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06.08.12 10:50

현대문화와 생명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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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화와 생명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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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화’와 ‘생명’

이 강연을 이끌어갈 두 용어입니다. 이 용어들은 이른바 ‘거대한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이들 용어는 세밀하고 치밀한 생각의 그물에 잡히기보다는 자칫 허공에 뿌려지는 의미가 반감된 엉성한 ‘설교’가 될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따라서 이 제목에 행해지는 강연은 무언가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발표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평 시리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제를 받아든 강연자는 고민합니다. 무언가 체계 있게 남겨질 만한 ‘들을 거리’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 고민은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일 것입니다. 강연자가 선택할 수 있는 우선적인 조치들은 ‘범위의 한정’입니다. 따라서 이 강연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끌어질 것입니다. 먼저 이 강연의 중심코드는 ‘생명’입니다. 물론 ‘현대 문화’라는 표제어가 선두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현대문화와 생명이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기보다는 현대 문화 속에서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제대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이 강연의 주된 테마라고 할 수 있기에 당연 이 논의의 중심은 생명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혹은 생명을 논하는 것이 가지는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강연자의 시각이 우선적으로 노출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 논의 속에서 언급되는 생명에 대한 내포와 외연을 적절히 조절해 보고자 합니다. 그 이후 정보 제공 차원에서 역사 속에서 인류는 어떻게 이 생명을 이해하고 납득해왔는지 몇 개의 사례를 들어 말씀해드리고자 합니다. 그 이후에야 저는 ‘현대문화’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때 언급되는 현대 문화도 조금은 의도적인 접근을 할 작정입니다. 우선 제가 신경 써서 서술하고자 하는 부분은 소위 우리가 지금 현대 문화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 형성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21세기 한반도 남쪽에서 어떤 모습을 작동하고 있는지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어쩔 수 없이 지난 2년간 한국사회의 가장 민감한 아젠다였던 ‘핵치환 배아줄기 세포’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 문제를 통하여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명현상을 조망해야 할 것이며, 또 그것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생각의 전환은 어떠한 것인지 대략적인 전망을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논의는 구체적 사회현상인,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배아줄기세포 파동이 이 사회에 던져준 생명에 대한 이해, 혹은 시각을 중심으로 해서 이러 저러한 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8일 후... 그리고 2년 후...
마약에 찌든 우울한 영국 젊은이들의 일상을 파격적인 화면에 담아 세계 영화인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대니 보일이라는 영국 감독이 있습니다(Trainspotting, 1996). 2002년 잊지 않고 그는 또 다른 강렬한 인상의 영화 하나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그리고 그 영화는 펼쳐지는 화면속의 그림과는 달리 인류가 끊임없이 풀어야 할 인간성문제에 대한 지난한 숙제 하나를 안겨줍니다. 그 작품에는 “28일 후...”라는 지극히 의도적인 제목이 달려있었습니다. 영화의 대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의 한 영장류 연구시설에 일단의 동물 권리 운동가들이 무단으로 침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방에 널려있는 스크린들을 통해 잔혹한 폭력 속에 신음하고 있는 침팬지들을 발견합니다. 이 유인원들은 사슬에 묶여있거나 좁디좁은 우리 안에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 학대 현장을 목격한 동물 권리 운동가들은 분노합니다. 폭발하는 동물 권리 운동가들의 분노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이 유인원들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이 ‘분노 바이러스’의 유포는 인류에게는 크나 큰 재앙이 될 것임을 재차 경고합니다. 하지만 터져버린 분노 앞에서 ‘바이러스’ 운운은 소소한 일이 되고 맙니다. 결국 침팬지들은 자애로운 동물애호가들에 의해 우리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날 이후 세상은 개벽합니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이 28일... 마침 침팬지들이 해방되던 날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져있던 ‘짐’이란 이름의 청년이 한 병원에서 깨어납니다. 의식이 돌아온 후 짐이 바라본 환경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마땅히 그곳을 채우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텅 빈 병원. 텅 빈 거리. 텅 빈 빌딩들. 무언가 분명히 이전과 달라졌음을 짐은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날이 저물어 거리에 있는 한 성당 안에 들어갔다가 짐은 ‘분노 바이러스’에 점염되어 괴물로 변해버린 한 신부의 피로 물든 눈동자를 통해 지금 자신은 이전에는 결코 경험해볼 수 없었던 신천지(?)에 이미 들어와 버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후 짐은 아직 감염되지 않은 몇 명의 동료를 얻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우연히 바이러스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곳은 맨체스터. 소대 병력 정도의 군인이 맨체스터의 일부를 점령하고 감염자들을 철저히 차단하여 정상적인 인간들만의 도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짐은 분노 바이러스와는 또 다른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 바이러스에는 ‘성욕’이라는 딱지가 붙어있었습니다. 헨리 소령이 이끄는 부대는 오직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짐에게는 두 명의 여성 동료가 있었고, 이 정상적인 두명의 여성들은 여전히 감염되지 않은 십 수 명의 남자 병사들 앞에 무자비하게 내동댕이쳐집니다. 세계가 황폐해져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욕에 사로잡혀있는 병사들. 여성들을 발견한 그들은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보다 더한 발정 난 수캐처럼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피울음은 반복됩니다. 이제 싸움은 정상인과 감염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인과 정상인, 아니 성폭력범과 정상인들 사이의 대결입니다. 결국 짐의 기지와 분노는 병사들을 퇴치하고 두 여성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청정지역을 찾아 떠나게 되고, 결국에는 정찰 비행기의 눈에 띠어 구원을 얻는 다는 내용입니다.

