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 강의
2005.11.07 19:36

한국에서 종교학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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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종교학 하기


종교학에 대한 몇 가지 여전한 오해들

한국에서 종교학을 한다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정도의 오해에 기초한 질문이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선 개별종교에 속한 신앙인들은 종교학이 자신들의 신앙이나 혹은 교리 전개에 위협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학에 속해 있는 이들에게 매우 비우호적인 눈빛을 보내곤 한다. 종교를 연구 대상으로 하면서도 ‘변론’이나 ‘변호’가 아닌 해당하는 종교에 대한 중립적이고도 객관적인 기술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의심과 더불어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하고 있는 종교를 연구하는 종교학자들의 언사와 학문적 작업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혹은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곤 한다. 그런 이들에게 ‘종교학은 무엇보다도 종교인의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며, 진리와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하는 유의 학문은 아니’라고 진지하게 손사래를 쳐대도 종교학에 대한 그들의 의혹어린 눈빛은 쉽게 거두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난감함은 종교학에 우호적인 이들을 만났을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서 종교학이란 학문은 개별 종교의 모든 진리를 아우르는 ‘절대 진리’ 내지 ‘슈퍼진리’를 추적하고 결국에는 그것을 잡아채는 일종의 도통한 분야와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일반 대학 내에 설치된 종교학과에는 보통 이런 부류의 학생들이 몇 명씩은 끼어있다. 따라서 이들은 처음 종교학이란 과목의 개론 수업을 들을 때부터 적잖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다양한 종교들의 교리 혹은 진리에의 추구를 일목요원하게 정리하여 새롭고도 총체적인 깨달음의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종교학이 초장부터 그러한 형이상학적 환상은 무참히 깨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리를 찾는 도구로서 종교학을 선택했던 이들의 눈에 종교학이라는 학문은 밋밋하고 미약하기 짝이 없다. 과감하게 진리에 대해 발언하지도 못하고, 검증적 학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아슬아슬 진리에의 문제를 교묘히 피해가는(?) 종교학이라는 학문이 때로는 이들의 성깔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심지어 얄밉게 느껴지기까지 할 것이다.

종교학이란 학문은 대관절 무엇이기에 이처럼 상이한 평가를 한 몸에 받고 있는가? 한 쪽에서는 자신들의 진리체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도저히 진리에 이르는 길이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진리에의 갈증을 좀 더 유발케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종교학이라는 물건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학에 대한 오해는 끝이 없다. 때론 종교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오리엔테이션이 되어있으며 심지어 자신들도 종교학적 연구를 한다고 자임하는 이들에게서도 이러한 오해의 여지는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는 특히 ‘종교 간의 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신학자들에게서 종종 발견된다. 사실 종교 간의 대화는 학문적인 과제라기보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더 가까운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종교 간의 대화에 몰두하는 이들은 이 ‘대화’야 말로 종교 간의 평화와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화해와 조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대 담론으로 스스로를 최면걸기도 한다. 이들 종교신학자들이 보기에 세계 모든 종교를 연구한다하면서도 종교 간의 대화에 미적거리는 종교학자들을 두 눈 뜨고 감내하기란 아마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도대체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해 투신하지도 않을 거면서 종교학이란 학문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그들의 푸념과 비아냥거림은 나름대로 절제된 형식을 통하여 지금도 끊이지 않고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종교학자들은 종교 간의 대화에 스스로를 투신시켜야만 한다는 어떠한 학문적 당위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화라고 하는 것은 철저히 당사자들의 문제이며, 또 그것은 학문적 관심이라기보다는 ‘도덕적’ 혹은 ‘행정적’ 요청에 의한 것이다.

