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02.07.06 02:12

종교간 대화에 대한 '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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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서강 종교연구회 주제토론방에 실은 글이다.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 최초로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으로서의 최소한 책임감때문에 쓴 글이었다. 아래 호영이의 글도 있고 해서 여기에 다시 한번 옮겨본다 *


독일의 이길용입니다.

웬만하면 이곳에 글을 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럴만한 여유도 없고 또 그럴만한 동기도 유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허나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서 게시판에 최초로 글을 남긴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의 입장 표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몇 가지 언어만 남겨두려 합니다. 아마도 이 글이 이 곳에 보내는 저의 제대로 된 처음이자 마지막 글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개방된 분위기에서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투철한 논쟁의 마당이 허락된다면, 다시금 전투적 토론에의 열정이 저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식의 (일방적인 혹은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 토론은 별반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우선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난 글들 속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경일님의 오류들입니다. 몇 번의 문답을 통해 이미 '전 지구적'으로 뻗어가 있는 선배들이 그 문제들을 지적했음에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일님의 오류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2. 논리적인 글 쓰기의 실패
3. 정확한 개념이해의 실패
4. 학문함의 자세와 방법론과의 혼돈
5. 정서적인 학문함이 보여주는 폐혜의 전형적인 한 사례

우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런던의 이호영군이 보내온 글에 대한 답장에서 너무도 선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글에서 경일님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그런 '고도의' 관용에 합리적으로 이른 것은, 첫째, 그것이 가톨릭이건, 프로테스탄트건, 최소한 말은 통하는 Christendom이 2천년은 지속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가난한 나라를 착취해 누리는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종교라는 기호품 없이도 즐길 구석이 많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 Christendom 안에서도 불과 몇 세기 전 까지 종교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제국의 선교사들이 이식한 (그것도 겁나게 배타적 속성을 부여하며 전파한) 몇 백년 안팎의 역사를 가진 비서구권의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의 갈등에, 무관심에 따른 관용이 현실적 해결방안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 서구인들이 지닌 다른 종교에 대한 무관심은 종교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멀지 않은 것 같고, 차가운 계약으로 지탱되고 있는 그 사회적 분위기가 그리 인간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구요..."

당시 런던의 이호영군은 경일님의 종교학의 '사명' 중의 하나로 '종교간의 대화'를 언급했을 때, 그러한 종교간의 대화는 실무자의 몫이지 학자의 지향해야 할 일이 아니라며 영국의 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은 그에 대한 경일님의 반박으로 등장한 것이었구요... 그런데 이미 유럽에서 5년 6년 살고있는 우리들의 눈에 경일님의 이야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것입니다. 우선 구체적인 현상을 놓고 사례를 든 사람에게 경험해 보지 않는 사실을, 그것도 이천년 이상의 시간적 공간적 공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그처럼 단언적으로 주장해댈 수 있는 용기가 가상은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경일님의 유럽사회 분석에 대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물어온다면 무어라 답변하시겠습니까? 더군다나 얼마나 유럽사회에 대해서 정통하시기에 그 쪽 사회분위기가 그리 인간적이지도 또 매력적이지도 않는다는(않을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경일님의 표현은 분명 '않구요..'였습니다) 결론을 과감히 설파하시는지요... 유럽에 살고있는 제 눈에는 오히려 한국의 분위기가 전혀 인간적이지도 또 매력적이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제 극히 주관적인 판단('한국사회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라고 하는)을 경일님처럼 일반화시켜 공개적인 게시판에 옮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극히 주관적인 제 감상의 한 단편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 사회가 종교에 관심이 없다 있다 를 그렇게 쉽게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도 저는 회의적입니다. 종교학을 공부하시는 분이 그렇게 정언적인 명제와 연역적인 판단만을 주장하고 계시다면 '조금은' 모순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3세계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1세계에 대한 가슴아픈 사연을 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처럼 한 잔의 막걸리와 더불어 쏟아낼 수 있는 말과 학인(學人)으로서 정돈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되리라 봅니다. 그런 점에서 경일님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학인의 자세로서는 결코 온당치 못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논리적인 글 쓰기'의 실패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서강 종교연구회 홈피에 어느 분인가 상세히 설명해 주셨기에 세세한 논의는 생략하려고 합니다. 단지 저는 경일님이 구사하고 있는 비유와 설명의 방법에 있어서 자꾸 서로 상이한 패러다임들이 하나의 틀 안에서 혼용되어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는 경일님의 글에 자주 노출되는 논리의 비약과도 연결됩니다. 이는 역시 호영군의 글에 대한 답변형식의 글 속에 등장하듯이 종교간의 갈등의 해결책이 종교간의 대화라고 하는 식의 경일님의 글에서 농후하게 나타납니다. 앞서는 작금의 종교간의 갈등이 종교 외적인 문제에 기초한다고 분명히 설파하고 나서 뒤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은 종교적 대화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왜 그러한 대안만이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부분은 생략되어 있으며, 또 현장에서 총을 갈기고 있는 당사자들이 왜 어찌 종교적 광신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없습니다. 그저 막연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 어느 누구도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명제를 마치 당연한 사실처럼 확대 해석하는 무모함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은근 슬쩍 확대되어 버린 종교적 대화가 의미하는 바는 또 무엇인지요? 그처럼 설명되지 않은 채 용어자체가 탈바꿈해서야 학인의 글이라고는 보기 곤란하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그 출처도 불분명한 종교적 대화라니요? 오히려 종교간의 대화가 더 분명한 자기명료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미 다른 분이 상세한 토를 달아놓았기에 이 정도의 언급만으로도 제 의도는 십분 이해되었으리라 봅니다.