대니 보일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성과 생명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동시대인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우선 ‘분노 바이러스’를 통해 보일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얼핏 보면 이 바이러스는 파괴와 멸절을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은 죽지 않습니다. 분명 죽은 이들이지만, 죽지 않고 여전히 움직이고 생동하고 활동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이 감염되기 전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모든 사회적 관계는 상실합니다. 단지 그들에게 남은 것은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 그것의 확산을 위해 봉사하는 일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살아있게 됩니다. 좀처럼 죽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내면의 인격은 소멸해 버리고 오직 생존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 그들을 ‘조정’합니다. 괴물의 형상으로 변해버린 감염자들의 넘쳐흐르는 생명력을 통해 도대체 보일 감독은 무슨 이야기를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찌 보면 그것은 생명에 대해 이기적인 해석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오만에 대한 경고로도 보입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 죽음에 대한 섬세한 이해 없이, 단지 살려고만 하는 현대인들의 의지. 이와 같은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생명에의 의지를 보일은 추악하게 변해버린 괴물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28일후... 정확히 4주만 지나도 우리는 인간의 본 모습을 볼 수 있고, 인간들이 지녔던 이기적 가치관의 본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감독의 비아냥거림이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이에 반해 황우석 박사의 인간 배아줄기세포 배양이 성공했다고 공포한지 2년여가 흘러간 지금. 과연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얼마만큼의 되물음과 반성을 가져왔는지 궁금합니다. 보일감독은 인간성의 적나라한 모습을 밝히는데 28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너스레를 떨고있는데, 한국사회와 교회는 과연 지난 2년동안 어떤 교훈을 얻은 것일까요?
        
