철 안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그저 그런 깔끔한 용모의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한 사람의 신사일 뿐이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의 거실은 모형 회전목마와 책들, 작은 크기의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상당한 크기의 평면TV가 놓여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짖어대는 머리털을 예쁘게 치장한 작은 애완견 하나가 있었다. 쉴 새 없이 짖어대는 이 녀석의 태도는 푸들 속에서 악마라도 발견한양 자신의 집 거실에서 가톨릭 신자의 냄새를 맡아서 저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리차드 도킨스의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마치 선교사역과도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킨스를 싫어했고, 심지어 경멸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며 몇몇 글에서는 쌍수를 들어 그의 뜻에 동의를 표하기까지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글들 말이다. “구약에서 언급되는 신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매우 불쾌한 캐릭터일 따름이다. 질투하고 공의롭지 못하여, 인종주의적이고 동성연애자들을 증오하고 아이들을 죽이기까지 하며, 또한 질 낮은 협잡꾼이며, 과대 망상자에다가 인종 청소부일 뿐이다. 난 이 점을 밝히기 위해 내 강연을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한다.”

도킨스는 모두에게 하나의 대답이 있다는 사실을 즐기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도킨스 교수에게 당신은 진짜 무신론자이냐고 물어온다면, 영국 국교인 성공회 교육을 받은 그는 보통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제우스, 아폴로, 라, 보탄, 황금 송아지 혹은 날아가는 스파게티 괴물에 관한 것이라면 당신 역시 무신론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목록에 하나의 신을 더 넣고 싶습니다.” 도킨스가 거리에서 옥스퍼드의 교회 출석자들을 만나게 된다면 피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도킨스 교수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신을 몰아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 어쨌든 미국 시민의 44퍼센트는 향후 50년 안에 예수가 다시 와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매우 좋은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바로 인터넷에서 엄청난 규모의 회의주의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최근 얼마 동안 종교의 부흥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현상은 이제 끝나가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지금 많은 사람들이 드디어 그들이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던 바로 그것을 공표한다는 것에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무신론 지지자들은 저 옛날 원시 그리스도교의 구성원들이 그랬듯이 새 시대의 카타콤으로, 즉 www.infidels.org 혹은 www.religionsbullshit.net이라는 이름의 웹사이트들로 모여들고 있다. 이런 유의 홈페이지만 수백 개에 달한다. 그들은 ‘깨우친 자들’이라 불린다.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을 지니게 된 인격,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일컬어 ‘깨달음’이라 하지요. 우리 깨달은 사람들은 신령, 요정, 부활절 토끼, 그리고 더 나아 신이란 존재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선포하고 있다. “깨우쳤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뻐기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하며 도킨스는 말을 이어갔다. “무신론자라는 말은 특히 미국에서는 매우 안 좋은 것으로 들립니다. 마치 ‘동성애’같은 말처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좀 다른 단어를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게이’같이 정착에 성공한 단어 같은 것 말이죠.” 그동안 많은 대도시들에서 깨달은 이들, 즉 스스로 무신론을 깨달은 익명그룹의 월례모임이 생겨났다. 그들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논리적이지 않다. 종교는 쓸 데가 없다. 게다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종교는 위험하다. 종교는 더 이상 잘못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나쁜 것이다. 곧 과학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신과 우상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새로운 무신론의 특징은 그들의 자세가 선교적이라는 데 있다. 신앙에 여유롭게 관용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계몽의 성공을 기획하는 모든 이들은 저마다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야만 한다. 도킨스와 그의 동료 투쟁가들에게 그것은 바로 교황 요셉 라칭어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다(더 이상 교황은 무조건적인 존경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유약한 상대주의에 곧바로 직면해 있다. 이제 문제는 진리에 관한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섹스에 대한 낌새를 알아채는 청교도들과도 같이 도킨스는 모든 해악 뒤에서 유신론 신앙을 찾아내고 있다. 그 신은 모든 골치 아픈 문제의 창조주이다. 도킨스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종교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폭탄 자살범도, 911테러도, 십자군 전쟁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도, 보스니아의 대량 학살도, ‘그리스도의 살해자’인 유대인에 대한 박해도, 북아일랜드의 ‘분쟁’도, 멋지게 머리를 정돈하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입고 순진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가는 TV 설교가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탈레반도 없고, 강요된 구속도 없으며 베를린 골고다의 명예살인도 없는 세상? 그리고 자신의 폭탄부대를 출발시키기 전에 꼭 2천 년 전에 고문 속에 죽어간 한 지역의 설교가를 언급하는 미국의 대통령도 없는 세상? 아마도 그것은 지상의 낙원일 것이다.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도킨스씨?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악이라고 하는 것이 에로스와 섹스 때문이라고 충분히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도킨스는 웃지 않았다. “물론 저는 매우 진지합니다.” 도킨스가 말했다. “물론 신학적 차이 때문에 북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가 서로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살인극을 만드는 것은 ‘복수심’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복수심, 그것은 그들의 종교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위적인 분리는 종교의 종파들을 통해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해한 경건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 영혼의 위로를 받는 경우와 또 그러한 전통이 존재하는데 이는 어찌 설명할 것인가?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하늘의 황금빛 햄스터가 내려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믿음은 또 무엇인가? 러시아풍의 성모상은 무엇이고, 시칠리아 섬에서 해마다 진행되는 그리스도 수난절 행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도킨스는 오랜 시간을 숙고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이로부터 젖꼭지를 빼앗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아이들의 행동일 뿐이지요.”