종교학자들은, 그들이 개별 종교에 속해있건 아니건 간에, 종교학이라는 도구적 학문을 통해서 각 종교들의 진리를 탐구코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학은 각 종교전통에서 진리를 탐구코자 하는 각 종교인들의 태도와 그들이 부산물로 생산해내는 다양한 표현양식들을 역사적으로 구조적으로 탐구하고 기술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종교학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추종하고 있는 ‘종교인들’과 그들이 역사 속에 유전시키는 다양한 ‘문화적 유산’들이다. 이처럼 종교학과 종교신학은 출발점뿐만 아니라, 이후 지향하는 방향에서도 차이가 난다. 따라서 종교신학자들은 종교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수용, 혹은 이용하여 자신들의 대화사업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종교학자들로 하여금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윤리적 과업에 직접 투신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학이라는 분과학문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미 기존하는 신학적 종교연구가 있는데 왜 ‘검증적’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또 다른 종교연구가 필요한 것인가?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금까지의 논의가 충분히 제시해 주었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이 시점에서 거칠게나마 다시 원론적인 종교학의 역할, 혹은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우선 종교학은 다양한 종교문화를 그 연구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그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변증적이고 변론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즉 해당하는 종교를 설명하거나 그것을 타인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연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보다는 그 종교의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그리고 현상적인 문제들을 가급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당하는 종교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 가급적 자세하고도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뿐이다. 그것 이상을 넘어 서는 학문적 욕심을 종교학자들은 괄호 안에 넣는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종교학적 연구 결과물들이 매우 밋밋할 때가 있다. 그 이상을 요구하며 ‘존재’, ‘진리’, ‘절대’ 등등 엄청난 단어들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이들에게 종교학이란 학문은 ‘비겁’해 보일 수도 있다. 정언적 선언이 필요한 지점에서 급히 짐을 싸 자리를 옮겨버리는, 즉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무척 책임감 없는 그래서 얄미운 분과학문이 바로 종교학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종교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격을 눈치 채게 되면 그러한 도피의 이유가 그렇게 이해 못 할 바도 아니게 된다.

‘다름’과 ‘차이’

종교학은,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종교라는 문화 현상을 가급적 검증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태어난 근대 학문이다. 그리고 종교학의 태동 배경을 꼼꼼히 살펴보면,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조가 교묘하게 동거하는 형색을 취하고 있음을 대번에 눈치 챌 수 있다. 넓게 본다면, 종교학이라는 분과학문 역시 계몽주의의 등장이라는 시대적 환경에 그 탄생의 빚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종교학은 반 계몽주의적 라인에 서있다. 계몽주의 정신이 지닌 건조한 이성중심의 세계 이해에 반기를 들고 정서적, 체험적, 경험적 요소의 가치를 좀 더 부각시킨 것이 바로 종교학이라는 분과학문이기 때문이다. 종교라고 하는 문화적 가치체계는 그 속성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요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종교학자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주의적 접근보다는 신비주의를 용납하는 생철학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것을 초기의 종교학자들은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앙적 가치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종교적 가치를 연역시키려 했던 근대 이전의 종교연구와는 달리 도구적 인식 이성에 기초해서 종교란 현상을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종교학은 계몽주의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계몽주의 사조와 그 이후 사상 전개 과정에 대하여 조금만 더 언급해 보자. 사실 계몽주의는 인식이성의 발견을 통하여 인간이 지닌 ‘세계이해의 세속화’를 앞당긴 시대정신이다. 계몽주의 이전의 인간은 신적 존재, 혹은 궁극적 실재에 기반을 둔 일종의 신앙적 판단에 의거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즉 존재론적 세계 이해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계몽주의가 등장함으로 궁극적 실재는 인식이성에게 그 왕좌를 물러주고 이제 사상계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을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다시 구성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세상은 인식이성의 시대로 들어간 것이다. 저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제처럼 계몽주의시대에는 “인식이성과 그 대상인 사물이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veritas est adaequatio intellectus rei)로 보았다. 이후 계몽주의 사조는 코페르니쿠스, 다윈, 맑스, 프로이트 등등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청하는 대 사상가들의 등장에 힘입어 점점 근대의 굳건한 대표 정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지구는 우주의 중심일 수 없다! 오히려 지구는 광활한 규모의 우주에 비해 먼지와도 같은 혹성일 뿐이다. 자연과학과 천문학의 발달은 점차 인류로 하여금 지구 중심적인 사고를 지양하게 하고 우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또한 다윈의 연구는 인간과 동물사이의 견고한 구별을 애매하게 만들어버렸다. 신과 인간의 차이만큼 분명하다고 여겨졌던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이제 다윈과 그의 후계자들의 지속적인 탐구와 주장을 통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진화론적 시각 속에 인간 역시 하나의 동물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인간 역시 동물적 속성, 혹은 본성을 지닌 유기적 존재일 뿐이다. 또한 맑스의 등장은 역사에서 신의 의미를 부여하던 이전의 시간관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케 했다. 이제 역사 역시 과학적 방법에 의해 분석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대상이 되었다. 물론 맑스의 역사관 역시 묵시론적인 유대-그리스도교의 관점이 교묘히 변형된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를 과학적 토대로 재구성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역사관과는 구별되는 점은 뚜렷하다. 신적 존재의 개입하는 마당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그런 개입으로 인해 유의미성을 부여받았던 역사가 이제 맑스에 이르러 과학적 동인에 의해 흘러가는 기계적인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선형적인 특징은 그대로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신적 존재를 제거시키고 나름대로의 과학적 방법을 적용시켰다는 점에서 맑스의 역사 이해는 이전과는 분명 차별되는 성격을 지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의 등장은 인간의 심리마저도 양화(量化)시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영혼’, ‘정신’, ‘심령’ 등등 이전에는 수치로 판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었던 심리 용어들이 이제 그 형이상학적 포장을 벗어버리고, 눈에 잡히는 수치와 통계로서 연구되고 또 언급될 수 있게 되었다.

