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 강의
2005.07.06 22:57

종교현상학의 개척자: 나탄 쇠더블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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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현상학의 개척자: 나탄 쇠더블롬(Nathan Söderblom, 1866-1931)
- 신학과 종교학의 경계에 서서


“나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종교학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종교는 이념 혹은 고백?
근자에 은퇴한 한 원로 종교학자가 개신교 평신도들을 위한 강연회에서 성서에 대하여 한 말씀 훈계하셨다 한다. 그분이 그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고 한다. “성서는 실증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입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고, 이미 성서학 내에서는 상식처럼 통용되는 명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줄잡아 1백 년 전부터 이러한 명제는 공감대를 얻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역사비평적인 성서연구가 꽃을 피운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원로 종교학자의 강연 소식을 다루고 있는 한 인터넷 매체에 달려있는 댓글들을 보면 마치 백 여 년 전 최초로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 방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을 때 보여주었던 채 계몽되지 않았던 당시의 기독인들의 반응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렇게 낯선(?) 계몽주의적 방법으로 성서를 읽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지녔던 이들이 토했음직한 댓글들이 21세기의 환경 속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예수를 만났는가? 믿음이 없는 자가 감히 성서를 논하는가? 당신은 사탄이요 원수 마귀의 대장이다!!” 그 기사의 하단에는 거칠기 짝이 없는 21세기 판 마녀재판의 검사 측 저주(?)들이 댓글로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왜 그럴까? 아직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계몽주의라는 강을 건너오지 못한 탓인가? 그들의 눈에는 코앞에 넘실거리는 계몽주의의 검푸른 강물이 마르둑 신화에 나오는 쓴 물의 여신 티아마트처럼 저주스러운 죽음의 바다처럼 보이는 것일까? 마치 그곳을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지금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 저 시퍼런 강물에 모두 씻겨 없어질 것만 같은, 저 강물은 죽음을 부르는 저주의 화신처럼 결국 자신들의 신앙을 모조리 삼켜 버릴 것만 같은 그런 공포의 대상일 뿐인가? 그렇다면 나름대로 그 강물을 건너오고도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도, 또 포기당하지도 않으면서 계몽주의의 시련을 적절히 소화하고 또 수용해 낸 지금까지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또 무엇인가? 그들은 계몽주의의 강물을 건너지고 않았으면서도 마치 그것을 극복한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인가?  

여하튼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난 혹시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념과 신앙적 고백을 혼동, 혹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하곤 한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분’(사실 그분이 어떤 분인 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고도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어찌나 제각기 이 그분을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포장하는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에 대한 교리를 암기하는 것으로 완수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그분’을 자신의 실존적 영역 속에서 경험하고 그것이 내 주체적 세계 내에서 ‘고백’이라는 통로를 통해 표출하는 것이 보다 신앙에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분명한 경험 속에서 얻게 된 고백적 신앙은 건조한 이념과는 달리 각자의 종교적 생활을 무척 생동감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일까? 그렇게 절대적 존재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것을 내 존재와 결부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까? 내가 보기에 적잖은 수의 사람들은 ‘그분’을 경험하고 자신의 실존 속에 모시고 동행하기보다는 ‘그분’에 대한 교조화된 신념들을 암기하듯 읊조리는 길을 간단하게 선택하는 것 같다. 글쎄 어떤 것이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일는지 섣불리 규정하고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념화된 암기식 신앙이 참 신앙인양 행세하고 있는 한 단면은 여러 모로 볼 때 아쉬운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계몽주의의 강이 그처럼 무섭고 두려운 것일까? 마치 루비콘의 강처럼 그곳도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러한 곳인가? 그런 점에서 계몽주의적 도전이 한참이던 19세기 후반에 목사요 학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종교학과 신학의 절묘한 조합을 시도했던 나탄 쇠더블롬이라고 하는 이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신학과 종교학의 경계에 서서
쇠더블롬은 매우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우선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루터교 목사로서 살았다. 심지어 그는 웁살라의 대주교의 지위까지 오르기까지 하였다. 또한 그는 35세의 나이에 웁살라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여 대략 14년간 대학에서 후학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가 선택한 전공은 신학도 철학도 아닌 종교학이었다. 하지만 보다 더 그의 이력을 빛나게 하는 것은 그가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라는 점이다. 1930년 쇠더블롬은 세계 대전이 종료된 후 국제사회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더욱더 재미있는 것은 많은 노벨상 수여자들 중에서 쇠더블롬은 이 상이 있게끔 했던 노벨이라는 사람과 이전부터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노벨이 사망한 후 그의 장례를 직접 주관했던 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쇠더블롬이었으니 이 두 사람의 인연은 기이하고도 묘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또한 그는 W.C.C. 창시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얄미울 정도로 그는 학계, 교계 그리고 일반 사회계에서 상당한 정도의 경력을 구축한 인물이 바로 쇠더블롬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느 것 하나 떨어지지 않게, 그의 인생에서 맡겨진 일들을 성실하고도 결실 있게 수용해 냈으며, 또한 그로 인해 높은 명망과 명예를 쌓아올렸다.