결국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생명이라고 하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애매함이 이 논의의 어려움을 증폭시킵니다. 물론 나름대로 생명(여기서는 인간 생명을 우선적으로 논하도록 합니다)을 어디서부터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는 순간 이미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명의 시작을 꼭 수정란으로부터 잡을 필요가 없다는 발언도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정란이 자궁에 자리를 잡는 수정이 된 후 14일 정도부터야 비로소 생명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태아의 심장이 박동을 개시하는 대략 수정 후 28일을 전후를 인간생명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혹은 태아의 뇌신경이 활동하는 수정 후 60일, 그리고 분만 이후에라야 인간생명으로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 자체가 과학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존재론적으로 확증적이거나 명확한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시점, 특히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타이밍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는 사실 인간 자신이 정할 몫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조물주의 시각을 갖도록 강요되는 역설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논의는 분명하고 뚜렷하게 결정되기 곤란한 성격의 것입니다. 지속적인 논의는 있을지언정 명쾌한 결론을 내리기는 무척 곤란한 문제입니다. 결국 이 논의는 인간 스스로 바벨탑을 쌓고 있다는 자각을 공유하기 전에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코드에 의해 풀릴 공산이 큽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이미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배아줄기세포 논쟁을 통해 경험했습니다.
2004년 황우석 박사팀이 핵치환 인간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이후 한국사회는 한 때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 환상열차에 온 국민이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근거도 없는 33조 국부 창출 및 노벨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등 언론의 호들갑은 무제한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이에 편승하여 누구랄 것도 없이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심으로 황박사 연구팀을 지원해야만 한다는 주문을 읊조렸습니다. 재론의 여지가 없는 당장의 명령으로 온 국민들은 별다른 기준이나 비판의식 없이 황박사와 그의 배아줄기 연구팀에 매몰되어 갔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몇몇 균형 잡힌 언론들과 사회단체들이 인간의 난자를 가지고 하는 배아줄기 세포 연구의 문제점과 그것이 가지는 윤리 문제의 취약성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따져 물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매국노’라는 지극히 비이성적인 딱지뿐이었습니다. 그 후 사태는 반전하여 황박사의 연구 결과가 대부분 실험 데이터의 조작에 의존한 것이었고, 생산되었다고 하는 배아줄기 세포는 그 어디에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게 되면 어느 정도 지나친 관심과 광기는 잦아들고 이성적인 반성의 시기가 도래해야 할 터인데, 작금의 한국 사회는 요상하게도 황박사 지지자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연구 재개만이 타개책이라 외쳐 되는 이해 안 될 형국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되고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좀 더 이 부분을 문명사적 시각에서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황박사 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성적인 대응은 주로 ‘윤리적인 기준’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는 실정법과 연관되는 매우 실질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난자 채취의 투명성과 합법성, 그리고 난자의 도구화와 상업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 등이 이 문제의 중심적인 아젠다를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배아줄기 세포 파동이 던지는 의미는 이미 윤리 문제를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자리에서 인간의 난자 사용에 대하여, 그리고 수정 후 14일 쯤에 나타나는 원시선을 기준으로 생명이다 아니다 등등을 구별 짓는 조물주적 시각에 의지한 논의로 시간을 보낼 어떠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이미 많은 이들이 논의하고 있고, 그 논의의 반복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의미도 없으며, 또한 제 스스로 그 논의의 중심을 차지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그러한 기준과 판단, 그리고 그러한 기술이 가능케 되었던 인류 문명의 흐름을 나름대로 짚어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적 의미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저의 역할과 이 강연의 기능이 자리한다고 봅니다.

