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05.02.28 14:10

종교(Religion)

조회 수 1725 추천 수 22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종    교
(Religion)

우리는 지금 종교라 하면 특정한 교리와 신앙체계, 그리고 의례들을 갖춘 폐쇄적인 공동체를 생각한다. 따라서 종교 혹은 종교들은 이 세상에 다양하게 존재해 왔고, 또 현존하고 있다고 여긴다. 또한 그러한 ‘종교들’(과연 ‘종교’란 말이 복수가 가능한가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은 기독교, 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 조직, 혹은 종교적 실체를 지칭하는 말로 의심 없이 사용되어진다. 아울러 우리는 ‘기독교는 종교이다’라는 명제를 아주 당연시 여기고 또 그 명제의 진위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성서를 살펴보면 의외로 이 ‘종교’란 단어가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구약에서 ‘종교’란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야웨의 경외’(yirath Yahweh)라는 표현이 본래적 의미상 종교란 단어에 가깝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신약에서는 구약과는 달리 몇 차례 ‘종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사용되어지고 있긴 한데, 이 또한 대부분 ‘신앙’을 지칭하는 ‘πίστις’라는 단어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특징적인 규범적 행동양식을 지닌 종교적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θρησκεία’(행 26:5; 약1:26, 27; 경건, 의식, 의례, 관습)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종교’란 단어가 가지는 성서에서의 낮은 사용빈도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 단어가 가지는 ‘본래적 의미’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케 한다. 그 궁금증에 대한 하나의 해결을 위한 시도로써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우선 동아시아 전통 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어 ‘종교’(宗敎)의 유래를 밝히고, 그 다음으로 기독교 전통에서 사용되는 ‘종교’(religion)란 단어의 계보학적 의미를 추적해보도록 한다.

우선 한자어 ‘종교’(宗敎)는 번역어이다. 이 단어는 19세기말 일본의 선승(禪僧)이었던 스즈끼 젠꼬(鈴木全子)가 ‘religion’이라고 하는 서양 단어를 그렇게 번역함으로써 한자문화권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어졌다. 하지만 ‘종교’란 단어는 그 전부터 이미 불교의 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본래 이 단어는 수(隋)의 승려 지의(智懿; 538-597)에 의해 『법화경(法華經)』을 근거로 하여 천태종의 교리를 ‘오중현의(五重玄義), 즉 석명(釋名), 변체(變體), 명종(明宗), 논용(論用), 판교(判敎)’로 체계화 할 때,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진리’란 의미로 宗과 敎를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단어가 후에 서구어 ‘religion’의 번역어로 채택되었고,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宗敎)란 단어의 시작이다.