세 번째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확한 개념이해의 실패입니다. 한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 종교를 대상으로 하는 종교학적 작업이 "대화"입니까, 아님 "비교" 입니까? 여기서 분명히 지적해야 할 부분은 바로 경일님은 비교와 대화를 단순한 일치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아닌가 라는 의구심입니다. 이는 경일님이 지금까지 올리신 대부분의 글 속에서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사실 지금도 많은 논의와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현대 종교학 역시 이 "비교"라고 하는 덕목은 학문적 방법의 하나로서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화'는 문제가 좀 달라집니다. 비교와 대화는 분명 다른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종교를 연구함에 있어서 체계적이고 현상학적인 시각을 도구로 하여 드러난 종교적인 현상을 비교적으로 분류, 체계화 또 이해 가능한 그 무엇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학인(學人)으로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는 전혀 다른 세계의 것입니다. 대화는, 영국의 이호영군이 이미 수차에 걸쳐서 지적하고 있듯이, 실질적인 문제요 구체적인 사태이기에 학인의 작업이라기 보다는 실무자들의 몫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묻습니다. 경일님이 말하고 있는 "대화"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내포하는 바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혹 제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비교"라고 하는 용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요? 만약 그렇담 이 문제는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종교학은 여전히 비교를 하나의 방법으로서 차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일님의 대화와 비교를 혼동한 것이라면 지금까지의 논쟁은 하나의 넌센스요 코미디일 가능성이 농후해 집니다.