우선 저는 이 배아줄기 세포의 문제는 인류가 계몽주의적 사조로 접어든 이후 얻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귀결’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난자와 체세포로부터 축출된 세포핵을 가지고 작업하는 이 연구는 철저히 인간 스스로가 ‘타자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즉 인간이 대상화되고, 그 대상화된 인간을 철저히 해부하고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도구적 이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 작업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성을 도구화시키고, 신적 존재나 신념 혹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은 세계 이해를 비로소 시도한 계몽주의라는 등대가 없었다면, 배아줄기라고 하는 거대한 타이타닉호도 건조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배아줄기 세포의 도전은 인류가 세계를, 역사를, 인간을 ‘양화’量化시켜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착상된 기획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에 살면서도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준비는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중세가 제공한 사고방식에 머물러있으면서, 몇몇 선택받은 이들의 개척에 따라 계몽주의라는 신천지에 내 앉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어쭙잖은 사유의 중층 구조 아래 우리는 혼란과 분열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통적인 존재 이해를 가지고 무척 낯설고 익숙지 않은 세속적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인간을 ‘영혼’, ‘정신’, ‘절대’, ‘가치’ 등등 전통적인 용어들을 통해 설명하고 또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미 우리가 터 잡은 시대는 인간에게서 그러한 가치를 앗아간 지 오래입니다. 칸트의 비판철학으로 이성은 극강의 힘을 얻게 되고, 그로써 계몽주의가 서구 사회의 유일한 패자로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몽화된 인류의 사유는 인류가 펼쳐놓은 문화 전 분야 걸쳐 거대한 지배자가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급속도로 세속화된 사회 속의 시민들로 변신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세속적 계몽주의라는 토대 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해’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근대 학문들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최후의 보루(?)였던 신학조차 계몽화 된 과학주의와 진화주의, 그리고 양화주의에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지금이기도 합니다. 이제 인간에 대한 논의는 인류학이 가져갑니다. 인간도 이제 관찰 가능한 동물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전통적으로 인간을 논하며 이성이 어떻고, 인성이 어떻고, 윤리가 어떻고 하는 등등의 추상적 논의는 이제 인류학자들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기술적 설명에 의해 추방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도 이제 연구의 대상일 뿐입니다. 반복되는 인간의 행위에는 패턴이 있으며 그 패턴에 대한 연구가 결국 보다 과학적인 인간 이해의 길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전통적인 인간론의 논의를 뒤로 물리게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연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전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다움, 혹은 인간성을 논할 때는, 정신을 말하고, 영을 논하고, 때로는 혼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양화된 세계 이해에 기초하여 더 이상 인간의 정신세계를 그렇게 애매(?)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단어에만 맡겨두지 않습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세계를 발견(?)한 이후, 이제 인간의 심령에 대한 전통적인 용어가 구체적이고 수량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terminology들로 바뀌어 갑니다. 그리고 인간 자신의 의식적 진술뿐만 아니라, 무언無言으로 고백하는 그들의 뇌파와 심전도, 그리고 맥박의 움직임이 매우 중요한 인간성 이해의 척도로 이용됩니다.

이렇게 세계는 바뀌었고, 또 그것을 지배하는 생각도 개벽되었습니다. 다만 우리의 대처능력이 바뀐 환경을 제때에 눈치 채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이렇듯 수백 년 전부터 기세를 부리던 계몽주의는 인간을 타자화, 도구화, 대상화시켰고, 그러한 이해 속에서 인간과 동물은 질적으로 다른 존재일 수 없으며, 아울러 그러한 세계관의 연장 속에서 동물 체세포 복제와 인간의 그것과는 하등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미 복제양 돌리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새로운 인간 ‘돌리’의 탄생 역시 내정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를 제어하기 위해 인류는 후발적인 윤리 장치를 설치해두었고, 지속적으로 이 제어기재를 사용하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달라진 사유 환경 속에서 이 문제를 윤리로만 제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곧 인간은 기존의 윤리적 제어장치를 디코딩할 새로운 공식을 제시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이미 우리는 윤리는 상황적이며, 나라와 민족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죽어가는 자의 인륜적 치유 외에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하냐는 거대한 함성의 물결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함성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동조하고 있고, 또 여전히 그러한 함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류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개중에는 성직에 몸을 담고 있는 종교인들이, 또 개중에는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도 그 함성에 편승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달라진 환경을 몸소 경험하고 그에 대한 내성을 키워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타인의 장기를 마치 부속품처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사는 많은 이들을 주변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심지어 몇몇 경우에는 대중 매체를 통하여 장기기증에 대한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으로서 보야줄 수 있는 궁극의 미덕인양 포장되고, 또 칭송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가슴에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심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백여 년 전만 올라가면 마술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을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 그것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를 반복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자연’이 되었고, ‘당연’이 되었고, 또 ‘권고’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가 소유한 세계관이라는 입장에서는) 인간 난자를 이용한 배아줄기 세포 배양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한 인간 복제까지도 가능한 사상적 토대를 이미 완성해 놓은 상태입니다. 암암리에 우리는 인간을 대상화하고, 물상화하는 다양한 시청각 부교재를 보고 듣고 배우며, 우리 스스로를 타자화시키고, 또 이기화시켰습니다.

