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2012 추천 수 10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겨레-믿음-체험’의 신학자 탁사 최 병헌

이 길용


0. 여는 글: 한국 신학, 혹은 한국적 신학?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1858-1927)은 21세기 한국교회에 주어진 커다란 숙제이다. 왜 그런가? 그가 이 땅에 의미 있는 신학자로 활동한지가 벌써 한 세기가 넘어서는데 지금에까지 그의 자리와 가치가 인정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의 신학적 문제의식이 철저했고, 또 근본적이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이러한 탁사의 문제의식과 신학적 결과물을 일컬어 ‘한국 신학’ 혹은 ‘한국적 신학’이라 부른다. 게다가 탁사는 그 앞에 ‘최초’라는 수식어까지 가지고 있다. 탁사가 기독교인의 삶을 능동적으로 펼치게 된 것은 1893년 세례 이후로 볼 수 있다. 한국에 개신교가 발을 붙인 것을 1885년으로 잡는다면 8년 만의 일이며, 정동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하는 1902년을 기준으로 해도 10년을 채우지 못하는 시점이다. 따라서 탁사에게 주어지는 ‘최초’라는 수식어는 그 시기로만 따져도 당연한 것이고, 또 마땅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그 수식어의 내용이 ‘한국적’이라는 것을 접하고 나면 적잖은 고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고민의 고갱이에는 ‘한국적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신학 작업을 우리는 한국적 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적 신학이란 ‘공간적 제한’을 의미한단 말인가? 따라서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한국 내에 머물면서 신학 작업을 한다면, 그 결과물은 한국적 신학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인가? 이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그건 한국적 신학이라기보다는 ‘한국 내 신학’이라 부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혈연으로? 즉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신학 작업을 한국적 신학이라 불러도 무방한 것인가? 이와 같은 구분은 예술과 스포츠 영역에서 종종 이루어지고 있긴 하다. 종목과 국적을 묻지 않고 그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예술, 혹은 운동을 한국적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골몰히 이 관계를 살핀다면, 예체능계에서 이루어지는 한국적이라는 호칭은 한국인이라는 국적, 혹은 민족개념에 기초하고 있지, 그가 하고 있는 예술이나 운동 분야의 업적이나 결과물까지 포함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곧 눈치 챌 수 있게 된다. 즉 그것은 한국인이 보여주는 예술세계이지,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이 곧바로 한국 예술로, 혹은 한국적 예술로 평가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예체능의 경우 개인의 능력이 강조된다는 특성이 있긴 하다. 아무튼 우리의 고민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한 분야에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달기 위해서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사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는 ‘한국적 신학’이라는 용어자체가 ‘보편’과 ‘특수’를 동시에 안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운명적인 것이기도 하다. 신학은 보편성을 가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핵심, 그리고 그 전통을 체계적으로 정리, 설명한다는 점에서 신학에 국경이란 있을 수 없다. 한국, 유럽 혹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신학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 추구와 그것을 해명함에 있어서는 다 같이 동일한 목적을 지닐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신학이란 말 앞에 붙어있는 ‘한국적’이란 수식어는 보편을 추구 한다 라기 보다는 특정하고도 특수한 상황을 일컫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보편과 특수가 함께 모여 있다는 애매한 긴장관계가 한국적 신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을 매우 난처하게 만든다. 보편과 특수의 애매한 결합. 하지만 제 아무리 한국적 신학이라 하더라도 궁극의 목적이 ‘보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단지 ‘장소’와 ‘핏줄’에만 연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그 무엇이 ‘보편 속의 특수’에 대해 눈감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이 무엇일까? 잠정적이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한국’이라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전통적 문화유산’과 해당하는 각 시기에 공유하는 ‘시대정신’이라는 틀로 묶어낼 수는 없을까?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한 해명에서 우리는 한국적 신학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특수상황이 가지는 시대정신, 혹은 문화적 유산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종교 환경’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외래종교이다. 아니 지금 한반도에 살아있는 대부분의 종교가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들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종교들은 이와 같은 다원화된 종교 환경에 어찌 대응하고, 또 어떤 기준을 가질 것인가가 매우 주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낯선 세계관이 다원화된 사회에 진입해 들어오게 되면 진통을 겪게 된다. 그것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때 나오는 어려움이라 할 수 있겠다. 오래되어 느슨해지고, 구석구석 닳고 또 헐거워진 부대로는 넘쳐나는 신선한 포도주의 생명력을 담아내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부대가 요청된다. 문화와 문화, 혹은 세계관과 세계관의 만남에는 이러한 ‘새로운 부대’가 언제나 요청된다. 우리는 그것을 ‘해석학적 만남’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해석 작업, 즉 전통과 새로움의 창조적 융합을 시도하면서도 본디 갖추고 있는 사상의 고갱이를 잃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 한국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신학 하는 이의 맡겨진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탁사는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 세기 전에! 개신교 전통의 전래와 더불어 시작된 탁사의 신앙생활과 신학 작업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이 논문은 탁사의 그러한 작업, 즉 개신교 신앙을 중심삼아 전개된 보편과 특수의 창조적 융합과정을 한국적 신학이라는 틀을 가지고 조망해 볼 것이다.