옥스퍼드에 있는 첨탑 아치형의 도킨스 저택을 방문했던 사람은 누군가가 무엇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을 갖게 된다. 왜 그는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일까? 계몽주의가 이와 같은 계몽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을 만들어냈을 지도 모른다. 흥분과 분노로 무장한 채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그리고 아부성 찬미 냄새가 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전쟁터에 나섰다. 이런 이들의 태도는 꾸르안을 배우는 신학생들,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들 혹은 오이겐 드레버만(Eugen Drewermann)의 태도와 꼭 닮아있다. 갑자기 사람들은 다시금 18세기 반성직자 전선의 지휘자들이었던 볼테르, 드니 디드로, 그리고 자코뱅 당원의 청년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테러공격을 당한 국가들의 흥분이 저처럼 거센 것은 우연히 아니다. 영국과 미국,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무신론자들은 세계를 성전(지하드)의 무대로 만드는 것에 대항하는 문화투사로서 스스로를 자임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독일같이 종교적으로 온건한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이러한 종교논쟁은 큰 탈 없이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속한 곳은 피터 하네와 에바 헤르만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무신론자들의 십자군 운동에서 대사제는 자연과학자들과 작가, 그리고 철학자들이다. 요즈음 미국의 토크쇼에 자주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같은 이가 바로 그들이다. 전에 영국에 있을 때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활동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글은 신보주의자들에 의해 찬미되고 있다. 히친스는 앵글로색슨족의 엔젠베르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독설이 뛰어나고, 참을성이 없으며 또한 영리한 사람이다. 그가 쓴 최근의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그와는 달리 “종교는 모든 것을 독살한다!”라는 말도 있다. 종교는 과학의 원수이다. 그리고 “대부분 거짓과 공포”의 원인이 되며, 대규모 시민학살, 노예제도, 인종주의와 성적 불평등의 공범자이기도 하다. 독일의 동쪽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말들이 일반 상식에 속한다. 물론 미국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폭발물과도 같기 때문이다. 특히 히친스는 “자유주의를 환멸 하는” 이는 아니다. 그는 지금 역시 이라크 전쟁을 옹호하기도 하다.