보다 솔직히 고언하자면, 우리 사회는 이미 이전 우리 조상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 유지되고 있는 ‘나’라고 하는 유기체의 지속 여부이지, 타인의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 세계의 가치관이 그런 방향으로 고정된 이상 그에 따르는 윤리, 혹은 실정법 제어장치는 매우 제한적이고, 또 시한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아무도 타인의 심장을 내게 가져오는 것을 막지 않듯이 수명의 연장이 필요한 힘 있는 이들의 논리에 의해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언제 그 막강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될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몽의 모습입니다. 물론 몇몇의 경우 저와는 달리 여전히 계몽에 대해 긍정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계몽의 의도는 여전히 완벽히 실현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한 반론의 여지를 수용하면서도 전 여전히 계몽이 제시한 인간과 생명에 대한 양화된 이해에는 인간과 인간사회에 우울한 진단을 내리고 싶어집니다.

다행스럽게도 계몽의 시대에도 여전히 계몽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직시하고 삶과 살림에 대한 소리를 잊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계몽시대에 살면서도 인간성과 생명, 역사를 끌어안고 가자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지금은 주변부에 있으며 경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잠시 대대로 인간이 어떻게 생명과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생명이 신비였던 시대
전통적으로 인간은 생명에 대해서는 (죽음과 마찬가지로) 신비의 영역에서 이해해 왔고 그 연원은 신적 존재에 두고 있었습니다. 물론 각 문화권마다 다양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와 관점을 제시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오래 전 인간의 창조와 혹은 인간의 기원을 알리는 많은 신화적 서사시들은 인간의 기원이 ‘인간적’이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오래된 이야기들은 인간의 기원을 신적 존재, 즉 신비의 영역에 두고 있습니다. 현재 인류가 발굴해낸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한 바빌로니아의 ‘에뉴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서사시에는 인간에게 어떻게 생명이 들어왔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각기 쓴물과 민물을 의미하는 티아맛Tiamat와 압수Apsu의 결합으로 최초의 신들이 등장합니다(이 신화는 고대인들이 생각하던 창조의 의미를 친절하게 일러줍니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도 그 선상에서 읽혀질 수 있습니다). 신들의 수가 늘어나고 서로의 관계가 복잡해지고 꼬여지게 되자, 신들의 아버지인 압수가 자신이 생산해 낸 어린 신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압수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결국에는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남편을 잃은 여신 티아마트는 강력한 힘을 지닌 킹구Kinggu를 새로운 남편으로 삼아 압수를 살해한 신들과 일대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킹구와 티아마트가 새로이 만들어낸 괴수들의 기세에 눌린 신들은 결국 마르둑Marduk이라는 젊은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마르둑은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신들 중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을 듣고 싸움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젊고 강력한 힘을 소유한 마르둑은 티아마트를 물리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그 후 승리한 젊은 신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갈라 하늘의 궁창과 땅을 만들게 되고, 킹구의 피와 뼈로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오래된 이야기가 건네고 있는 이야기는 적어도 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 신과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의 피로 만들어진 인간, 그리고 생명. 이렇게 고대 바빌로니아 인들은 인간 생명의 기원을 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이 점은 구약의 전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 역시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창조됩니다. 물론 구약의 경우는 앞서 인용한 바빌로니아의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합니다. 우선 구약의 창조설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P문서, 그리고 J문서라 지칭해왔습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의 다양한 세계관을 접하고 그것에 대한 응대로서 체계화된 신학적 창조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P문서와 P문서만큼의 신학적 내용은 담고 있지 않지만,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창조관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J문서가 그것입니다. 이 두 문서들은 창조의 이야기를 약간 다른 모습으로 기술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 내용의 대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창조에는 신의 역할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기원은 신에 있다’라는 점에서 구약의 생명관도 역시 바빌로니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화려한 신들의 이야기나 영웅담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리고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이야기보다 훨씬 후대에 형성된 사유방식이긴 하지만, 동아시아의 사유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12세기에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도 동아시아 세계의 사상계에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신유학에서도 역시 인간은 하늘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는 존재입니다. 물론 신유학이라는 사유체계는 물질계를 완전히 초극하는 신적 존재를 상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신유학 자체가 실재론적 사유체계이며, 그 점에서는 오히려 유물론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신유학에서는 리理와 기氣로 세계를 설명합니다. 리라고 하는 것에 대해 세밀한 논의와 대응이 필요하긴 하지만,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사물의 질서’oder of things입니다.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구성되는 몸(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형태를 갖춘 모든 사물들)에 부여되는 특정한 질서가 곧 리이고, 그 리는 물질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 기철학자들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또한 이 점에서 신유학은 완벽한 유물론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따라서 이 리라고 하는 점에서 하늘이나 인간이나 심지어 일반 사물들 역시 모두 존재론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이에 대한 주희의 애매함 때문에 조선조의 유명한 ‘인물성 동이론’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신유학의 이기이원론 역시 생명의 근원을 하늘이라고 하는 절대적 존재에 귀속시키고 있음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선택적으로 제시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과거 인류가 지니고 있었던 생명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면 일정한 패턴을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기원은 신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신, 혹은 신적 존재는 생명의 주인이며, 또한 기원이 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이 신에게 있음으로 결국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신과 동일한 본질을 소유합니다. 다만 인간이 신적 존재와 차이가나는 것은 ‘생명력의 한계’입니다. 즉 신은 영원하지만, 인간은 유한하며, 신은 생명을 지배하지만, 인간은 한계 속에서만 그것을 누릴 뿐입니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인간 역시 제한된 생명의 순환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됩니다. 이제 인간 실존은 좀 더 아늑하고 편안한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특정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혹은 신적 존재와의 합일, 영적인 통합, 혹은 구원과 해방 등의 모습으로 구체화됩니다. 이 지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때로는 자연법을 지키고, 혹은 신의 의지에 순종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많은 종교 전통들에서는 인간 실존은 본래 신적인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에 만이 실재적이고 의미 있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신적인 영역은 신, 혹은 신들이 거하는 하늘의 처소이며, 때로는 각기 전통에서 언급되는 문화적인 조상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러한 신적 존재와 인간은 어떤 방식을 통해 서로간의 유대를 이어가게 되는가. 바로 그 점을 해결하기 위해 신화와 상징, 문화적이고도 종교적인 의례와 관습들이 요청됩니다. 따라서 이들 의례적 행위는 인간과 신적 영역 사이의 관계를 지속시켜주고 강화시켜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존재에게 실재감을 보장해주고 생명을 유지시키고 아울러 그것을 완성시켜주게 됩니다.