1. 탁사의 생애

많은 경우 탁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1893년으로 본다. 바로 그 해 탁사는 세례를 통해 정식 개신교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사가 송길섭의 경우도 이런 기준에서 탁사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준비기(1858-1893) / 사회참여시기(1893-1902) / 목회시절(1902-1914) / 교회 행정가 시절(1914-1922) / 신학교 교수 시절(1922-1927)

이러한 시기 구분은 대체로 탁사의 공식 활동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그의 일대기를 줄여 말하는데 무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탁사 자신의 실존상황을 좀 더 고려해 본다면 위의 경우와는 다른 시기 구분도 가능할 것이다. 공식 전환점을 세례의식으로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이미 탁사는 5년간 집중적으로 성서를 연구하였으며, 그리고 이 시기야 말로 유학자 탁사가 기독인이 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작동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입문의 시기를 공식적인 세례의식에서 잡을 것이 아니라 그가 배재학당의 한문교사가 되어 아펜젤러를 위시한 서양의 선교사들과 본격적인 신앙교류를 갖게 된 때로 잡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게 탁사의 생애를 재구성해 본다면 아래의 도표처럼 정리해 볼 수 있다.

1. 1858-1888:  전통적 유교 지식인  
유교 및 전통 종교와 사상 습득기간- 과거 준비, 그리고 실패  
- <瀛環志略>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기초 지식을 얻음(1880)

2. 1888-1902: 개신교 입문시기
배제학당의 한문교사로서 아펜젤러와 본격적으로 교류함
- 성서연구/번역 시작
- 아펜젤러를 통해 기독교 사상 및 웨슬리 신학을 만남
- 민족계몽과 개화를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침

3. 1902-1922: 목회와 교회행정가 시기
정동제일감리교회 담임목사 및 교회 행정가로 활동
-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저술활동
- <성산명경>(1910), <만종일련>(1922)

4. 1923-1927: 신학교 교수시기
협성신학교 교수
- <비교종교>와 <한국문화> 강의

이 글은 탁사의 일대기를 역사학적 시각으로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의 삶에 전기轉機가 되는 몇몇 장면들을 강조하고 도드라지게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탁사는 충북 제천의 가난한 양반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신분은 중세 유럽이나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시기에 있었던 계급제도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사회제도이다. 양반은 태어나면서 얻어지는 신분이 아니다. 그리고 양반을 규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따로 있던 것도 아니다.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관장하는 시험’科擧 합격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그 가문에 전국에 걸쳐 이름이 높은 출중한 유학자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것은 보통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노력을 통하여 양반이 될 수 있다는 말이며, 이런 관계로 조선조 대부분의 보통시민良人들은 더 높은 신분으로 올라서고자 하는 욕구를 상당한 정도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조 사회는 이론과 법률적으로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이 가능한 상당히 개방된 구조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科擧를 준비하였고, 아울러 이 제도는 조선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공공시스템이기도 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양반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백성들은 과거를 준비했고, 이를 통해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념의 틀을 제공해주고 있던 것이 바로 남송南宋 주희朱熹에 의해 체계화된 성리학이었다. 주희가 정리한 새로운 모습의 유학은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보았고, 그 이유를 하늘의 이치에 두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은 천리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주자는 제왕이나 귀족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과 국가를 위한 ‘통치원리’를 세우고자 하였다.

탁사는 양반가문의 자손이었고, 과거를 준비했고, 또 응시까지 했다. 이는 적어도 그가 능동적 기독인으로 활동하기 전까지는 전통적인 유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양부모가 탁사의 입신양명을 위해 서울로 이사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양아버지가 병고로 사망하게 되자 탁사는 기존의 전통적 유교 가치관을 새로이 검토해 볼 수 있는 외부적 조건을 맞이하게 된다. 갑작스레 찾아온 궁핍함으로 인해 생활고를 타개하고자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탁사는 자신이 속한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 가를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조선의 유교이념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야 할 과거제도는 오히려 매관매직의 현장이 되었고, 명예롭게 국가와 백성을 위해 봉사해야 할 공직자들은 자신의 이익과 축재에만 골몰하고 있는 장면이 탁사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사회 환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서서히 탁사로 하여금 전통과의 단절을 가져오게 하였을 것이다. 더 이상 기존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는 부조리한 이 세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곤란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즈음 탁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관과 만나게 된다. 이때 눈길을 끄는 것은 개신교라는 서구 종교 전통과의 만남이다. 하지만 그가 이미 유교적 입신양명 이념을 철저히 따르던 유교지식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가 가지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단히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유교적 이상을 자신이 속한 사회현실에 실현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민족에 대한 봉사의식은 탁사가 소유한 자의식自意識의 주요한 부분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의 창간을 주도하고 직접 주필로도 활동하였으며, 그 밖에도 <조선회보>나 <황성신문> 등에 민족계도를 위한 글을 발표하고, 더 나아가 서재필 등과 더불어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하는 등 대사회의 책임과 민족주의적인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기독교와의 만남, 혹은 수용도 그가 신앙체험이 깊어지기 전에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시각 안에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유의해서 살펴봐야 할 장면들이 몇 개 더 있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탁사의 기독교에 대한 시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들이다. 우선 탁사의 입교는 그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지극히 전통적 방법을 통한 연구의 결과로 그는 성서의 진리를 수용하게 된다. 즉 그는 유학자의 경전공부를 연상케 하는 5년간의 성서 연구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로 다짐한다. 바로 이 그림에서 우리는 전통과 새로움이 창조적으로 융합되는 탁사만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게 된다. 전통적 방법과 형식 안에 탁사는 새로운 생각과 가치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주로 그의 글쓰기와 논의 전개 등에 잘 나타난다. 대화체 형식의 글과 전통 종교사상에 대한 지식을 통해 전해지는 그만의 선교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림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의 모습과 연관이 있다. 여기에서는 두 개의 사례만을 제시해본다. 하나는 탁사가 세례를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에 생겨난 일이다. 우연히 도심에서 병든 거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아무도 그를 돕는 이 없었고, 자신마저 어쩌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이후 며칠이 지난 후 탁사는 외국인 선교사가 그를 데려다가 잘 치료하고 보살펴 다시 건강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기독교가 사랑과 실천의 종교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탁사에게 기독교라는 종교의 가치를 일깨워준 또 다른 그림은 바로 아펜젤러의 순직사건이다. 공무를 위해 목포로 가던 중 배가 파선하였는데, 수영선수 출신이었던 아펜젤러는 홀로 살려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동료들을 구하려다 함께 익사하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탁사는 아펜젤러가 목회하던 정동감리교회의 후임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 두 사건은 탁사로 하여금 기독교의 본질을 온 몸으로 알 수 있게 해준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탁사가 가지는 한반도의 초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성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전통의 사람’이었다는 것과 아울러 동시에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탁사의 생애 내내 이어지는 특성이기도 하다. 탁사의 글쓰기와 논의전개, 그리고 가지고 있는 지식의 통로도 사실 새로운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서구의 방법론은 아니었다. 그의 중요한 신학적 저술들도 대부분 전통적인 대화체 기법을 통하여 발표되었고 이는 지극히 전통적인 글쓰기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아울러 이미 극복한 상태이긴 하지만 탁사는 여전히 풍부한 신유학과 동아시아 종교들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 인물이기도 했다. 아울러 신앙적으로는 경건한 웨슬리의 신학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이처럼 기존 경전공부를 통해 습득한 지극히 동양적 사유방식에 서구에서 전래된 기독교의 종교체험이 바야흐로 탁사라고 하는 한 실존인물의 내부에서 창조적으로 결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을 유의하면서 이후에는 탁사가 전개한 신학적 특성을 세 가지 측면에서 요약하고자 한다. 그의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과 경건주의적 특성, 그리고 이웃 종교에 대한 열린 연구자세가 그것이다.