또한 그는 종교현상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연구 분야의 물꼬를 튼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전에 틸레(Cornelius Tiele, 1830-1902)와 쏘쎄이(Pierre Daniel Chantepie de la Saussaye, 1848-1920) 등 현상학적 종교연구를 주창하던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보다 진일보된 종교연구의 현상학적 방법을 제시한 이는 바로 쇠더블롬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제한된 의미이긴 하나 그를 종교현상학의 개척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쇠더블롬은 고대 이란의 종교, 즉 조로아스터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학자 쇠더블롬은 죽는 날까지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앞에서 인용한 그의 유언처럼 그가 전공한 종교학을 통하여 신을 증명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진실 된 모습의 학문에 대해서 교회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음을 힘주어 주장하기도 하였다. 쇠더블롬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절대성 그 자체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들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좀 더 신께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아울러 그를 통해 신에 대한 인식을 더 깊게 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과 종교학의 조화를 자신의 학문적 과업으로 여겼던 한 위대한 인물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가 신학도의 길로 들어선 19세기 후반은 여러 모로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는 질고의 시절이었다. 18세기 이후 유럽대륙에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던 계몽주의는 이즈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사회 각 방면에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물결은 신학이라고 특별히 비켜가지는 않았다. 교조적으로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변호를 주 임무로 삼던 당시 신학계도 거세게 불어오는 계몽주의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성이 도구화되면서 당시 많은 분야의 학문들은 객관화, 계측화, 수량화, 합리화, 예측가능화, 과학화, 심리화 등등 이전과는 다른 가치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전통적인 교회를 위한 변론적 신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처지고 있다는 말과도 동의어가 될 정도로 계몽주의의 위세 앞에 많은 신학도들은 심한 자긍심의 상처를 감내하고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계몽주의 사조에 힘입어 서서히 고개를 들며 자신의 세력을 학장해가고 있었던 ‘역사비평적인 성서해석’과 지리상의 발견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비그리스도교 세계의 다양한 정보들로 인해 야기된 ‘문화적 급진주의’ 혹은 ‘상대주의’는 서서히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에 균열이 가게 하였고, 그에 따라 점차 ‘종교적 상대주의’가 큰 힘을 얻어가던 시기였다. 이때 대부분의 유럽 교회와 신학도들이 취한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은 애써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며, 새로운 신학방법론들을 이단시하고, 때로는 경원시하며 전통적인 신학방법을 고수하고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이러한 계몽주의의 수용과정이 백 여 년이나 지난 21세기 한국 기독교계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이런 정황 속에서 쇠더블롬이 택한 길은 동시대 동료들과는 좀 다른 길이었다. 그는 신학과 계몽주의적 학문과의 연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신학의 길을 좀 더 명확하고 분명하게 해줄 것이라는 신념마저 가지고 있었던 이가 바로 쇠더블롬이었다. 이는 1901 9월 24일에 행한 그의 교수 취임강연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그는 자신의 교수 취임 강연에 “일반 종교학과 교회의 신학”(Den allmänna religionshistorien och den kzrkliga teologien)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강연에서 그는 종교학과 신학의 긴장은 서로가 서로를 오해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천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객관적 학문과 교회와의 결합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강조한다. 쇠더블롬은 종교학은 학문으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종교학이 교회가 가져야 할 특성과 목적을 마찬가지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교회 또한 신실한 학문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았다. 쇠더블롬이 보기에 학문적 이상과 종교적 이상은, 만약 그것이 모두 진실하다면, 결국에는 만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양자는 갈등을 느낄 필요도 없으며 각자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취임강연에서 밝혔던 주장처럼 그의 인생을 살았다. 목사로서 그리고 종교학자로서.