서구 전통에서 종교란 단어는 라틴어 ‘religio’로부터 유래한다. 이 단어는, 여전히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어떤 특정한 관습이나 의례의 외적 준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더 나아가 의례 자체 보다는 그 의례를 준수할 때 대상으로 삼는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경건’과 ‘성실성’, 더 나아가 그 초월적 존재와 우주 전체에 대한 예배자 혹은 신앙자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기독교 역사 내에서 종교란 단어의 최초 쓰임새와 본래적 의미를 보다 명확히 살펴보기 위해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사용했던 이 단어의 의미와 용례를 살펴보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사용한 종교란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그의 저술 중의 하나인 “De Vera Religione”라는 책의 제목을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On the True Religion”이라 바꾸려 할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참된 종교’로서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적 실체’에 대해 이미 ‘일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그의 책 안에서 ‘기독교’라는 명칭을 찾아보기란 무척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의 책은 기독교라고 하는 특정한 제도적 종교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수려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종교’란 특정한 의미나 신조의 체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제도화되어 외부에서 관찰 가능한 공동의 역사적 전통을 지닌 조직체를 가리키는 것 또한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랑과 찬란한 빛 안에서 행해지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생생한 ‘인격적인 조우’를 그는 ‘종교’라 표현했다. 따라서 그의 책은 ‘올바른 경건성에 대하여’ (On Proper Piety) 혹은 ‘진정한 예배에 관하여’ (On Genuine Worship)로 번역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에벨링이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의 구분이란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판단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 내에서의 문제라고 말한 대목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를 외부적 조직이 아닌 경건성과 종교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아퀴나스는 그의 저술 속에서 ‘religio’를 ‘하나의 영혼의 활동으로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를 향한 신앙인의 충동’으로 보았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종교개혁시기까지 계속 이어져 온다. 이는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칼뱅(1509-1564)이 저술한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1536)란 책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의 강요’라는 의미라기보다는-보다 엄격하고 정확히 번역하자면- “그리스도적 경건성의 기초” 혹은 “그리스도적 경건성의 구조”를 뜻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라고 하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에는 지금은 상식처럼 되어있는 객체화된 혹은 실체화된 외부의 역사적 전통 조직에 대한 배려는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종교’란 용어는 개개인의 '신앙적 경건함'과 '절대자에 대한 태도'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어져 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종교란 단어의 의미가 작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듯이 ‘외부적 특정 신앙적 조직체’라는 뜻으로 전용된 것은 대략 17-18세기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17-18세기 이후 몇몇 종교집단간의 치열한 갈등과 충돌, 그리고 계몽주의적 주지주의의 득세, 아울러 지리상의 발견 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 이외 지역에 현존하고 있었던 비기독교적인 종교적 전통들에 대한 정보로 인하여 이제 ‘종교’란 단어는 점차 객체화되어 특정한 교리와 전통을 공유한 폐쇄적인 공동체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진다. 그 후 우리는 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과 같이 독립되고 객체화된 종교개념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종교전통들에 대한 명칭들은 철저히 서구 중심적이며, 실상 그것들이 지칭하는 구체화되고 실체화된 종교전통들은 현존치 않는다고 보는 것이 보다 검증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교는 예외로 한다 하더라도(이슬람이라는 명칭은 ‘신에게 복종하는 자’라는 의미이며, 세계 여러 종교들 가운데 독특하게 외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슬림들 자신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힌두교 같은 명칭은 서구인들에 의한 인도의 다양한 종교문화전통을 지칭하기 위한 잠정적이고도 작위적인 이름의 대명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말은 인도 문화 전통 내에서 힌두교라 불릴만한 공통적인 그 무엇은 존재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라고 하는 명칭은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도적 경건함’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17, 18세기 이후에도 종교를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 혹은 동일한 종교적 사상을 함주한 조직체로 조망하려고 하는 주지주의적 종교이해에 반기를 든 학자들도 있었다. 슐라이어마허(F. Schlerermacher; 1768-1834)와 루돌프 옷토(R. Otto; 1869-1937)가 그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이들은 종교의 본질, 혹은 핵심적인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그리고 이성적인 것으로만 보기 보다는, 인간의 종교성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 유명한 슐라이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Gefühl schlechthinniger Abhängigkeit)과 옷토의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가 등장한다. 옷토는 특히 기존 윤리적 의미로만 해석되어왔던 ‘거룩’의 의미를 오히려 종교의 본질을 이루는 ‘피조물적인 감정’, 혹은 ‘누멘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종교의 의미에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들은 이전의 칸트적 종교이해인 윤리성에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요소를 첨가하여 일종의 ‘종교성 보편주의’ 혹은 ‘종교적 상대주의’로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들로 인해 촉발된 종교적 상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신정통주의의 대표자 바르트(1886-1968)의 종교관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적 보편주의 혹은 상대주의가 기독교의 특수성을 부정하고, 기독교도 많은 세계 종교 중의 하나로 전락시킨다고 이해한 바르트는 종교를 ‘불신앙’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설파하며 다시 기독교의 절대성을 복원시키기 위해 경주하게 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종교’란 철저히 인간학적이고, 내재적이고 세속적인 현상이며, 따라서 그런 의미의 종교는 인간의 편에 속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종교란 절대적인 ‘신적 계시’로부터는 동떨어진 정반대의 자리에 서있는 것으로 본다.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종교적 체험을 강조한 슐라이어마허와 옷토, 그리고 계시와 신앙을 재확인하고 있는 바르트 역시 기존의 제도화된 종교이해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며 다소간 종교란 용어의 본래적 의미에 좀 더 다가선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에게서는 어원론적인 분석과 용어에 대한 계보학적 지적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종교라고 하는 것을 제도로서만 파악하려 들지 않고 종교에 귀의하고 있는 이들의 ‘자세’나 혹은 ‘고백’으로 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본래적 의미의 ‘종교’에 충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근대이후 태동한 종교학이란 분과학문에 의하면 종교란 용어의 정의는 작업 가설적인 한계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종교란 용어는 분명한 개념으로 정의내리기가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단지 연구자의 필요에 의해서 가변적으로 내려지는 잠정적 정의는 존재하지만, 불변적인 개념 규명은 사실상 곤란하다는 것이 작금 종교학계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 중 몇몇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의미를 세분화하여 ‘종교적 체험’(religious experience or personal faith)과 ‘(종교적) 축적적 전통’(cumulative tradition)으로 구분해서 보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껏 너무도 축적적 전통에 의존한 종교이해가 오히려 종교의 본질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종교의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종교적 경험에 있고, 그것은 곧 그들이 신앙하고 있는 절대자에 대한 한 인격자의 총체적인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그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1.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