2. 탁사 신학의 특징

2. 1. 민족주의적 특성

탁사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그의 생애 곳곳에서 포착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탁사는 다양한 언론활동을 통하여서 민족의 계도와 조선의 부국강병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탁사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성향 속에서 흡수되고 있었음이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농공상의 이익이 모두 외국인의 손에 잡혀 돌아가니 이 백성이 어떻게 생활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정치 명령이 여기에 이르니 무너지고 어지러움이 극에 이르렀다.”

같은 신문 다른 일자에 실린 글에서 탁사의 이런 심정은 계속 이어진다.

“또 내가 일전에 남대문안 시장 동쪽 가에 몇 간의 빈 터를 한성부에 청원하여 점포를 설치하려 했더니, 관원이 굳게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 땅은 나라 땅이라 후일에 반드시 공용으로 쓸 데가 있다더니 지금 보니 일본사람이 그 터에 이층집을 짓고 점포를 설치하였다. 이러니 그 땅을 이와 같은 공용에 쓸려고 공인했으니 어찌 자기 백성을 이다지고 경시하는가. 슬프다! 이 벼슬아치여! 어찌 저 사람에게는 후하고 우리 한민족에게는 야박하게 하는가!”

한국사회가 이렇게 된 까닭은 국가의 세력이 약해진 탓이다. 따라서 당시 시급한 문제는 무엇보다도 쇠퇴해진 국가의 위세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조선사회의 여론 주도층은 너나 할 것 없이 부국강병의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고, 이들은 각각의 입장에 따라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그것이 곧 ①척사 위정론 ②온건개화론 ③급진 개화론파이다. 이들이 나뉘게 되는 이유는 새로운 가치관 혹은 문명이랄 수 있는 서구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서이다. 하지만 탁사는 이들 어디에 속해있다고 보기가 간단치 않다. 당시 탁사가 취한 태도는 이들 3집단과는 다른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탁사는 일방적으로 서구문명을 반대하려는 척사론의 입장도 아니며, 그렇다고 모든 것을 서구식으로 개조할 것을 주장하는 급진적 개화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동도서기를 주장한 온건론자였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온건론자들은 서구의 기술문명은 수용하되, 정신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동도서기론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서구에 비해 동양의 정신문화가 우월하다는 문화적 자긍심을 지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탁사의 응답은 결국 기술이나 문명도 정신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신을 수용하지 않고 그 껍질인 기술과 문명만을 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동과 서를 나누지 않는다. 참되고도 위대한 진리道는 자국 타국을 가르지 않고 두루 통하는 것이다. 진리라고 하는 기준에서 본다면, 그것이 동이든 서이든 간에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탁사의 입장은 아래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 세상에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서양의 기계는 취하고 쓸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서양의 종교는 존경 숭상할 수 없다고 하여서 그것을 이단으로 지적하여 버리니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번 서양의 문명이 도움이 된다하면서도, 가르침과 도리의 아름답지 못함은 물리치고 있으며, 또한 외국의 강한 것은 칭찬하면서도 그들이 부강해진 원인은 알려고 들지 않으니 한스럽다! 모름지기 대도大道는 끝이 없는 것이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모든 나라에 두루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의 하늘이 곧 동양의 하늘이다. 천하로 볼 때 모든 사해의 무리가 하나이고 형제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탁사는 기독교를 빼놓은 채 이루어지는 서구문명은 완전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야 말로 서구문명의 핵심이며 정신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과 서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므로, 기독교의 정신이 진리라 한다면 과감하게 수용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탁사의 견해는 여전히 기독교신앙을 수용하면서도 그에게 남아있는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쇠락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신앙운동을 통해 나라의 부강을 도모하려는 그의 의지와 소망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그를 교회 안에만 안주할 수 없게 하였다. 따라서 탁사의 사회 활동은 적극적이었고 능동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탁사의 사회 활동은 ‘민족주의적 개화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탁사는 이어 독립협회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즈음 스스로 다음과 같은 <독립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천지만물 창조 후에
오주 구역 천정이라
아세아주 동양 중에
대조선국 분명하다.