이는 곧바로 학문하는 자세와 그 방법론에 대한 혼돈으로 이어집니다. 자꾸 스미스의 경우와 에디트 터너의 예를 들면서 "내적 대화" 내지는 "종교적 경험"에 대한 '내면적 이해' 등등 '검증하기' 곤란한 언어들을 난사하고 계시는데.... 그들의 언어가, 즉 스미스나 터너가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내적 대화가 그들만의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 개념이 혹 종교를 연구함에 있어서 관찰자 개개인이 믿는 자들에 대해 가져야 할 편견 없는 '따뜻한 시선 갖기'라면, 저는 이 문제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곧 학문하는 이의 주관적이고도 내면적인 여러 자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극히 주관적인 자세가 꼭 그들의 학문적 성과의 도출을 위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방법론으로 곧장 고양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에는 극히 회의적인 시선이 도처에서 시시각각 제기될 것입니다. 제 견해에는, 그들이 그렇게 종교에 대해서 주관성을 강조하였던 것은 편견으로 사무친 관찰자에 의해서 고유한 개인의 신앙이 왜곡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 기초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곧바로 한 개별학문의 방법론 중의 하나로 읽어내는 경일님의 '의지'는 조금은 비약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개별과학이나 학문에 속해있으면서 그러한 주관적인 느낌이나 자세를 학문적 방법론으로 이용하는데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무척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관적 감상에 자신의 학문을 내어 맡기는 순간... 그는 곧 '문학가'가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학이 검증과학으로서, 인문학으로, 엄밀한 과학적 학문으로서 자리하는 한, 그러한 감상적, 문학적,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기준들을 자신의 방법론으로서 차용하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엘리아데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요.... 종교학을 문학평론과 혼동하였다는 루돌프 오토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물론 이에 대해서도 논란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최근 독일 종교학계에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내용입니다). 글쎄 미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독일 내의 종교학 전통은 역사 비평적인 방법 하에 검증 가능한 영역 내에서의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베버류의 종교사회학적인 흐름도 무시할 수 없는 한 부류이긴 하나.... 그들 역시 경일님이 언급하고 있는 류의 '내적 대화'에는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함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오래 전 지적한 '파리통 속에 빠진 철학자'들처럼... 그렇게 주관적인 잣대를 객관적 학문의 방법으로 삼을 때 오는 한계를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에 대한 진지한 자세 내지는 태도를 요청할 때 외에는 그러한 단어를 학술적인 용어로 사용조차 잘 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학을 문학으로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게 오는 경일님의 모습은 너무 '학문을 정서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교해져야 할 학인의 언어가 너무도 설교자의 언어(이에 대해서는 갈기회 사이트에 올린 제 글이 있으니 참조바랍니다)를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글의 맥락과 논리적 정당성보다는 거대한 '당위성'만이 넘실거리지 않나 하는 생각도 떠오르게 됩니다. 그보다는 보다 차분하게 자신의 논리를 꿰어내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이 길어졌지만.... 실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이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큽니다. 그러나 이 후로 다시 이에 대한 제 견해를 피력치는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국내의 후배들에 의한 투명한 토의가 계속 지속되었음 하는 마음은 간절합니다. 외국에 나앉아 학위과정 중에 있으면서 이렇게 시간을 투자하는 일에 매달린다는 것이 그렇게 유익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몸살처럼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담론이 즐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 역시 저의 '토론에의 의지'를 박약하게 만드는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경일님의 종교간의 대화와 내적 대화 등 반복되는 테제에 대해 조그마한 제 질문을 첨가합니다. 꼭 이 질문에 답변하실 의무는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던지고 싶은 물음이기에 한번 적어봅니다.


질 문

1. 내적 대화가 과학적인 학문의 방법론으로 타당한 것인지? 그건 종교를 하나의 연구대상으로 접근하는 관찰자의 심리적인 자세에 대한 촉구가 아닌지?

2. 만약 그러한 내적 대화를 통한 주관적인 종교적 체험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하다면 그 방법론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표상화 될 수 있는지?

추신) 만약 이 제 질문과 혹은 제 글 전체에 대해서 답변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가급적 제가 지적한 위의 오류들은 피하셨음 고맙겠습니다. 엉뚱한 논리적인 비약이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등에 빠지지 마시고... 그리고 지나친 정서적인 글 쓰기에도 매달리지 마시고 차분한 상태 속에서 가급적 분석 가능한 개념과 논리를 가지고 자신의 견해를 펼쳐주신다면 멀리서나마 기쁘게 받아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건강하시고... 새해에는 큰 결실 맺는 일들이 가득하길 다시금 기원 드립니다.

독일 Marburg에서

이길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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