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02.07.12 18:52

최후의 만찬

조회 수 1503 추천 수 19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최후의 만찬

시작하면서...

오늘 이렇게 예배의식 중에 행하는 만찬례가 아닌 예수의 만찬을 하는 이유는, 설익은 우리의 반복적인 그리고 습관적인 성찬 참여가 오히려 성찬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지는 않는가 란 노파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을 통하여, 비록 예배 중의 성찬식은 아니지만, 이 천년 전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께서 행하신 만찬의 의미를 차분히 되새기며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분의 의미를 꼼꼼이 읽어보고자 합니다.


두가지 전제

우선 오늘 우리의 만찬례는 두 가지 전제 속에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예수가 행하신 만찬례가 과연 유월절 만찬이었는가 아니면 일상적인 만찬이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입장정리입니다. 여전히 공관복음의 증언을 따라 예수의 마지막 저녁식사는 유월절 식사였다는 주장이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Jeremias, Pesch, Holtz, Gnilka, L gasse). 그러나 오늘은 니산 14일 저녁 이별만찬이었으리라는 또 다른 설을 따르기로 합니다(Schnackenburg, Blank, B sen, Brown, Perrot). 그날을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서력으로 환산하면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쯤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약속이고, 두 번째 전제는 신약성서에 기록된 만찬기에 대한 우리의 입장정리에 관한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모두 네 군데에 예수의 최후만찬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6,26-35, 마가 14,22-31, 누가 22,15-34, 고전 11,23-26). 여기서 우선 우리는 마가복음과 고린도 전서에 기록된 최후 만찬기를 보다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려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태복음의 기록은 마가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으로 보이기에 전승사적인 가치는 극히 약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누가의 경우에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전승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 부분은 사실 미약한 편이고, 보다 투명하게 바라보자면 마가의 기록과 고린도 전서의 기록의 혼합형에 가깝다고 보기에 전승사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사료는 마가와 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기록입니다.


하나의 전 이해-유대교의 회식관습

예수의 최후만찬 역시 유대교의 관습적인 회식의 하나였습니다. 보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예수의 최후만찬은 언제나 그렇듯이 변함없이 지속되던 유대인들의 저녁식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의 저녁식사는 곧잘 친목회 성격이 강하게 부여됩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때나 경축일이 시작되는 저녁 때 이러한 친목잔치를 열곤 했습니다. 여기 그들이 행했던 저녁식사의 절차를 간추려 봅니다.


본 이해-예수의 최후 만찬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 예수는 예루살렘 어느 친지 집 이층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그에게는 마지막이 될 저녁식사를 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마가 14,22-25]과 [고전 11,23-26]에 사료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즉 마가와 바울도 이미 정착되기 시작한 교회의 만찬례를 통로로 해서 예수의 최후 만찬기를 작성하였기에 곧바로 이들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들에 대한 철저한 비교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 예수가 행한 만찬의 윤곽 정도는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내 몸" - 떡에 대한 이해

* 마가 14, 22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 고전 11, 23-24 :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마가의 경우...

위의 두 성서 기자는 유대교 회식 중 전식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승되어오는 과정에서 생략되었을 것입니다. 본식으로 들어가 가장이나 주빈이 둥글넓적한 큰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드린 다음 손님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작을 예수 역시 그대로 답습하고 계십니다. 다만, 빵을 떼어주면서 하신 설명어가 기존의 의례적인 치사와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빵을 주시면서, "이는 내 몸입니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가 쓰시던 아람어라고 하는 말에는 "-입니다"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하신 말을 보다 직설적으로 풀어보면, "이는 내 몸"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내 몸"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람어는 사물의 한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의미하는 제유법적 표현이 아주 강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이 언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주변환경의 움직임이 자신에게 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피부로 직감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토해낸 언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바울의 경우...

바울의 기록에서는 보다 신학적으로 숙성된 표현이 나타납니다. 바로 "너희를 위하는"이라고 하는 부분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표현의 삽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대속죄적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누가에게는 더 강하게 나타나,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누가 22,19)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들, 즉 바울과 누가의 표현을 통하여 이미 예수의 죽음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학적 이해의 단면을 살펴 볼 수 있게 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자신들을 위한 대속적 사건으로 이해했고, 또 그러한 시각의 연장 속에서 예수의 최후만찬을 전승한 것입니다.


무슨 떡인가?

여기서 성서기자들은 예수께서 사용하신 떡을 '아르토스(artos)' 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빵, 즉 누룩이 들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누룩이 들어있지 않고 유월절에 사용하는 무교병은 '아주모스(azymos)'라고 다른 표기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행하신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떡은 누룩이 들어있는 일반적인 떡이며, 이런 전거들은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이 아닌 유월절 전날의 일반 저녁식사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내 피" - 포도주 잔에 대한 이해

* 마가 14, 23-24 :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고전 11,25 :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후식에 이르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회식절차에 따라 찬양의 잔(고전 10,16)을 들고 긴 찬양기도를 바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주시면서, 돌려가며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잔은 10여명 이상이 돌려가며 마실 수 있는 큰잔이었을 것입니다. 개인용 작은 작을 사용하던 유월절 식사와는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포도주 잔을 돌리시면서 하신 예수의 말씀은 이전의 떡을 나눌 때 못지 않게 파격적이었습니다. 허나 불행히도 그 파격적인 예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는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다른 예수의 설명어를 앞에 두고 고민하게 됩니다. 과연 어떤 것이 보다 예수의 언어에 가까운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앞서 분병의 사례를 통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떡을 떼시며 "이는 내 몸"이라 발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은 예수께서 모국어로 쓰시던 아람어의 구조에도 적합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포도주에 관한 설명어도 '해석된' 바울의 그것보다는 "이는 내 피"라고 한 마가의 채록이 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피, 역시 아람어의 제유법적 특성으로 미루어본다면 예수 자신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그분은 이 언사를 통하여 자신의 살신성인(殺身成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가가 사용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4, 8에 나오는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라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야훼와의 계약관계, 그리고 이사야 52,13-53,12절("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 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에 등장하는 '야훼의 종의 노래'를 인용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구원론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여기에 반해 바울이 표현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신학적 견해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기원전 6세기 예레미야 예언자(렘 31장)와 에스겔 예언자(겔 15장)가 이스라엘이 멸망한 때 희망의 지표로 예고한 새로운 계약이란 표상을 빌려왔다고 보여집니다. 여기다가 피를 마시거나 먹는 것을 금기시 하는 이스라엘의 풍습을 존중하여 '이는 내 피'라고 하는 표현을 '이 잔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입니다' 라고 달리 표현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그리스도

고전 11, 26 :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가 정리한 만찬에 대한 최후 진술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만찬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위에 인용되어있는 바울의 문구를 눈여겨본다면 우리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기독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그냥 배부름으로만 멈추어서는 안되고 떡과 잔이라고 하는 상징물을 거쳐 부활하신 예수를 우리 가운데 기억을 통하여 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과거). 아울러 지난 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죽음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현재). 그리고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로 그분이 다시 우리 곁으로 오실 그 때를 소망하는 것입니다(미래). 따라서 성만찬은 어제의 예수를 기억하고 오늘의 그리스도를 기리며 내일의 주님을 기다리는 "예수잔치"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 벌이는 한바탕 정겨운 축제 한마당인 것입니다.

  1.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