프랑스 무신론을 대표하는 예언자로 우리는 미셸 옹프레이(Michel Onfray)를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32권의 책을 저술한 48세의 그는 유명한 쾌락주의의 옹호자이기도 하다. 옹프레이는 ‘신학적 사기’에 항거하는 ‘마지막 싸움’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의 책 <우리에게 신은 필요 없다!>는 프랑스 독자들의 탐독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프랑스인들은 그 책으로 인해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는 새로운 종교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옹프레이는 깡(Caen)에서 있었던 한 강연을 마친 후에 짤막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그에게 그런 일은 그리 먼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의 옷은 완전히 검은색으로 갖춰져 있었고 공손한 그의 추종자들로 꽉 찬 강당 앞에 서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커밍아웃한 무신론자이자 여성해방운동가인 아얀 허시 알리(Ayaan Hirsi Ali)가 이슬람 내부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을 희망하는 서구인들의 맹목성에 대하여 강하게 질타하였다. “사람들은 이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녀는 단호히 선언하였다. 지금 그녀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학자 피에르지오르지오 오디프레디가(Piergiorgio Odifreddi) “왜 우리는 크리스챤이 될 수 없는가?”라는 글로 칭송을 받고 있다. 이미 그는 라틴어로 된 축복기도로 가지고 있다. “Benedicat vos omnipotens Logos. Pater Pythagoras, Filius Archimedes, et Spiritus Sanctus Newtonius.”(전능하신 로고스께서 성부 피타고라스와 성자 아르키메데스 그리고 거룩한 영이신 뉴턴의 이름으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이들 모두 2001년 911테러의 쇼크를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다.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공격이 없었다면 새로운 무신론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테러가 있은 바로 그 다음 날 2001년 9월 12일에 샘 해리스(Sam Harris)는 한권의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많은 미국의 시민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미국에는 너무 많은 동성애자들과 여성해방론자들 그리고 시민운동가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래서 신이 이러한 죄악의 구렁텅이를 이번 공격으로 벌주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이다. 금년 5월 타계한 제리 폴웰(Jerry Falwell)을 위시한 많은 TV 부흥사들이 그렇게 설교했다.

당시 34세의 신경과학을 전공하는 스탠포드 대학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해리스는 문제는 신의 분노가 아니라, 바로 신 그 자체라고 의심하였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성모마리아를 울부짖으며 고층빌딩에서 떨어지는 교양인들도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대학 동료들 중 12퍼센트 정도가 만물은 자연적으로 진행되어 간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적 설계자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해리스의 생각은 이랬다. “생명과 지구의 나이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이 생겨난 지 족히 1세기 정도 지난 후에도 우리 이웃들 중 반 이상이 전 우주가 6천 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건 이미 수메르 사람들이 접착제를 만들어낸 뒤 천년이 지난 시기인데도 말이다.”

샘 해리스에게 있어서 지적 설계자를 반성 없이 믿는 사람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그는 노아의 방주에 공룡과 흰개미 그리고 푸른 고래가 쌍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이들에 의해 국회의원과 미국의 대통령이 선출된다는 것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책 <믿음의 종말>은 27만부나 팔려나갔다. 그 숫자는 ‘미국 무신론자’ 모임에 가입한 2500명의 회원들 숫자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샘 해리스에게 그것은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리스의 두 번째 책인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는 2006년도 9월에 출판되었다. 그 사이 샘 해리스는 무신론자들의 피터 하네가 되어 있었다. 해리스는 자신의 첫 번째 책을 아랍어로 번역 출판하는 것에 대해서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해리스의 답변에 잘 나타난다. “저는 그 일은 번역자에게는 사형선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메시지는 다음 십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I. 절대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개연성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반증할 책임은 우리가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있다.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은 기적이 아니라 아직 탐구가 충분치 않다는 증거일 뿐이다. 더 이상 전쟁이나 어린 아이의 죽음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매일 매일 수많은 기도가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매일 매일의 부조리에 대하여 진행되지만 전혀 바뀌는 것이 없다.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신의 존재도 반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화성의 궤도 안에 있는 일각수, 늑대인간 혹은 차 주전자와 똑 같은 것이다. 무신론은 신앙인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건강을 다시 찾기 위한 것이다.

