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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의 목적과 한계 - 종교역사학과 종교체계학

“경험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종교들이 종교학의 대상을 이룬다. 종교학은 그러한 대상들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설명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그리고 이 작업은 두 가지 입장으로 이루어진다. 종교학의 대상이 되는 종교들의 발전과 존재에 대한 연구, 즉 ‘통시적인 연구’(종교역사학)와 ‘공시적인 연구’(종교체계학)가 그것이다. 따라서 종교들에 대한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야 말로 일반 종교학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요아힘 바흐)


종교 간의 대화와 종교학자

독일 유학 중 난 방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정기적으로 매달 한번 이상 지도교수와 논문과 기타 전공에 관련한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당시 지도교수에게는 적지 않은 수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등록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 중 유일했던 아시아 출신 유학생인 내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곤 하였다. 그런 지도교수의 배려 속에 난 항상 정규 상담시간 중에서도 최우선으로 내게 편리한 시간을 배정받을 수 있었고, 또 적잖은 시간을 (물론 내 부족한 독일어 능력 탓이기도 했지만) 제공받곤 하였다. 보통 교수와의 면담은 1시간에서 2시간 사이를 오가곤 하였다.

그 날도 어김없이 지도교수와의 면담이 잡혀있었고 난 교수를 만나기 위해 아침부터 짧은 등산을 감행하고 있었다. 지도 교수의 연구실이 딸려있는 종교학과 건물이 바로 인구 7만의 대학도시인 마부륵의 상징이기도 한 오버슈타트(Oberstadt)로부터 성으로 올라가는 모퉁이 골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높고 험한 거리는 아니기에 많은 힘이 필요한 본격적인 등산은 아니었다. 그저 즐거운 아침 산책로 정도의 분위기가 넘쳐나는 길목 정도이다. 약간 땀이 날 정도의 산행(?)이면 난 교수의 연구실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난 그 방안에서 지도교수와 마주보고 있었다. 그날 먼저 운을 뗀 것은 나였다. 작정이라도 한양 난 학위 논문에 대한 의례적인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연이어 던졌다.

“한국에서는 적잖은 종교학자, 혹은 종교연구가들이 ‘종교 간의 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개중에는 그 일에 전적으로 투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꽤 보수적인 한국의 종교 현실 속에서 그들은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그와 같은 대화 작업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종교학자로서 종교 간의 대화에 투신하는 것에 대하여 교수님께서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지요?”

물론 한두 해를 지도교수와 보낸 것이 아니었기에 이 부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니나, 좀 더 분명하게 그 견해를 확인하고 싶어서 짓궂은 내 질문은 그날도 예외 없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내 질문이 선생 귀에 들리자마자 한 시도 머뭇거림이 없이 내 지도교수는 예의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로 답변을 풀어놓는다.

“종교학자들이 직접 종교 간의 대화에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학자들은 ‘통역자’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통역자는 상이한 문화의 이해를 위해 최선을 다해 그 문화를 이질적인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중립적 용어, 혹은 서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만약 통역자가 그 이상의 포지션을 갖고자 한다면, 그는 이미 통역자로서의 역할은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대화는 당사자들의 몫이지, 통역자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학자들은 서로 불충분한 이해를 갖거나 혹은 전혀 이질적인 문화적 환경 속에 있던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계기가 되었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나 혹은 자료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목적을 제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월권행위입니다. 우리는 학문적 통역자이지, 중개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 지도교수의 요지는 대화는 당사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학자들은 해당 종교 당사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구체적이고 정밀한 자료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 역할을 마무리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견해를 그런 식으로 피력한 것이다. 물론 모든 종교학자들이 내 지도교수와 동일한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적잖은 수의 종교학자들은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해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헌신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간과해서는 안 될 특별한 환경과 조건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대화를 위해 투신하는 시간에 좀 더 세밀한 개별 종교에 대한 연구 자료를 만들어내는 것이 종교학자들에게 더 필요한 작업이라는 내 지도교수의 지적 또한 쉽게 지나칠 성질의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종교학의 대상으로서 구체적인 종교