경건과 자유로움의 조화로운 동거
앞서 지적했듯이 쇠더블롬은 학문적 개방성과 신앙의 경건성을 동시에 소유한 독특한 캐릭터를 가졌다. 어디서 이런 교묘한 동거가 가능하게 된 것일까? 멀리 갈 것도 없이 그의 부모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쇠더블롬의 조화로운 성격의 유래를 알 수 있게 된다.

쇠더블롬은 1866년 1월 15일 스웨덴 트뢰뇌(Trönö)라는 지역의 한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최초에 받은 이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탄이라는 것보다는 상당히 길다. 그의 본명은 Lars Olof Jonathan Söderblom이다. 하지만 그는 이 긴 본명 대신 애칭이기도 했던 나탄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요나스(Jonas Söderblom, 1823-1901)는 루터교회의 목사였고, 덴마크 출신인 어머니 소피(Sophie Söderblom, 1939-913)는 의사집안의 딸이었다. 아버지 요나스는 스스로에 대해 엄격한 규율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리고 일이 생기면 무섭게 그 일에 몰두하는 열정과 능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반면 그의 어머니 소피는 다정함과 친절함을 겸비한 사교적인 인물이었으며, 섬세한 유머감각 또한 지니고 있었고 음악적 재능도 상당했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아버지 요나스는 경건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고, 스스로와 가족들을 이러한 경건주의적 규율 속에서 이끌어가고자 하였다. 이런 그의 성향은 그의 아들 나탄이 종국에는 자유주의 사상가가 될까봐 두려워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소망과 걱정 때문이었을까? 나탄은 자유로운 종교 연구가로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로서의 길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여하튼 이런 부모 밑에서 쇠더블롬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유스러움과 경건함을 동시에 겸비하는 인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쇠더블롬은 1863년 웁살라(Uppsala)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철학(1886)과 신학(1892)을 전공하고, 1893년에는 스웨덴 루터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그리고 1년여 동안 웁살라에 있는 한 병원의 원목으로서 활동하고, 이듬해(1894)에는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 있는 스웨덴 공사관의 목사로서 일한다. 그리고 같은 해 안나 포르셀(Anna Forsell, 1870-1955)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쇠더블롬은 4명의 딸과 8명의 아들을 얻었다. 하지만 자녀들 중 딸 하나는 아직 아이였을 때 잃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학인의 길을 걷던 쇠더블롬은 하르낙(Adolf von Harnakck, 1851-1930)과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학자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계몽주의라는 강을 거침없이 건너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도전 속에서도 그의 종교적 정신만은 여전히 일정부분 자유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았으며 아울러 그의 선교에의 열정 역시 쉽게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학생선교를 위한 운동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였으며 YMCA 멤버로서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종교적 열정은 미국여행길에서도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는 평생에 걸쳐 단지 세 번만 유럽 대륙 이외의 지역을 여행하였다. 그 중 두 번이 미국, 한번이 터키였는데, 이 여행들 모두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선교적 목적으로부터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의 최초의 미국방문도 마찬가지였다. 1890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세계적인 부흥 설교가였던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의 학생집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국제적인 기독교계에 그가 최초로 이름을 올려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하튼 기이할 정도로 그는 자유주의적 학문 활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종교적 열정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쇠더블롬의 학문적인 도전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1892년부터 학위논문을 시작하게 된다. 최초 그가 구상했던 박사학위 논문의 테마는 교회사나 조직신학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변경되었고, 결국 그는 종교학 분야에서 학위 논문을 위한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찾아낸 테마는 고대 이란 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쇠더블롬은 학위 논문에서 예언자라는 범주 속에 예수와 짜라투스투라를 비교하고자 하였다.

1894년부터 그는 앞서 언급한대로 파리에 있었다. 그곳에서 목사로 활동함과 동시에 그는 소르본느 대학의 개신교 학부에 등록하여 1901년까지 학업을 지속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경력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오귀스트 사바티에(Auguste Sabatier, 1839-1901)를 만나게 된다. 사바티에에 대한 쇠더블롬의 존경의 마음은 그가 후에 펴낸 학위 논문을 그에게 헌정했던 것을 통해서도 가늠해볼 수 있다.