II. 절대 어떠한 자화상도 만들지 말며 또한 그것을 신이라 부르지도 말라.
신이야 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반대는 없다! 종교 역시 섹스나 감기처럼 널리 퍼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환각적인 종교 경험들은 저쪽 세계와 관계하기 보다는 인간 두뇌의 장애와 더 많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하고 혹은 사랑하는 것과도 같은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뇌가 때때로 비합리적 요소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는 속도를 떨어뜨리는 자동 장애 장치와도 같은 것이다. “죽음 다음에는 생명이 있다”라는 식의 많은 가설들은 바이러스와도 같다. 그것들은 널리 퍼져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뿌리 뽑을 수가 없다. 다만 주의할 뿐이다. 보호할만한 신앙인들과의 접촉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III. 결코 그 어떤 신이라도 곁에 두어서는 안 된다.
신앙인들과 함께하는 우호적인 공존의 시대는 지나갔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신앙을 이해하려는 불가지론자들이 아니다.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를 정죄한 파트와(Fatwa) 이래, 현대 사회에 저항하는 새로운 지하드를 선포한 이래 종교의 다원성이란 끝장났다. “지금 나는 ‘좋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숨겨진 시아파 이맘에 대하여 꿈꾸고, 나는 계속 토마스 페인과 조지 오웰을 공부할 것이라고, 그리고 세계는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충분히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실 된 신앙인은 이 모든 세상을 굴복시키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히친스)

IV. 그 어떤 창조주도 없다!
다윈의 이론은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생겨났다는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그것은 뒝벌처럼 있지도 않는 것을 생각해내기 위하여 ‘지적 설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수백 년 동안의 선택과 돌연변이만이 필요할 뿐이다. 거기에 덧붙여, 도대체 그렇다면 창조자는 누가 창조했는가? 없음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 기회는 1대 1030072234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났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여기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V. 아이들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크리스천이거나 무슬림, 그리고 유대인이나 오쇼 라즈니스(Osho Rajneesh)의 제자인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은 태어난 이후에 벌어진 것들이다. 종교적으로 매우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난 운이 없는 사람은 그의 인생 동안 순교자의 죽음이 아름답다고 믿는, 그리고 펜실베이니아의 아미시(Amish)나 혹은 고해성사에 심리적으로 속박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과학에 의해 지지받는 종교계몽 수업 제공을 아이들의 권리로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체벌, 학대, 그리고 예수회 학교에서 어린아이의 영혼에 가하게 되는 손상 사이에 그 어떤 본질적인 차이도 보지 않는다.

VI. 신 없이도 착하게 살아라.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믿음이 없어도 윤리는 있는 것이다. “만약 짧고 고단한 인생의 일들을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우리는 사람들이 더 좋게 그리고 더 나쁘지 않게 서로서로 관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히친스)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은 대량학살, 화형에 쓰기 위한 장작더미, 그리고 정신적 성적 결함에 대한 적당한 책임을 갖는다. 문화와 시대 저편에 모두에게 통용되는 규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쓰디 쓴 경험들과 그것으로 인해 생겨난 가르침들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이야 말로 창조주이고, 규범의 주인이다.                  

VII. 과학 옆에 그 어떤 신들도 두어서는 안 된다.
과학과 신앙은 불과 물 같다. 둘 사이에는 공유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명목상의 신앙인인 저명한 과학자라는 것은 자기기만이며 아울러 개념의 혼란이다. 만약 ‘신’이라는 말을 저처럼 멋지고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우주의 법칙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중력의 법칙에 대고 기도하지는 않는 법이다.

