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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10월 21일에 있는 한국문화신학회의 논문발표 시 논찬을 맡아서 작성한 글입니다. 각주까지 달려있는 정교한 글은 pdf파일을 참조하세요 *


“천당,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논평

논찬자: 이 길용 박사(종교학)

1. 좀 더 명확한 비교 대상의 시공적 한계 설정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푸코는 그의 저명한 논문 “니이체, 계보학,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계보학적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계보학은 회색빛이다. 그것은 수많은 자료들, 지금은 거의 다 지워져 그 내용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져 버린, 그리고 세파에 긁히어 군데군데 찢겨져 있는, 또한 이미 여러 번에 걸쳐 겹쳐 쓴 양피지로 만든 고문서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하는 지나칠 만큼 세심하고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왜 푸코의 이야기를 꺼내는가? 왜냐하면 본 논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논문은 그 맥락상 계보학적 서술을 학술적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와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들로서 ‘선택된’ 동아시아, 좁게는 한국의 재래 종교전통의 ‘천당’ 혹은 ‘천국’이라는 개념에 대한 계보학적 추적이 이 논문의 주된 과제이기 때문이다.

논자의 이러한 시도는 타당하며 또한 한국이라고 하는 다종교적인 환경 하에서는 대단히 필요한 작업이라는 것에 논찬자 역시 깊게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보학적 연구의 수행을 위해 우리가 전제 조건 목록 중 최상위의 위치를 점해야 할 것은 바로 분명한 ‘비교의 영역 설정’이다. 이미 공간적으로는 ‘한반도’라는 것이 분명하게 적시되어있으므로, 그 다음 단계로는 ‘시기적인 제한’ 내지는 비교되고 있는 개념들의 시대사적 환경에 대한 언급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스도교 이외에 비교의 대상이 되는 재래 종교들로서 본 논문은 무속, 불교, 조선의 유교를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유교 이외에 거론되고 있는 종교전통의 구체적인 시기 확인이 논문 자체 내에서는 곤란하다. 그로인해 논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계보학적 지도를 그리는데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물론 논문의 큰 구도에서는 소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조금만 더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있었음 하는 아쉬움으로 지적해 본다.

우선 무속의 경우 극명하게 이 문제에 직결된다. 즉 대부분 무속의 저승관이나 내세관 등은 불교 교리에 의지해서 정리되고 있다. 따라서 제대로 시대를 잡아내지 않는다면 그 의미에 대한 계보학적 추적이 실패할 수도 있다. 즉, 언제, 어디, 누구에 의해 발설된 巫歌이냐? 혹은 세계관이냐에 따라 무속에 대한 해석과 분석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세밀한 시공적 제한 혹은 제시가 없이 행해지는 무속 혹은 무교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은 비교를 위한 패러다임 설정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        
  
2. 과연 논문의 대전제와 그것을 위한 비교 대상의 선택은 적절했는가?

논자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들을 통해 본 논문을 통해 얻고자 하는 소기의 목표의식을 노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왕적 통치, 왕적 존엄, 왕권 등을 의미하며, 장소적인 의미로서 천국이나 왕국이나 나라 등은 이차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이점이 내세적인 장소적인 의미로서 극락이나 정토나 저승이나 천당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극락정토나 저승이나 천당은 전적으로 사후의 세계로서 ‘초월적 장소적 내세관’의 표상이지만 미륵신앙이나 정감록 등의 후천개벽신앙은 전적으로 미래에 이 땅에 이루어질 이상적인 통치에 대한 ‘종말론적 유토피아’의 표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출현과 공생애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앞당겨 이루신 선취의 사건이기 때문에 재래 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의 영혼이 들어가는 제한적 물리적 장소로서 천당’이나 ‘전적으로 미래에 이루어 질 유토피아의 세계’와도 다른 것이다.”