이와 같은 식의 세계 이해는 꽤 오랫동안 인류 사회 중심에 살아있었습니다. 미숙한 인류의 과학지식과 여전히 부족한 세계에 대한 정보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이상의 것은 이와 같은 신화적 상상력에 의존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 이해에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18세기 이후 상당한 정도의 속도를 내기 시작한 자연과학의 발달에 기인합니다. 이성이 도구화되고, 보편이라는 가치관이 지고의 덕목이 되어버린 시대에 인간은 다양한 문명의 도구들을 통하여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규모의 우주와 추상적 표현 속에서만 언급되던 미시의 세계가 검증적인 데이터들을 통하여 확인 가능한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세계의 변화는 인류의 사고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고, 결국 그것은 새로운 세계 이해를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새로운 신 이해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포스트모던 논쟁의 시작?

돌고 돌아왔지만, 결국 종착지는 눈앞에 있습니다. 배아줄기세포라는 이슈가 던지는 물음은 이미 윤리적 아젠다를 넘어섰다고 저는 앞서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바라보는 그 문제의 지점을 언급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세속적 계몽주의가 우리에게 제공한 다양한 환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전통적인 신 이해를 새롭게 해석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지금 과학계에서 언급되고 있는 논의의 중심에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적 인격신의 모습은 확인하기 곤란합니다. 1999년 영국 한 실험실에서 복제양 돌리가 ‘창조’되었을 때, 이미 전통적인 신관은 위기에 봉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창조의 결과는 결국 신의 위상을 ‘우연적인 전기 자극’으로 추락시켜버렸으며, 그 정도(?)의 작업은 인간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과학적 검증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개 동물인 양이었고, 또 오래 수명을 연장하지도 못한 탓에 지속적인 우리의 관심영역에 남아있지 못했을 뿐입니다.