VIII. 죄책감 없이 이웃을 사랑하라!
모든 유일신 종교들은 여성을 남성 밑에, 육체를 금욕적인 이상에로, 욕망을 위선 아래에 종속시킨다. 만약 이집트, 파키스탄, 모로코의 젊은 무슬림들이 섹스, 마약 그리고 록큰롤같이 긴장을 풀게 하는 행동양식들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세계는 지금처럼 심한 반테러법을 갖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IX. 당신은 안식일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
종교를 위한 특별법을 허용할 이유가 없다. 종교적 감정이란 심미적, 정치적 혹은 도덕적 감정보다 더 보호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무자비하고 몽매한 것들은 우려할만한 것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종교라 딱지 붙어있는 것들이 잘 구비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종교로서 그리스도교 역시 이슬람이나 유대교보다 나을 것이 없다. “우리가 이러한 원리를 받아들이는 한, 종교는 존경받을 만한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과 자살테러범들의 믿음에 대한 그 어떠한 존경심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도킨스)

X. 창조자 앞에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
또한 믿음이 없다면 모든 아름다움과 진리 그리고 선에 대하여 겸허함을 느끼게 된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보는데 쉴러나 엘리어트 혹은I아이 엠 페이와(I. M. Pei)도 같이 신앙심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섹스피어 역시 그의 관객이 교회였었다면 ‘햄릿’같은 작품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베토벤과 바흐 역시 신의 존재를 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들의 작품은 단지 베토벤과 바흐의 실존했음에 대한 증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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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두교 그리고 불교..

    결국 불교란 힌두교의 세속화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신적 존재를 빌어 인생의 문제를 해결코자 했던 힌두교에 비해 불교는 철저히 이성을 도구로한 지적 탐구를 통하여 그 문제를 탈신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계이해를 상식화한 불교는 힌두교의 전통(...
    Date2005.11.11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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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교?

    언젠가 개신교 신학을 하는 한 친구로 부터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국에는 기독교, 예수교 외에 종파가 하나 더 있어?" "야 그리스도교 종파로 따지면,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도 모두 포함시켜야지~" "아 그런 거 말고 또 하나 있다니까? 모르긴 해...
    Date2005.11.07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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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유(韓愈, 768~824)가 신유학자?

    어느 학회에서 한 기독교 신학자를 만났다. 그는 한 논문 발표장에서 질문을 던지면서 한유가 신유학자라는 발언을 해 버렸다. 당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이야기하면서, 리치가 한유의 불교비판을 수용해서 그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
    Date2005.11.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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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당,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논평

    * 아래 글은 10월 21일에 있는 한국문화신학회의 논문발표 시 논찬을 맡아서 작성한 글입니다. 각주까지 달려있는 정교한 글은 pdf파일을 참조하세요 * “천당,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논평 논찬자: 이 길용 박사(종교학) 1. 좀 더 명확한 비교 대...
    Date2005.10.17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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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 운동과 한국 개신교의 성장

    7-80년 한국 개신교회는 비교의 대상을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한반도에서 급성장세를 기록하였다. 물론 이것을 간략하이 "신의 은총"이라 귀결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사는 맛이 그렇게 단촐하게 정리될 수 있겠는가? 좀더 고민이 많고, 잡다한 분석을 요하는 ...
    Date2005.10.11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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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문화도 종교도 관성의 축적일 뿐..

    사람들은 말한다. 문화는, 사상은, 종교는 귀중한 것이며, 소중한 것이며, 놀라운 것이며, 고귀한 것이며, 지고의 것이며, 놀라운 사유의 결산이며,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라고.. 그러나 나는 말한다. 문화는, 사상은, 종교는.. 때론 그것이 진리라 여겨지는 ...
    Date2005.09.24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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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또 유교인가?

    왜 또 유교인가? 이 길용(종교학) 1. 雜言 외국에 나와서 놀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가방끈 길이에 목숨을 걸고 있는 먹물계에서 느낀 점 한가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그것은 대부분이 한국국적을 지니고있는 이들은 외국에서는 한결같이 한국...
    Date2005.07.23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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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민족주의..