계몽주의적 사조의 출현은 종교를, 신앙을 취급하던 분야로서는 심대한 도전이었고 또한 위협이었다. 특히 그리스도교계가 더욱 그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계몽주의적 도전은 서구에만 국한되었던 것이고, 서구의 세력이 세계화되기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는 전혀 다른 지성적 환경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가 계몽주의적 충격을 받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고, 또 그것은 제국주의 세력과의 연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서구에서의 계몽주의 경험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기도 하다. 여하튼 계몽주의 사조를 온몸으로 맞이한 서구사회는, 특히 종교계는 이후 다양한 모습으로 계몽주의의 충격파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계몽주의적 사조와 과학적 방법론을 신학에도 적극적으로 적용코자 했던 트뢸치가 리드하던 자유주의 신학을 우리는 먼저 언급할 수가 있을 것이다. 트뢸치는 이러한 ‘신학의 과학화’라는 구도 하에 ‘그리스도교의 상대화’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트뢸치가 그리스도교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계몽주의적 기획 하에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새로운 신학 방법을 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보수주의 라인에서는 계몽주의의 강을 건너 자신들이 소유한 신앙은 인식이성을 넘어선 곳에 있음을 언표하고 또 그것을 이성적 방법을 통해 변증법적인 설명에 담아내려 한 바르트 류의 신정통주의와, 오히려 계몽주의를 피해 그때까지 그들을 안온케 해 주었던 검증되지 않은 존재의 그림자로 피해버린 근본주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연구계의 지각변동 속에서 종교학, 종교사회학, 종교인류학 등의 새로운 근대 학문들 역시 고개를 든다. 더 이상 신앙적 사조에 의존해서 종교를 읽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종교를 기술하고자 하는 새로운 종교연구 학문의 시작인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제기된 새로운 방향의 종교연구는 전통적인 종교에 대한 탐구에 지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사실 이전까지의 종교연구는 해당하는 종교의 특정한 문화 역사전통에 따라 특수한 용어로 한정된 존재론적인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신’, 혹은 ‘절대자’, 때로는 ‘궁극적 가치’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술하고, 묘사하고, 정리하고, 변증하고, 또 설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본질 그 자체를 논리라는 그릇에 담으려는 시도는 매번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고, 겨우 나름대로 찾아가는 타협점은 도그마라는 상자에 공동체의 합의된 내용을 담아내던지, 아니면 본질직관을 우선시 하는 신비주의 전통으로 몰두하는 일이다. 기실 이는 확장된 사상계에서도 마찬가지긴 했다. 플라톤이 가변적인 현상계의 선험적 근거로서 이데아의 세계를 제시한 후, 사람들은 끊임없이 동굴 밖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곳의 가치보다는 저 세계에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본질’, ‘존재’, ‘절대’, ‘진리’, ‘참 실재’ 등의 거대한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으며, 그것으로 가는 여정이 그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임이 설파되고 또 설파되었다. 존재론적으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라서 궁극적 실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유일신이니, 다신론이니, 혹은 단일신론이니 경우에 따라 내재적 절대 진리니 등등 다양한 모습과 명칭으로 그것들을 지칭하며 끝없는 혼란의 늪에서 빠져나올 줄 몰랐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진리 그 자체로 곧바로 진입해 들어가고자 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노력이 더 그럴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하튼 종교라 함은 곧바로 진리를 지칭하는 것이요, 진리라 함은 궁극적 존재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 ‘신앙’하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존재에 대해서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러한 존재에 대한 물음이 또 다른 의미의 신앙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임을 사람들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가 인식이성을 전면에 배치시키고 그 인식이성의 막강한 능력 앞에 세계에 보편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그로 인해 ‘동일성’과 ‘일원성’이라는 시대정신을 배태시켰다면, 니체와 하이덱거의 근대성 비판으로 인해 야기된 탈근대적 논의는 전혀 새로운 길을 인류에게 열어주었다. 그와 같은 근대의 구호는 신념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며, 또 마땅히 그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논의가 니체와 하이덱거의 근대성 비판 이후 터져 나왔다.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인류는 보편이라는 환상으로부터 탈출하여 ‘다름’과 ‘차이’를 주요한 철학적 주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편과 일언이 아닌, 다름과 차이를 주장하게 된 시대에 우리의 종교연구는 어떤 모습을 해야만 할까?
바로 여기에 종교학의 출발점이 도드라진다. 물론 종교학 역시 초창기에는 존재론적인 종교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이는 진화론적인 논의와 더불어 세계의 종교들을 미개한 것으로부터 고등한 것까지 줄 세우게 함으로써 여전히 검증적이고 편견 없는 종교연구의 길이 멀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에 정신을 차린 종교연구가들은 인간이 종교적이게 되는 과정을 보다 더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적어도 지금껏 주류를 이루었던 한 가지 방법은 피하게 되는 지혜를 획득하게 된다. 즉 신, 본질, 존재, 진리, 궁극 등에 대한 학문적 추구를 포기하는 일이다. 아니 포기 했다 라기 보다는 그것들을 인간 자신 안으로 끌고 들어와 인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경험을 주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본질적 대상에 대한 논의는 뫼비우스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며,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지금 여기 그러한 본질을 경험하는 인간 자신뿐이다. 존재론적으로 그것을 기술하고 잡아내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 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러한 경험을 하고, 그것이 외부로 표출되는, 즉 문화적 표현들은 분명히 우리의 객관적 연구대상으로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연구, 바로 거기에 종교학적 종교연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학적 연구의 초점은 이전의 ‘존재론’보다는 ‘수양론’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본질을 논리에 담아내려는 존재론적 종교연구는 해당하는 신조의 이해를 폐쇄적으로 만든다. 즉 그 종교 공동체에 귀의해있거나, 혹은 그 안에 있으면서 그와 동일하거나 혹은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이들에게 존재론적 명제는 무척 낯설고 어려울 따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불교는 불자들만을 위한 용어를 양산할 뿐 서로의 소통과 이해를 위한 접촉점은 점점 그 간극을 넓혀 갈 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종교에 대한 세속적 연구의 필요성은 또 한 번 제기될 수 있다. 서로가 이해 가능한, 그리고 어떠한 종교에도 초대받지 못한 이들에게 각 종교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해당하는 신학연구들 외에 완충지역으로서 종교학적 종교연구는 나름대로의 역할과 또 그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느 누구도 자신이 관심이 있는 종교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권리는 종교학적 연구를 통하여 충분히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의 종교학, 그리고 그것의 미래