먼 길을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하다. 이제 새로운 여행길로 나서기 전에 지금까지의 여정을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태동과 그 인근학문들과의 갈등과 애증을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이제는 새로운 주제로의 전이를 꾀하기 전에,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의 정리로서 근대적 의미의 종교학이 가지는 목적과 한계에 대해서 재차 기술해 보고자 한다. 물론 지금 언급되어질 것들은 모든 종교학자들이 공감하거나 전적으로 찬동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종교학이라고 하는 것의 영역은 그리 편협치가 않다. 넓은 의미로 종교학을 잡아보자면, 지금까지 언급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종교학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현상학, 종교역사학, 종교심리학, 종교사회학, 종교인류학, 그리고 심지어 종교신학이나 종교철학까지 모두 종교연구라는 큰 틀에서는 종교학이라는 레테르를 붙이기에 큰 무리가 없는 것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언급하려고 하는 종교학의 목적과 한계는 좁은 의미의 근대적 종교학으로 영역을 한정토록 한다. 그러한 다양한 종교연구 분야들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운 종교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던 바로 그 종교학 말이다.

먼저 우리는 종교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종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할 필요성이 있다. 과연 종교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종교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물론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종교는 ‘단수로서의 종교’는 더 이상 아니다. 이전의 종교연구가들에게 ‘단수로서의 종교’는 보물섬을 일러주는 지도와도 같았다. 그들은 종교의 기원과 본질이라는 미지의 보물섬을 선점하기 위해 ‘단수로서의 종교’를 구하는데 끝없는 경쟁으로 치닫곤 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단수로서의 종교’는 하나의 신기루처럼 파편 같은 희망만 남긴 채 한 발짝 씩 더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이후 종교연구가들은 그러한 ‘무지개 잡기’ 같은 ‘단수로서의 종교 찾기’를 깨끗이 포기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구조주의적 시각을 지녔거나 혹은 종교심리학자들의 경우에는 여전히 ‘단수로서의 종교’에 짙은 파토스를 간직하고 있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종교학자들은 이제 그러한 이데아적 욕구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검증적 종교 연구가들로서 자신들이 연구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제한한다.

종교학이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으로서의 종교는 구체적인 종교들이다. 인간들이 형성한 사회 속에서 유의미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고, 그러한 공동체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사상, 언어, 문화들과 관련 맺고 있으며, 그 외의 다양한 주변 환경과 조건들의 연관 속에서 총체적인 제약을 받고 있는 매우 구체적인 종교‘들’ 말이다. 이렇게 다양성 속에서 현존하는 구체적인 종교들을 가지고 현대 종교학은 역사적이고 검증적인 방법을 통해 그 종교의 총체적 시스템과 그것들이 진행하는 다양한 관계들의 모습을 연구하고자 한다. 따라서 종교학은 어떤 경우에도 연역적으로가 아니라, 귀납적인 방법으로 시작해야만하며, 해당하는 종교들의 구조에 대한 이해 역시 귀납적 방법의 부산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현대 종교학은 나름대로 종교에 대한 작업 가설적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물론 이 역시 각자의 연구위치와 적용된 방법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단수 종교 찾기’의 철두철미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좁은 의미의 종교학은 종교를 무언가에 대한 기능으로, 그리고 어떠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혹은 어떠한 것의 구조로서 조망하거나 이해하려는 시도도 단호히 거부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의 결과물을 비교적으로 탐구함으로서 얻게 되는 구조적 이해에서 그들의 행보는 멈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학의 자기 제한은 병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그런 배면에는 이전의 종교신학이나 종교철학이 보여주었던 전횡적 태도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하고 있다. 종교학자들 역시 개별 종교의 총체적 모습을 완벽하게 그것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이전의 많은 신학자, 철학자들이 감행하기도 했던 한 종교의 역사적 과정과 그것에 대한 구조적 이해에도 성공치 못한 상태에서 과감하게 종교의 ‘보편’과 ‘일반’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히스테리적 반감이 좁은 의미의 종교학자들에게는 앙금처럼 남아있다. 그리고 사실 종교학자들의 이러한 병적인 반감은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설’처럼 진단하고 결론을 내어 버리는 전지적 작가들 때문이기도 하기에 딱히 종교학자들만을 탓하기도 뭣하다.