    한때는 종교가 스스로의 포장을 위하여 민족주의를 옷입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그 생각이 역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광기를 선사해주는 종교 위의 종교는 '민족주의' 같아 보입니다. 그 징그러운 광기는 거진 저...
    Date2005.06.14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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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致良知’와 ‘守心正氣’에 대한 종교학적 이해

    ‘致良知’와 ‘守心正氣’에 대한 종교학적 이해 이 길 용 1. 여는 글: 종교학적 연구주제로서의 신비체험 근대적 종교연구는 영국의 진화론적 인류학자인 테일러(Edward Burnett Taylor, 1832-1917)와 마레트(Robert Ranulph Marett, 1866-1943)의 연구에 많은 ...
    Date2005.03.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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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Religion)

    종 교 (Religion) 우리는 지금 종교라 하면 특정한 교리와 신앙체계, 그리고 의례들을 갖춘 폐쇄적인 공동체를 생각한다. 따라서 종교 혹은 종교들은 이 세상에 다양하게 존재해 왔고, 또 현존하고 있다고 여긴다. 또한 그러한 ‘종교들’(과연 ‘종교’란 말이 복...
    Date2005.02.28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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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um Charakter des Neo-Konfuzianismus

    Charakter des Neo-Konfuzianismus a. Philosophie für die Beamten: man kann durch Lernen zum „shengren“ werden In der chinesischen Geschichte kann der Neo-Konfuzianismus als Philosophie oder Sozialethik der Beamten betrachtet werde...
    Date2004.09.1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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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서 바라 본 동학

    기독교에서 바라 본 동학 - 기독교계의 동학연구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대안 모색을 위한 시론 이 길용 (종교학) 1. 여는 글 이 논문은 1960년대 이후 기독교내에서 이루어진 동학관련 연구들에 대한 비판적인 추적을 주목적으로 한다. 논문에서 주목되고 있는...
    Date2004.03.2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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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시작하면서... 오늘 이렇게 예배의식 중에 행하는 만찬례가 아닌 예수의 만찬을 하는 이유는, 설익은 우리의 반복적인 그리고 습관적인 성찬 참여가 오히려 성찬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지는 않는가 란 노파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을 통하여,...
    Date2002.07.1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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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학의 한계와 모순

    역사를 보는 여러개의 눈들... 주자학의 한계와 모순 * 이 글은 한 고등학생이 제게 메일로 보낸 질문에 대한 답변내용입니다. 혹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의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올려 봅니다. 질문] 질문 있습니다... 주자학의 한계라던지..모...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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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경전을 읽는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경전들... 경전(經典, canon)! 어쩌면 우리는 이 이름을 무겁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위엄 있는 책장에 속한 서물(書物)들 중에서도 가장 버겁고, 혹은 가장 훌륭한 치장 속에 출중한 권위를 만끽하고 있는 금박의 책들을 생각할...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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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간 대화에 대한 '남' 생각

    * 이글은 서강 종교연구회 주제토론방에 실은 글이다.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 최초로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으로서의 최소한 책임감때문에 쓴 글이었다. 아래 호영이의 글도 있고 해서 여기에 다시 한번 옮겨본다 * 독일의 이길용입니다. 웬만하면 이곳에 글을 ...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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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知訥의 眞心直說

    知訥의 眞心直說 1. 이끄는 글 지눌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황해도 서흥(瑞興)줄신이다. 지눌이 활동하던 당시 고려는 안팎으로 큰 시련기에 처해있었다. 몽고의 강력한 무력적인 위협은 고려를 완전한 자립국으로 존립하는 데 큰 어...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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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는 주희의 무거움

    참을 수 없는 주희의 무거움 0. 또 주접 오늘 나는 朱熹 朱熹(1130-1200)는 南宋代 유학자이다. 우리에겐 朱子라 익히 알려온 인물이 바로 그 이다. 여기 나의 논의 속에서는 김용옥-최영애 시스템에 의하여 주시라는 중국식 발음표기를 사용하겠다. 따라서 이...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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