사실 종교학은 지금까지는 각 개별 종교전통의 신학분야와의 밀접한 연관 속에 있었다. 그래서 서구의 경우 대학에 있는 종교학 전공은 각 대학의 신학부와 밀접한 연관 하에 공동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서서히 서구를 중심으로 종교학적 연구가 신학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신학적 종교연구를 위한 보조적인 위치가 아니라, 이제 종교학이 그 관심의 영역을 독립적으로 다양하게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문화’라는 레테르가 붙어있다. 즉 종교학 스스로가 전통적으로 종교라 통칭되던 문화 영역에만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종교를 포함한 문화 전반으로 그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갔고,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학이 취급할 수 있는 더 넓고 광대한 스펙트럼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종교학 스스로도 자신의 연구대상을 규정하는 다양한 작업을 병행하게 되었다. 때로 그것은 세계관(Worldviews)이기도 하며, 혹은 상징체계, 문화체계로 설명되기도 한다. 연구자 자신이 서있는 철학적 사회학적 포지션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을 사용해가며 종교학자들은 이제 전통 종교 이외의 문화현상들에 대하여서도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연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제 종교학의 영역은 전통적으로 종교적이라 여겨지던 곳, 예를 들어 교회나 성당, 사찰, 사원들뿐만 아니라, 현대 문화 속에서도 자신들의 연구 대상을 찾아내고 있다. 예를 들어 광고, 팝뮤직, 요가학원, 태극기공, 컴퓨터 게임, 연극과 영화를 위시한 예술계, 인터넷, 정치계 등등에서 그 관심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발굴 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동안 종교학이 축적해둔 창의적인 해석학적 전통은 다양한 문화 콘텐츠 개발에도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학이 그 연구의 대상을 세계관, 상징, 문화체계로 넓혀가면서 점차 종교학은 이전부터 줄기차게 그 스스로가 요구해왔던 신학으로부터의 독립을 획득하고 있다. 이는 서구에서는 구체적으로 학과, 학부의 독립으로도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신학부나 인문학부에 한 전공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종교학은 이제 서서히 인류학, 민속학 등과 더불어 문화학부로 그 자리를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은 특정 종교가 과반 세력을 점유하지 못하고 다양한 종교들이 큰 갈등 없이 공존하고 있는 후기 현대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그야 말로 종교학이 꽃 피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래된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한반도를 거쳐 간 다양한 문화 사상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종교인들의 구성도 어느 특정종교가 다수를 점하지 못하는 그야 말로 다종교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라는 시공이다. 현대 대표적인 다종교 사회인 미국의 경우도 그 주류는 개신교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한국에서의 종교 간의 구성비는 그런 주류종교를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호 균등적이다. 2005년도 인구센서스 조사결과가 나오면 보다 구체적인 현 한국의 종교 분포도를 얻을 수 있겠지만, 1999년도 통계청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종교인 비율은 53.6%로 지속적으로 상승국면에 있다.  같은 해 통계에 따르자면 개별종교의 분포도는 불교(26.3%)와 그리스도교 계열(개신교 18.6%, 가톨릭 7%)이 다른 종교들에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들 어느 종파도 독립된 숫자로는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고, 그 외에 무종교인이 대략 47%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한국의 종교적 상황은 어느 종교도 주류를 점하지 못하는데다가 비종교인도 만만치 않은 말 그대로 종교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다원 사회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런 구도 하에 지역별로 종교별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고 계층별로도 상이한 분포도를 보이고 있어 한국사회의 종교적 지형도는 무척 다채롭다.