독립기초 장구술은
국민상에 제일이다
기쁜 날 기쁜 날
대조선국 독립한 날

이처럼 탁사의 활동 기저에는 ‘겨레’라는 화두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에 대한 접근 역시 초기에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성향 속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2. 2. 경건주의적 특성

유동식은 탁사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구별한다. 하지만 그 판단의 기준은 좀 애매하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 대하여 보여준 탁사의 너그러운 자세가 유동식으로 하여금 그런 평가를 내리도록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탁사가 자유주의신학의 시대정신과 방법론을 계승, 혹은 유지하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저술 등을 통하여 나타나는 탁사의 입장은 자유주의 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편이다. 탁사는 여러 글을 통하여 정성스레 다양한 종교들의 입장과 그들의 특징적인 교리들을 소개하고 설명하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와 같은 탁사의 작업은 선교 목적을 위한 충실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분명 탁사는 자신이 새롭게 고백하게 된 기독교 신앙과 기존하는 한반도의 전통 문화와의 접촉점 찾기에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그가 자유주의 신학이나 종교다원주의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또한 탁사가 활동했던 당시 시대상황이나 혹은 그가 접했던 선교사들의 신학 입장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자유주의 신학자였다는 판단은 더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탁사의 글에는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시각이 빠져있다. 탁사의 성서이해는 도리어 기존 유학자들의 경전공부의 연장 속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많은 부분 탁사는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 이해나 혹은 분석을 하고 있다라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의 권위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그는 웨슬리의 성화론을 떠올리는 신자의 7단계를 설명하면서 그 근거로서 주로 성서의 본문들을 그대로 적시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그의 속죄론 역시 자유주의의 그것보다는 정통적 해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생각하는 참 종교에 대한 견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탁사는 다음과 같이 참 종교의 좋은 결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基督은 上主와 三位一體시오 獨生 聖子이신 故로 降世爲人시며 釘流寶血노 萬民의 罪를 代贖시며 死後復活샤 陰府의 權을 勝심은 無論貴賤男女시고 信者로 得救케 신지라. 然 故로 基督敎의 信仰者들은 何國何人何等何種人을 不許고 兄弟姉妹로 視며 仇讐지 愛야 自己를 舍고 他人을 助대 强者가 弱者를 扶護고 安者가 災者를 救恤며 愚者를 敎導고 病者를 治療야 憂者로 同憂며 樂者로 同樂니 此是 眞宗敎에 善果이라.”

여기서 사용되는 것은 기독교의 정통적 속죄론이다. 즉 하느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림으로 모든 이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이지, 인간의 주관적 정신 상태에서 속죄의 의미를 구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태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탁사가 사계에 최초로 제출한 신학논문이 원죄론을 취급하고 있는 <죄도리>罪道理였다는 것도 탁사가 정통적 속죄론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탁사는 짧은 이 논문 속에서도 ‘예수를 통한 대속’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아담 이후로 셰상 백셩의 죄악이 심즁거늘 하님께서 홍슈를 나리샤 억죠창생을 다 죽게 시고 노아의 손들이 또한 죄악이 관영고로 모셰의게 열가지 계명을 주샤 백셩을 치게 시더니 백성들이 졈졈 우샹의게 절쟈 만흐며  죄악에 빠지는쟈 세계에 가득거 하남께셔 특별히 바심을 베프샤 독생 예수를 셰샹에 보내시며 죄인들을 불너 회개케 시고 십가에 죽으샤 만국만민의 죄 대쇽셧시니 누구던지 예수를 믿쟈 죄를 샤유시고 구원을 엇게 신지라 성경에 샤대 하님께셔 셰샹을 렁샤 독생를 주셧시니 누구던지 뎌를 밋으면 멸망지안코 영생을 엇으리라 하시니라.”

이 점에서 탁사는 토미즘을 근거로 자연신학적 토대 위에 유교와 기독교의 접촉점을 찾으려 시도한 예수회의 마태오 리치와도 선을 분명 달리한다. 기독론을 가급적 축소하며 신론 중심의 보유론적 입장을 유지한 리치와는 달리 탁사는 오히려 기독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웨슬리의 체험신학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탁사의 이러한 입장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와 같은 탁사의 글들을 종합해 볼 때, 그는 오히려 감리교 선교사들을 통해 얻은 웨슬리신학의 성화론적 특성을 소유한 정통적 경건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대표저작이라 할 수 있는 <만종일련>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이미 밝혔듯이 탁사는 그 책의 결론 부분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거쳐야 할 신앙의 7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세상에 처하여 소망이 없고, 사후에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자. 죄에서 낳고, 자라고, 늙으며, 또 죄 가운데 죽는 자.
② 죄를 알고 애통하는 자: 진리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얻어 회개한 자.
③ 믿음으로써 의롭다 된 자.
④ 하나님으로 거듭난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 죄 정함이 없는 자.
⑤ 하나님을 보는 자: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
⑥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
⑦ 완전히 성결해진 자: 하느님의 아들을 믿으며 아는 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하게 이른 자.

탁사는 이를 설명하면서 각각 성서본문들을 인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①번 같은 경우 아예 그 제목을 예베소서의 한 구절로부터 직접 따오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탁사의 이런 경건주의적 특성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아무래도 우리는 그와 15년간이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탁사의 <전도기적비문>傳道紀績碑文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감람산 색은 만고에 푸르르고
아펜젤러와 백중하여
동서의 쌍벽을 이루도다.”