지금 상황은 핵치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특정 종교의 교리에 심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에 ‘연구를 지속해서는 된다, 안 된다’를 묻는 수준은 넘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복제라고 하는 판도라의 상자는 열어젖혀졌고, 그것을 여는 방법 또한 만천하에 공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향하고 있는 바는 결국 ‘신 없는’無神 시대의 도래일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경황에 생명 윤리에 대한 언급은 너무 미온하고도 제한적인 대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20세기 후반 사상계를 몸 달게 만들었던 포스트모던 논쟁이 자리하고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도구화된 이성은 인간 문화의 구석구석을 비신화하하며 세속화시켜 나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은 자신의 몸을 신비의 영역 속에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조목 조목, 세밀하게 인간 몸에 대한 대상적 탐구가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과 인간 몸에 대한 거대한 양의 정보들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양화적 인간 이해는 생명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이어집니다. 서늘한 이성의 척도 아래 생명 역시 신비의 베일을 벗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이들조차 인간의 몸을 보며 세포를, 장기를, 혈관을 떠올릴 수 있는 개명한 천지에 우리는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 하에 생명을 신의 영역으로 돌리는 행위는 인식이성에 대한 배반이며, 또한 이단 행위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별반 고민 없이 우리의 몸과 생명을 기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연구실에서는 그보다 더 세밀하고 치밀한 서술과 논의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오는 세속적 세계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를 신비로 읽게 하는 습관을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결국 이성이 아는 것만이 진리가 된 세계에서 우리는 이성 이외의 것은 미신으로 낙인찍는 사회에 살게 되었습니다. 일반인조차 수량적 세계이해에 익숙해진 이 환경.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볼 때는 매우 색다르고 낯선 경험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계관 속에 우리는 우리의 몸과 생명을 표준화시키고, 보편화시키고 화석화시킵니다. 이제 장기는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되어버리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은 그것에 가해지는 조작성의 탁월함으로 대체되어 갑니다. 실상 인류는 생명과 죽음을 하나의 덩어리로 엮어서 생각했지만, 수량적 세계관 속에서 죽음은 종말이요 멸절이기에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 현대 세속적 문화 속에는 삶만 남고 죽음은 죽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이러한 동일성과 표준화, 보편화에 대한 기획을 무감각하게만 받아들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계몽주의의 극성과 더불어 인류는 이성만으로는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리도 잊지 않고 내어왔습니다. 그 일단의 선각자들은 인식이성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래 당신은 당신의 모든 행위가 이성에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행동하는가?”
“당신은 오로지 이성으로만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표준화되고 보편화된 존재가 정말 있기라도 한 것인가?”

그들의 질문은 날카롭게 인식이성의 틈새를 파고듭니다. 그래서 칸트가 작업해 놓은 순수이성의 거대한 위세에 보충 개념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합니다. 역사, 경험, 삶, 생명, 즐거움, 감정 등등 조리를 찾기 곤란하고, 이성의 훈육 속에서도 잘 조정되지 않으며, 때로는 규칙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을 제시하면서, 오히려 그러한 덕목들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생명을 더 생명답게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기계화되고 양화된 세계에 질적 틈새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설교를 반복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딜타이, 니체, 베르그송, 바슐라르, 푸코 등등 적지 않은 이들은 바로 그러한 ‘살아있음’의 비연속성, 일탈성, 그리고 불규칙성을 과감히 인정하고 수용하며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문법을 찾기 위해 애를 썼던 것도 기억합니다.

문제는 새로운 신관?
이제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작금 한국 사회에서 비롯되고 있는 생명윤리의 논쟁은 그 지향점이 결국은 세계에 대한 이해, 신앙인들에게는 신에 대한 문제로 귀결될 것입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생명공학을 위시한 과학계의 진도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에 대한 시각 교정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과학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도전받을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러셀 경의 “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Why am I not a Christian?(1957)라는 작품은 그에 대한 선구적인 작업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계 내에서는 과학화되고 세속화된 현대인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소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것도 기억합니다. 바르트가 그랬고, 불트만이 그랬고, 틸리히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과정신학을 비롯해 많은 현대 신학들이 세속화된 과학사조와 신학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 지금도 꾸준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변화된 환경 속에 이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할 주체들마저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제대로 진단하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그리스도교는 지금껏 경험했던 것보다 더 심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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