분명 논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를 상징하고,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내세에 ‘죽은 자’들이 이동해야 할 ‘공간적 개념’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재래 종교의 천당, 혹은 극락정토(혹은 서방정토) 등과 같은 개념들은 사후의 공간적 개념이기에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와는 구별이 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다른 종교들은 논 외로 하더라도,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극락정토, 혹은 서방정토는 그 묘사하는 것이 시공적 성격이 강한 일종의 이상화된 낙원을 의미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본래적 사상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서방정토는 아미타불 신앙이 강한 정토종에서 그리고 있는 불교적 이상향이다. 하지만 여기서 시공적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는 서방정토는 불교의 핵심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반드시 사후에 가는 시공적 개념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실체적 세계이해로부터 탈피하여 세계가 空(śūnya)하다는 것을 깨우친 이후, 즉 無我說(anātman)을 깨우침으로써 얻게 되는 涅槃(nirvāna)의 기쁨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極樂(sukhāvatī)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지고의 기쁨’인 것이다. 따라서 정토종에서 묘사하고 있는 서방정토의 이미지는, 논자가 12쪽에서 언급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거룩한 도성’에 대한 신약 성서의 묘사와 ‘동일한(혹은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아설을 강조하는 깨달음의 종교 불교가 굳이 사후의 이상적인 시공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을까라는 본질적인 물음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논자가 사용하고 있는 전통 재래 종교의 개념들에 대한 정치(精緻)한 이해가 본 논문을 통해 제대로 표출되고 있는 지 조심스레 반문해 본다. 아니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이 가지는 독특성을 강조하고자 조금은 무리가 있을 법한 비교의 대상들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비교의 대상은 적어도 그 지향하는 바가 일정한 정도의 ‘동일한 레벨’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불교의 극락정토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비교하기 원했다면, 불교의 이상적인 교리에서 언급하는 ‘극락정토’를 가지고 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논자가 지적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소유한 ‘하느님 나라’라기 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이상적인 교리 내용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에서의 서방정토는 후대 많은 민중들에 의해 신앙의 대상 그 자체가 되어간다. 그리고 종종 사후에 불교 신앙인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시공적 의미가 강한 곳으로 받아들여진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적 불교신학적 교리라기보다는, 대중들에 의해 일정부분 혼합되고, 타협된 토착적 불교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시공적 개념으로 해석될 성질의 것이 아님은 신학적으로 분명하지만, 그 역시 이상적인 교리 상에서의 이야기다. 대부분 일반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나라를 죽어서 갈 수 있는 그 어떠한 곳, 즉 시공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때로는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 신앙생활의 주요한 에너지원을 삼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교의 대상은 이상적인 교리로 할 것이냐, 아니면 일반적인 신앙인들의 신앙행태 속에 수용되는 개념들로 할 것이냐를 분명히 정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논문은 그 비교의 대상을 상이하게 선택함으로 인해 비교의 정밀함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본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에서는 이상적인 교리 내용을, 그리고 다른 종교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실생활 속에서 일반 신도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신앙적 내용들을 비교하게 되면, 그 비교의 결과물에 대한 신뢰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몇 가지 소소한 지적들

최근 한국의 샤머니즘은 해당 연구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무나 혹은 무교로 불린다. 따라서 그것을 ‘무속’이라 지칭하는 논자의 한국적 샤머니즘에 대한 학문적 시각을 어느 정도 논문 안에 노출시키는 친절함도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각주 10번에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namo amitayus/amitabha buddha)을 ‘헤아릴 수 없는 광명에 귀의합니다.’ 내지 ‘헤아릴 수 없는 생명에 귀의 합니다’라는 뜻으로 풀고 있는데, 문자적인 의미로는 ‘아미타불께로 귀의 합니다’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의미상 아미타라는 이름 자체가 無量壽(amitaayus, 헤아릴 수 없는 생명) 혹은 無量光(amitabha, 헤아릴 수 없는 빛),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한량없는 생명, 혹은 한량없는 빛이라는 뜻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기에 틀렸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것들은 아미타라는 이름에 대한 중국식 의역 표현이므로 정토종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아미타불을 생각할 때에는 ‘아미타불께로 귀의 합니다’로 번역해주는 것이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4. 조심스러운 질문 혹은 제안?

논찬의 큰 줄기와는 밀접한 상관성이 없기는 하지만, 논찬자의 궁금증을 인내하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작은 질문을 제기해 본다.

논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아버지의 의를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지는 것으로 가르쳤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출현과 공생애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앞당겨 이루신 선취의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언급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현존 ‘양상’에 대한 기술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논찬자 역시 논자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십분 이해하고 또 원천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기술된 내용으로 봐서는 역시 ‘하느님의 의’를 준행하고 또 성실하게 따르고자 했던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그 구분이 그리 명확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논자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의를 의라고 여기고 있어서” 문제였다고 설명해주고 있지만, 율법(torah)이라는 것도 실상 유일하신 야훼로부터 기인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하느님의 의’, 혹은 ‘하느님의 뜻’의 구체적 표현이라 본다고 해도 무방하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예수는 바리새파 식의 신앙행태와 하느님 신앙에 대해서 무척 비판적이었음을 복음서 기자들은 꾸준히 증언해주고 있다. 이 부분을 어찌 해결해야 할는지 좋은 지혜의 말씀을 구하고 싶다. 단순히 율법, 구원이라는 도식 외에 과연 예수가 생각하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스타일과 내용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이 질문의 가장 큰 동기라 할 것이다.

좀 생뚱맞긴 하지만, 종교학자로서 논찬자가 이 부분에 대한 최근의 단상은, 혹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실천적인’ 혹은 ‘수양론적인 발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이야기한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는 언어와 개념, 혹은 신조 속에 갇힌 화석화된 하느님에 대한 신앙적 내용을 암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경험’ 내에서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증득’하라는 또 다른 의미의 실천적, 수양적 의미가 담긴 발언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보는 것이다. 물론 추측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적절한 비교의 짝을 동아시아 종교전통에서 찾아본다면, 동학의 ‘侍天主’가 어떨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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