탁사는 앞서 언급한 몇몇 경험들을 통하여 기독교가 사랑과 실천의 종교임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펜젤러와 더불어 교류하면서 성화론을 중심으로한 웨슬리 신학을 충분히 습득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탁사의 신학사상 형성에는 아펜젤러의 영향을 적다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아펜젤러가 지녔던 신학적 특성은 어떠했는가? 성백걸은 그의 글에서 아펜젤러의 신학이 종교개혁적인 복음주의와 경건주의, 그리고 웨슬리적인 감리교회의 구원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아펜젤러의 입장은 탁사에게도 성실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살펴 본 탁사의 경건주의적 입장에 많은 부분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탁사가 결코 자유주의 신학자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글 <삼인문답>三人問答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 글은 <성산명경> 이전에 탁사의 종교변증론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이글은 전도 중에 만난 유자들과의 대화를 담고 있다. 그 글에서 유교인들이 취한 태도는 전형적인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이다. 즉 유자들은 기존 동양에도 성현의 정신을 담고 있는 뛰어난 종교들이 있는데 구태여 외국에서 유래한 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에 대한 탁사는 전통적 예수의 대속론을 가지고 응답한다. 즉 공맹이나 노자 부처는 단지 성현이지만 예수는 하느님이시며, 인류의 죄를 대속한 ‘구세주’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탁사는 자유주의 신학자나 혹은 종교다원주의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들을 설득하여 개종케 하려는 정통적 호교론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2. 3. 이웃 종교에 대한 열린 연구자세

하지만 탁사는 결코 배타적 신앙인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가 속한 사회의 이웃종교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동시대 사람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 종교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 중 몇몇은 한국인들에게서 보이는 고유한 최고신 개념에 상당히 고무되어 있기도 했었다. 아펜젤러도 이런 유에 속하는데, 그는 이미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오래된 ‘하느님 신앙’에 기독교 신앙을 세워갈 것을 독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단편적인 것이고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 대부분은 한국의 종교 환경에 대하여 가졌던 인식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이고, 포용적이라기보다는 적대적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글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 조선을 다녀온 사람들의 견문록이나 네덜란드, 일본, 프랑스인들의 기록을 볼 것 같으면, 조선 사람들의 미신의 구조나 오늘날 조선 사람들의 종교는 불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과거 2천년 동안 전반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천신이나 지신, 산, 강, 동굴, 샛별에 대한 경배는 아직도 자연적인 물체의 명칭에 나타나고 있으며, 양이나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과 더불어 옛 모습 그대로 떳떳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기존 한국 종교들에 대해서 개신교 내의 분위기가 적대적이고 냉소적이었던 시기에 탁사는 종교 변증작업에 집중한다. 그리고 종교 변증작업에 몰두하는 탁사의 자리는 선교사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의 기존 종교를 미신, 혹은 우상이라 몰아붙이며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에 반해, 탁사는 상당히 정중하고도 세밀한 태도로 이웃종교들을 소통을 위한 자리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노력은 <삼인문답>(1900), <성산명경>(1910, 1911), <만종일련>(1922) 등의 작품으로 정리가 되었다.

이 글들을 통해 탁사가 하고자 했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참된 종교’眞宗敎찾기이다. 물론 탁사에게 참된 종교란 그리스도교이다. 그렇다면 탁사는 어떤 기준으로 참된 종교를 찾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참된 구원’을 가능케 하는 종교이다. 그런 점에서 탁사의 작업은 선교적이며 신학적이다. 비단 그의 저술 작업이 세계 여러 종교들에 대한 비교작업이긴 하지만 이미 비교를 위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탁사로서는 결국 자신의 작업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선교와 개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그의 저술에는 기독교의 참됨을 강조하고 반복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와 같은 탁사의 태도는 다음 인용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도 베드로대 련하 인간에 우리가 다른 일흠으로 구원을 엇을 수 업다셧스니 텬상쳔하에 하남도 나뿐이시오 동양셔양에 구셰쥬도 오직 나뿐이시라 우리가 젼에는 하님과 멀엇더니 지금은 예수의 공으로 다시 갓가히 되엿고 녜젼에는 어두온 곳에잇던 죄인이더니 지금은 은 빗츠로 나아와스며 우리가 젼에는 죽 길노가 가련 인생이더니 지금은 사 길노 인도식 우리가 녜전에는 마귀에 죵이 되엿더니 지금은 하님의 랑시 아이 되게셧스니 엇지 깃분 일이 아니리오. 이졔 구셰쥬를 밋어야 구원을 엇 리치 말엿거니와 거룩산 하님의 은혜 실노 한량 업시 감샤  일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탁사가 기독교 일방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접하고 있는 다양한 이웃종교들의 가치와 존재를 인정하며, 더 나아가 기독교는 그것들을 충족시키고, 완전하게 만드는 참 종교임을 강조하는 방식을 취하는 일종의 ‘포괄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예컨대 탁사의 유교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탁사는 그의 대표저서인 『만종일련』에서 고대 유자들이 섬겼던 상제가 기독교의 야웨와 다른 존재가 아님을 인정한다.

“儒家에서 敬畏 上帝는 道家에서 尊尙 玉皇上帝나 玄天上帝나 元是天尊이 아니오. 天地를 管理시 造化의 主宰를 稱이니 耶蘇敎會에 獨一無二시며 全知全能신 耶華和上主와 一이시오, 堯舜禹湯과 周之文武는 上主를 敬畏이 猶太의 大衛다윗王과 所羅門솔로몬과 略同고 孔孟程朱는 猶太의 先知輩와 希臘의 哲學者와 同一 理想이 多지라.”