이런 구도대로라면 사실 각 종교와 전통 사이의 소통과 상호 이해를 위해 종교학이 자리 잡기 무척 용이한 환경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이런 환경이 분명하게 해석된다. 현 미국 대학에 설치된 종교학과는 천여 개에 이르고, 상대적으로 미국보다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주류를 이루는 서구에서도 어느 대학이나 종교학 전공 학과들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좀 다르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더 활발한 종교학적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는 외적 환경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오히려 그렇지 못한 요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각 개별 종교 전통의 신학적 종교연구는 오히려 더욱더 견고해지고 있는 반면, 한국 상황에서 보다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종교학적 연구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있던지, 아니면 개별 종교전통에 속한 이들에게까지는  메아리가 퍼지지 않는 종교학자들만을 위한 잔치로 끝나고 있는 형국이 작금의 한국에서의 종교학이 가지는 현주소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한국 사회는 다원화된 종교 환경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일까? 이대로 가게 되면 종국은 상호간의 끝없는 갈등으로 오히려 상호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터인데, 왜 한국의 종교계는 서로의 입장만 끝없이 되뇌고 있는 것일까?

혹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교조적 특징에 있는 것은 아닐까? 경험적 요소가 강한 종교의 영역조차 도덕적 엄숙주의를 가지고 교조적으로 접근하는 현 한국 사회의 종교적 주류인들이 가지는 특성 때문은 아닐까? 종파를 막론하고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철두철미하게 ‘암기’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독특한 한국적 신앙관은 신앙을 삶 속에 녹아들게 하기보다는 자꾸 특정한 교조적 암기에만 목매게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교조적 편협주의는 결국 신앙의 생명력과 생동감을 소실케 하고, 결국 교조만이 남아 중세시절 저 이름 높던 마녀재판과도 같이 이념적인 심판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렇게 교조적 중심의 신앙생활은 오히려 도그마를 지키고 사수만 하면 될 뿐, 그에 응당 하는 도덕적 윤리적 삶에 대해서는 느슨한 긴장감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닌지. 대다수 비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이 가지는 지극히 세속적인 종교인들의 비종교적인 삶의 모습에 실망하고 좀 더 반종교화 되어가는 경향을 볼 때 작금 한국 사회 종교인들의 신앙행태는 세밀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런 지극히 이념적이고 교조적인, 때로는 정치적인 종교행태가 오히려 다양한 종교현상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과학도의 시선을 막고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는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언제까지 한국의 종교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세계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을 런지. 그리고 언제나 그 교조적인 신앙의 울타리에서 벗어 나올는지 우려와 기대가 동시에 쏟아지는 순간이다.

한국에서의 종교학의 부진 혹은 지체를 꼭 외부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종교학자들도 어느 정도 전통 종교인들에게 종교학적 결과물을 제시하는데 미온적인 것 역시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종교전통에 속한 이들에게조차 냉소적일 때가 있다. 때론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자신의 연구 대상이 되는 종교에 속한 신앙인들을 가르치려고만 드는 고압적인 자세도 종종 노출시키곤 한다. 이런 멀어지는 간극을 좀 더 좁혀간다면 한국에서의 종교학은 기존 종교인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서서히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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