쇠더블롬은 440쪽이 넘어가는 장대한 분량의 학위 논문을 제출하게 된다. 학위 논문의 제목은 “조로아스터교의 내세관”(La vie future d'après le Mazdéisme, 1901)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주로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을 비교적인 시각에서 연구하였다. 하지만 그가 학위 논문에서 사용한 이란 쪽 사료들은 40% 안쪽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로아스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던 유럽 학계의 사정상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이 논문에서 방대한 양의 문헌학적 작업을 했다 기 보다는, 그가 소화해낼 수 있는 당시의 사료들을 통해 고대 이란의 종교창시자인 조로아스터에게 보다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즉 쇠더블롬은 신화 속의 조로아스터에게 피와 살을 지닌 역사 속의 예언자의 모습을 주길 원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얻고자 했던 것은 조로아스터를 역사적으로 복원하여 예수와 비교함으로써 고대 이란 종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구체적인 영향관계를 논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고 분명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쇠더블롬에게는 있었다.

학위를 받은 후 쐬더불롬은 곧바로 모교이기도 한 웁살라 대학의 교수자리를 얻게 된다. 최초에 그가 임명받은 자리는 신학예비학교, 혹은 일반신학을 위한 자리이다. 기존 신학계의 입장에서는 익숙지 않은 이름의 이 자리에서 그는 주로 일반 종교학과 관련된 수업들을 해 나갔다. 이후 그는 1914년 그가 웁살라의 대주교로 지명되기 전까지 교수직을 성실히 수행해 나갔다. 이 시기 쇠더블롬은 종교학과 신학의 관계정립을 위한 노력을 쉬지 않고 해 나갔다. 그는 기존의 신학이 종교라는 보편성을 인간 경험의 한 범주로 받아들일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당시 그는 이미 리츨을 떠나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 쪽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쇠더블롬이 행한 1899년 11월 11일 교수 초빙을 위한 시범 강연 주제를 봐도 알 수 있다. 당시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이 가지는 의미”란 제목으로 공개강연을 하였다.

웁살라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우선 1903년에 바빌론과 성서의 종교를 비교하는 “계시종교”(Uppenbarelsereligion)를 발표하였고 아울러 틸레의 “종교사 개요”(Kompendium der Religionsgeschichte)를 개정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 개정작업에 동참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은 학위 논문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1908년도에는 막스 뮐러의 <동방성전>과도 비교할 수 있는 3권짜리의 경전 번역서인 “세계 여러 종교들의 원전”(Främmande religionsurkunder)를 내어 놓았다. 1910년도에는 가톨릭의 현대화에 대한 연구로서 “개신교와 가톨릭에서의 종교의 문제”(Religionsproblemet inom katolicism och protestantism)를 발표하였다.

그 사이 그의 교수 이력에 눈에 띠는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1912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부터의 청빙이었다. 당시 라이프치히 대학은 새롭게 종교학 교수 자리를 신설하고 그것을 쇠더블롬에게 제안하였다. 하지만 웁살라를 완전히 떠나고 싶지 않았던 쇠더블롬은 웁살라 대학의 교수직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단 4학기만(1912-1914)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로 일하게 된다. 그 사이에도 그는 자신의 학문적 여정에 있어서 중요한 저작을 하나 발표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신학과 일반 종교학”(Natürliche Theologie und allgemeine Religionsgeschichte, 1913)이다.

결국 그의 교수 이력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뿐만 아니라 1914년 스웨덴 정부에 의해 대주교로 지명됨으로써 웁살라 대학에서도 끝을 맺게 된다. 그 해 11월 8일 그는 대주교로 취임하게 되고, 이후 학자로서의 삶보다는 교회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대주교로서의 그의 삶도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성공은 노벨 평화상 수상(1930)이라는 결실로 나타났다.