이런 점에서 탁사는 리치의 보유론적 선교방식과 많은 점에서 비교된다. 우선 이 양자가 취하고 있는 입장은 ‘보유론’이라는 포괄주의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치가 신론 중심에 서있다면, 탁사는 과감하게 기독론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것이 탁사가 가지는 독특함이다. 실상 기독론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 배타성을 물리치기가 곤란하게 된다.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으로 유일회적인 존재에 구원이라는 통로를 집중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경우의 구원은 자동적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서로 나란히 할 수 없는 두 개의 관점이 탁사에게는 큰 충돌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웃 종교들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만의 독특한 구원론인 기독의 대속을 강조하는 것. 그것이 탁사가 보여주는 종교변증론의 독특함이다. 도대체 이런 탁사의 독특함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어쩌면 이 독특함은 그가 웨슬리 신학의 승계자였음을 생각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 역시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인류가 타락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후에도 구원의 손길을 완전히 거두어 가시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역사는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아 구원을 받기 전에도 전체 역사를 통해, 그리고 전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이름 하여 ‘선행은총’gratia prevenius론이며, 인류는 희미하게나마 이 빛으로 인해 신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이 계속 확대되면 이웃 종교와의 관계 형성에 있어서 상당히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탁사는 이렇게 웨슬리 신학을 정초 잡아 자신의 종교 변증론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을 성령론적으로 풀어 다종교 환경에 적용시킨 것이 탁사의 종교변증 작업이라 정리한 최성수의 분석은 새겨 들을만하다. 이 점에서 이덕주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덕주는 탁사의 종교변증론은 개종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감동’이라고 하는 『성산명경』의 끝부분에 나오는 탁사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탁사의 변을 들어보자.

“한번은 츄풍秋風이 소슬蕭瑟고 셩월星月이 교결皎潔대 락엽落葉이 분분紛紛거 쳥등靑燈 셔옥書屋에 책샹을 의지야 신약셩경을 잠심완색潛心玩索더니 홀연히 심혼心魂이 표탕飄蕩야 곳에 니매 그 산 일흠은 셩산이오 그 층대일홈은 령대라 그곳에셔 네 사을 맛나셔 슈쟉을 듯고 깃버다가 오경텬 찬바람에 황계셩黃鷄聲이 악악喔喔거 놀나 니러나니 일쟝몽죠가 쟝 이샹지라 셔안을 의지여 묵묵히 생각며 스로 해몽대 셩산은 곳 밋 쟈의 몸이오 령대는 곳 밋는쟈의 이라 유불션 삼도에셔 공부던 쟈라도 만일 셩신이 인도야 예수교인과 샹죵면 이 교통야 밋데 평일소원을 표일너라.”

이 글에서 탁사는 『성산명경』의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잠결에 세 사람이 모여 대화하는 것을 글로써 표현한 것이 『성산명경』이고, 또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언제든, 누구든 기독교로의 개종이 가능하다는 탁사 자신의 고백으로 이 책은 정리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탁사의 종교변증론은 자신의 종교체험에 기초한 참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무한한 확신에 기초한 선교작업의 하나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3. 마치는 글

본 논문에서 글쓴이는 탁사의 신학 작업이 가지는 특성을 세 가지(민족주의적 특성-경건주의적 특성-이웃 종교에 대한 열린 연구 자세)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아울러 탁사의 이 세 가지 신학적 방향성은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체험신학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글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적 신학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었다. 한국적 신학이란 한국이라는 특수상황이 낳은 시대정신과 역사적 전통유산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와 만남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물음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탁사는 최초의 한국적 신학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러한 작업을 자의식 속에 훌륭히 수행하였는가? 우선은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탁사의 신학 작업 속에 쉼 없이 흐르는 핵심적 요소는 바로 ‘겨레民族-믿음基督信仰-체험靈性’이라 할 수 있다. 구한말이라는 위급한 시기에 그는 민족의 부흥을 꾀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부강한 서구의 사례를 수용하는 것인데, 탁사는 서구 문물의 핵심에는 그리스도교라는 정신세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간파하여 다른 개화파와는 달리 서구의 정신과 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것을 주창하고 있다. 아울러 신앙인이 된 후에는 기존 종교 환경을 무시하지 않고 전통 종교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이 땅에 확장시키기를 원했다. 하지만 탁사가 취한 태도는 전투적 배타성으로 무장된 제국주의적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탁사는 웨슬리 신학의 선행 은총론에 의거하여 기존의 전통 종교들도 일정 부분 인정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정통 기독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기독교의 절대성이나 보편성을 폐기한 것도 아니다. 끝까지 탁사는 기독교의 절대성과 참 종교성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더 강조하였고, 자신의 신학 작업에 있어서 주요한 동기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탁사의 정통적 모습은 그의 글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종교체험’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탁사에게는 유교적 기독인, 자유주의 신학자, 종교다원주의자 기타 등등 많은 종류의 이름들이 주어졌다. 하지만 정작 탁사 자신의 생애와 신학적 작업들을 꼼꼼하게 점검해 본다면, 그와 같은 이름들은 후대의 바람과 희구가 섞인 조금은 확대된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오히려 1893년 세례를 통해 정식 개신교도가 된 이후 보여준 탁사의 삶은 정통적 기독자의 모습이었고, 또 그것을 그의 마지막 생애까지 이어갔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 탁사를 자유주의 신학자의 대부라 지칭토록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던 그의 종교변증론 역시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선교신학적 작업의 결과물이었고, 그 안에서 논구되는 이야기들도 자유주의적이라기보다는 정통적 웨슬리신학의 연장 속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체험적 특성이 강한 탁사의 신학은 체험과 영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정리할 때 보다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탁사는 자신이 처한 시대정신과 신학적 문제 찾기를 영성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통하여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아울러 탁사의 이런 모습에는 ‘겨레-믿음-체험의 한국적 영성신학자’라는 별칭이 더 적절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 1차 사료
“雜報”, <大韓每日申報>, 1906년 7월 6일 & 10월 7일 자.
“三人問答”, <대한 그리스도인회보>, 1900년 3월 21일 자.
“罪道理”, <신학월보>, No1-8, 1901.
“奇書”, <皇城新聞>, 1903년 12월 22일 자.
“宗敎與政治之關係”, <황성신문>, 1906년 10월 4, 5, 6일 자.
『聖山明鏡』, 서울: 貞洞皇華書齊, 1911.
『萬宗一臠』, 서울: 朝鮮耶蘇敎書會, 1927.

- 2차 문헌
김광식, “기독교와 한국문화의 만남: 최병헌과 전덕기를 중심으로”, <신학논단>,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1989.
김진호, “탁사 최병헌 선생 약력”, <신학세계> 12권 2호, 1927
미야자키 이치사다(박근칠 외 역), 『중국의 시험지옥-과거』, 서울: 청년사, 2000.
미야지마 히로시(노영구 옮김), 『양반』, 서울: 강, 1996.
박병길, “탁사 최병헌 목사의 삶”, <세계의 신학>, 1997, 겨울호.
변선환, “탁사 최병헌과 동양사상”, <신학과 세계> 6권, 1990 가을.
변선환, 『한국적 신학의 모색』, 변선환 아키브 편, 1997.
성백걸, “웨슬리신학과 초기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No. 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송길섭, “한국 신학 형성의 선구자, 탁사 최병헌과 그의 시대”, <신학과 세계> 제 6 호, 1980.
신광철, “탁사 최병헌의 한국신학 연구”, <한국종교사연구> 12집.
신광철, “탁사 최병헌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 변증론: <성산명경>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7 호, 한국기독교역사학회, 1997.  
신복룡,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서울: 평민사, 1985.
윌리엄 그리피스(신복룡 역),『은자의 나라 한국』, 서울: 집문당, 1999.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서울: 전망사, 1982.
이덕주, “초기 한국교회 토착신학 영성”, <신학과 세계>. 감리교신학대학교, 2005.
이정배, “마태오 릿치와 탁사 최병헌의 보유론적 기독교 이해의 차이와 한계”, <신학사상> 122집, 2003 가을호,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4.
조현범, 『문명과 야만: 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 서울: 책세상, 2002.
何柄棣(조영록 외 역), 『중국과거제도의 사회사적 연구』, 서울: 동국대 출판부, 1993.
Sung-Soo Choi, "Koreanisches Christentum in Begegung mit einheimischen Religion, dargestellt an der Konzeption 'Koreanische Theologie' bei Byunghun Choi und Tongshik Ryu"(독일 Bonn대학 학위논문, 1999)



  1. No Image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

    엘리아데... 참으로 쉽지 않은 이름이다. 80평생 그의 인생이 짧지 않고, 그 긴 생애 동안 그가 해놓은 일들이 또한 만만치 않다. 이렇게 쉽지 않은 인생이 엘리아데인데 그가 평생의 역작으로 구상하고 또 저술한 에 대하여 무언가 평을 해야 한다는 것은 무...
    Date2005.12.27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4581
    Read More
  2. No Image

    [다중인격의 측면에서 본 나카야마 미키의 신비체험]에 대한 논평

    [다중인격의 측면에서 본 나카야마 미키의 신비체험]에 대한 논평 일본의 대표적인 신종교로 인정되는 천리교의 교조 미키가 경험한 ‘신비체험’을 ‘다중인격 장애’라는 정신 병리학적 시각으로 살펴 본 임태홍 박사의 논문은 종교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
    Date2005.11.13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200
    Read More
  3. No Image

    힌두교 그리고 불교..

    결국 불교란 힌두교의 세속화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신적 존재를 빌어 인생의 문제를 해결코자 했던 힌두교에 비해 불교는 철저히 이성을 도구로한 지적 탐구를 통하여 그 문제를 탈신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계이해를 상식화한 불교는 힌두교의 전통(...
    Date2005.11.11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606
    Read More
  4. No Image

    성경교?

    언젠가 개신교 신학을 하는 한 친구로 부터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국에는 기독교, 예수교 외에 종파가 하나 더 있어?" "야 그리스도교 종파로 따지면,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도 모두 포함시켜야지~" "아 그런 거 말고 또 하나 있다니까? 모르긴 해...
    Date2005.11.07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815
    Read More
  5. No Image

    한유(韓愈, 768~824)가 신유학자?

    어느 학회에서 한 기독교 신학자를 만났다. 그는 한 논문 발표장에서 질문을 던지면서 한유가 신유학자라는 발언을 해 버렸다. 당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이야기하면서, 리치가 한유의 불교비판을 수용해서 그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
    Date2005.11.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2126
    Read More
  6. No Image

    [천당,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논평

    * 아래 글은 10월 21일에 있는 한국문화신학회의 논문발표 시 논찬을 맡아서 작성한 글입니다. 각주까지 달려있는 정교한 글은 pdf파일을 참조하세요 * “천당,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논평 논찬자: 이 길용 박사(종교학) 1. 좀 더 명확한 비교 대...
    Date2005.10.17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982
    Read More
  7. No Image

    새마을 운동과 한국 개신교의 성장

    7-80년 한국 개신교회는 비교의 대상을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한반도에서 급성장세를 기록하였다. 물론 이것을 간략하이 "신의 은총"이라 귀결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사는 맛이 그렇게 단촐하게 정리될 수 있겠는가? 좀더 고민이 많고, 잡다한 분석을 요하는 ...
    Date2005.10.11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62
    Read More
  8. No Image

    결국 문화도 종교도 관성의 축적일 뿐..