1931년 쇠더블롬은 스코틀랜드의 기포드(Gifford) 강연에 초빙 받아 강연을 하게 되었고, 이는 1932년 그의 사후에 “살아계신 하나님”(Den levande Guden)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최후는 너무도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강연을 마친 후 스웨덴으로 돌아온 쇠더블롬은 한 달 정도가 지난 뒤 장 수술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 이후 그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된다. 때는 1931년 7월 12일. 그의 시신은 그가 일하던 현장이기도 했던 웁살라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스러움의 발견
쇠더블롬에 대한 전기를 최초로 쓰기도 했던 토르 안드레(Tor Andrae, 1885-1947)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학자가 있다고 말한다. ‘조직적’인 학자와 ‘직관적’인 학자가 바로 그것이다. 조직적인 학자란 취급하는 사료들을 철두철미하게 관찰하고 정리하며,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상세하게 설명하며 증명하려 애쓰는 성향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반면 직관적인 부류의 학자들은 유연하고 탄력적이다. 그래서 자신의 세계관 안에 서로 충돌되는 견해와 의미들이 있다 해도 소요 없이 그것들을 받아낼 정도의 너그러움과 넉넉함을 가진다. 이러한 직관적인 학자들에게 특정한 시각만을 가질 것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형벌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고정된 분야의 특정한 전문가로 남기에는 관심의 폭이 너무 넓고 다양하다. 그들은 쉼 없이 자신들의 관심과 이해도에 따라 연구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안드레가 보기에 쇠더블롬은 후자인 직관형 학자에 속한다. 아마도 동시대에 쇠더블롬만큼 다양한 관심과 폭넓은 연구 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을 찾아내기란 무척 곤란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끊임없는 관심의 증폭이 학자로서 대학에만 남아있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쇠더블롬의 대주교로서의 활동은 그의 품성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또 다른 계획일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의 질주는 학위 논문 선택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노출된다. 사실 쇠더블롬이 고대 이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무척 생경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웁살라 대학에는 그와 관련한 과목이 소개된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이 분야에 그가 과감히 도전을 하게 된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며, 아울러 그의 직관적이고도 풍요로운 호기심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갈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강한 심성이 없었다면 그러한 일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학문적인 역량이나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당대의 저명한 조로아스터교 전문가였고, 또 다양한 시도로 새롭게 일어서고 있는 종교현상학이라는 학문의 터전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의 학문적, 특히 종교학 내에서의 업적을 정리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성스러움’의 발견이다. 그는 1913년 『종교윤리 사전』(Encyclopedia of Religion and Ethics)에 ‘성스러움’(Holiness)이라는 의미심장한 논문을 게재한다.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가 세상에 나오기 4년 전의 일이다. 이 글에서 쇠더블롬은 성스러움이란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성스러움이야말로 신이라는 개념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신이라는 개념이 없는 종교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성스러움과 속됨에 대한 구분이 없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성스러움이란 쇠더블롬에 의하면 신관을 형성하는 원초적 개념이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는 경외감! 바로 그것이 성스러움이고, 따라서 그 어떤 신관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성스러움의 체험이 빠져있을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성스러움 자체는 차원이 다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성스러운 것은 일상과는 분리된다(금기, Tabu). 만약 이 성스러운 것에 접근하길 원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마땅한 준비가 필요해진다. 일상적인 것과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주는 충격과 위험을 완충하는 장치나 의례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성스러움이란 마나(mana)와도 같이 신비스럽고도 초월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는 바야흐로 새롭게 고개를 들기 시작한 종교현상학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성스러움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제시한다.

경계인으로서의 쇠더블롬
에릭 샤프는 종교학사에 있어서 쇠더블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우선 쇠더블롬은 종교를 종교로서 대하는 진지함을 지니고 있었다. 쇠더블롬은 종교적 대상들을 특정 종교전통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읽으려하지 않고, 아직 정교한 이론으로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현상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태도, 즉 “사상(事象) 그 자체로!”(Zur Sache selbst!)라는 자세에서 보려고 하였다. 즉 당시 그의 많은 동료들은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우열적인 가치판단을 감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통을 벗어나는 종교나 사상들은 그릇된 종교, 혹은 그저 그런 인간 풍습들 중의 하나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별 종교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접근하려 했던 쇠더블롬의 태도는 상당히 진일보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종교에 대한 그의 시각에 기초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개별 종교들의 본질적 특성을 중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다. 그리고 쇠더블롬이 보기에 성스러움, 즉 종교란 인간의 본성 안에 뿌리 박혀 있는 선험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 역시 오토와 마찬가지로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치밀한 현대적 의미의 종교학적 시각으로 쇠더블롬의 연구를 반추해 보면, 그의 연구는 ‘종교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학도 시절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리츨과도 같이 쇠더블롬은 ‘하느님을 역사적 과정 안에서 스스로를 현현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자기 현현의 일회적 절정이 바로 그리스도였고, 이런 시각에서 공정하고 신실한 역사 연구는 결국 그 안에 현현하고 있는 절대적 진리(하느님)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는 믿음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종교학 연구는 지극히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 즉 절대적 진리이신 하느님이 역사 안에 현현하신다는 그의 확신 속에 나온 또 다른 의미의 ‘신앙적 행위’였음을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의 종교 연구가 신학적이었다고 부를 수 있으며, 아울러 이런 맥락에서 그의 유언이 가지는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종교학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유언은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른 물음이 되어 맴돌고 있다.

“당신은 ‘그분’을 믿는가, 아님 그분에 ‘대한’ 이념만을 추종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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