    사람들은 말한다. 문화는, 사상은, 종교는 귀중한 것이며, 소중한 것이며, 놀라운 것이며, 고귀한 것이며, 지고의 것이며, 놀라운 사유의 결산이며,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라고.. 그러나 나는 말한다. 문화는, 사상은, 종교는.. 때론 그것이 진리라 여겨지는 ...
    Date2005.09.24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55
    Read More
  9. No Image

    왜 또 유교인가?

    왜 또 유교인가? 이 길용(종교학) 1. 雜言 외국에 나와서 놀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가방끈 길이에 목숨을 걸고 있는 먹물계에서 느낀 점 한가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그것은 대부분이 한국국적을 지니고있는 이들은 외국에서는 한결같이 한국...
    Date2005.07.23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709
    Read More
  10. No Image

    종교와 민족주의..

    한때는 종교가 스스로의 포장을 위하여 민족주의를 옷입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그 생각이 역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광기를 선사해주는 종교 위의 종교는 '민족주의' 같아 보입니다. 그 징그러운 광기는 거진 저...
    Date2005.06.14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485
    Read More
  11. No Image

    ‘致良知’와 ‘守心正氣’에 대한 종교학적 이해

    ‘致良知’와 ‘守心正氣’에 대한 종교학적 이해 이 길 용 1. 여는 글: 종교학적 연구주제로서의 신비체험 근대적 종교연구는 영국의 진화론적 인류학자인 테일러(Edward Burnett Taylor, 1832-1917)와 마레트(Robert Ranulph Marett, 1866-1943)의 연구에 많은 ...
    Date2005.03.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40
    Read More
  12. No Image

    종교(Religion)

    종 교 (Religion) 우리는 지금 종교라 하면 특정한 교리와 신앙체계, 그리고 의례들을 갖춘 폐쇄적인 공동체를 생각한다. 따라서 종교 혹은 종교들은 이 세상에 다양하게 존재해 왔고, 또 현존하고 있다고 여긴다. 또한 그러한 ‘종교들’(과연 ‘종교’란 말이 복...
    Date2005.02.28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722
    Read More
  13. No Image

    Zum Charakter des Neo-Konfuzianismus

    Charakter des Neo-Konfuzianismus a. Philosophie für die Beamten: man kann durch Lernen zum „shengren“ werden In der chinesischen Geschichte kann der Neo-Konfuzianismus als Philosophie oder Sozialethik der Beamten betrachtet werde...
    Date2004.09.1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776
    Read More
  14. No Image

    기독교에서 바라 본 동학

    기독교에서 바라 본 동학 - 기독교계의 동학연구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대안 모색을 위한 시론 이 길용 (종교학) 1. 여는 글 이 논문은 1960년대 이후 기독교내에서 이루어진 동학관련 연구들에 대한 비판적인 추적을 주목적으로 한다. 논문에서 주목되고 있는...
    Date2004.03.2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443
    Read More
  15. No Image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시작하면서... 오늘 이렇게 예배의식 중에 행하는 만찬례가 아닌 예수의 만찬을 하는 이유는, 설익은 우리의 반복적인 그리고 습관적인 성찬 참여가 오히려 성찬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지는 않는가 란 노파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을 통하여,...
    Date2002.07.12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497
    Read More
  16. No Image

    주자학의 한계와 모순

    역사를 보는 여러개의 눈들... 주자학의 한계와 모순 * 이 글은 한 고등학생이 제게 메일로 보낸 질문에 대한 답변내용입니다. 혹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의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올려 봅니다. 질문] 질문 있습니다... 주자학의 한계라던지..모...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62
    Read More
  17. No Image

    왜 경전을 읽는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경전들... 경전(經典, canon)! 어쩌면 우리는 이 이름을 무겁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위엄 있는 책장에 속한 서물(書物)들 중에서도 가장 버겁고, 혹은 가장 훌륭한 치장 속에 출중한 권위를 만끽하고 있는 금박의 책들을 생각할...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83
    Read More
  18. No Image

    종교간 대화에 대한 '남' 생각

    * 이글은 서강 종교연구회 주제토론방에 실은 글이다.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 최초로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으로서의 최소한 책임감때문에 쓴 글이었다. 아래 호영이의 글도 있고 해서 여기에 다시 한번 옮겨본다 * 독일의 이길용입니다. 웬만하면 이곳에 글을 ...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849
    Read More
  19. No Image

    知訥의 眞心直說

    知訥의 眞心直說 1. 이끄는 글 지눌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황해도 서흥(瑞興)줄신이다. 지눌이 활동하던 당시 고려는 안팎으로 큰 시련기에 처해있었다. 몽고의 강력한 무력적인 위협은 고려를 완전한 자립국으로 존립하는 데 큰 어...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851
    Read More
  20. No Image

    참을 수 없는 주희의 무거움

    참을 수 없는 주희의 무거움 0. 또 주접 오늘 나는 朱熹 朱熹(1130-1200)는 南宋代 유학자이다. 우리에겐 朱子라 익히 알려온 인물이 바로 그 이다. 여기 나의 논의 속에서는 김용옥-최영애 시스템에 의하여 주시라는 중국식 발음표기를 사용하겠다. 따라서 이...
    Date2002.07.06 Category종교학의 세계 Views1684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