여하튼 이러한 이전의 작업들로 인하여 좁은 의미의 종교학자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작업을 반성하고 검증하고 또 제한하려고 한다. 그래서 적정선에서 타협한 그들 학문, 즉 좁은 의미의 종교학이 가지는 학문적 목적은 전적으로 지금 ‘이곳’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모습들의 종교들을 이해하는데 있다. ‘이곳’을 너머 ‘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종교의 이데아’에 대한 동경은 좁은 의미의 종교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이다. 현대 종교학이 철저히 ‘이곳’에 있는 ‘지금’의 종교‘들’에 집중한다는 것은, 바로 다양한 종교들의 인간적인 측면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즉 종교들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라기 보다는 그 종교들에 대응하는 인간적인 측면을 주로 관찰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학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종교들을 신앙, 행위, 그리고 종교적 사회체계들로서 조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기존하는 다양한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즉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 사변적인 환경들뿐만 아니라 지리적, 기후적, 생태적, 경제적 환경들과도 영향을 주고받는다. 또 이러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조건들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는 교육적,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인 제약 또한 고려의 대상이 된다. 이 처럼 현대 종교학자들은 세심한 관심 속에 ‘살아있는’ 한 구체적인 종교를 살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급적 인간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법과 그 결과물들을 주도면밀하게 취급할 수 있는 능력 역시 현대 종교학자들이 가져야 할 학문적 덕목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해하는 종교란? : 완전(heil)과 불완전(unheil)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종교학자들 역시 편의에 의해 나름대로의 종교 정의, 혹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두 번째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최근에 논의되는 종교에 대한 여러 이해들 중의 하나만을 간략하게 소개해볼까 한다. 물론 이 논의 역시 연역적 방법을 통해 도출해 낸 것은 아니다. 이 역시 다양한 종교들을 연구해서 얻어진 결과물들에 대한 정교한 비교작업이 가져다 준 한시적 정의일 뿐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비교작업은 단순히 여러 개의 대상물들을 현상적으로 비교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교학적으로 비교연구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바로 그러한 학문적 과정을 종교학자들 스스로가 망각해서도 안 된다. 여하튼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로 우리는 잠정적으로 종교를 ‘세계설명체계’와 ‘인생문제 극복체계’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대부분의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방식과 체계 속에서 해당 신앙인들에게 총체적인 세계 이해의 길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있고, 어떤 방식과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지, 또한 그 세계 속에 우리 인간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 등등을 종교는 사람들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들은 신앙인들에게 그들이 실존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조우하게 되는 다양한 삶의 문제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해당하는 종교적 가치를 유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들 상호간의 의존성은 더욱 돈독해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 가설적 정의를 내리면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보편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즉 종교를 세계설명체계라 하여 손쉽게 ‘세계’ 그 자체로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종교학의 과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 도출 과정 역시 신앙인들이 경험하고 발언한 결과물들을 중심으로 해서 얻어진 잠정적 결론일 뿐이다. 여하튼 이렇게 도출된 결과물들을 가지고 우리는 종교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코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완전’(heil)과 ‘불완전’(unheil)이다. 이것들을 우리는 종교의 기본적 구조라고 명명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검증적 작업의 최종적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루돌프 오토나 요아힘 바흐가 했던 작업과는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 오토와 바흐는 각각 ‘성스러움의 의미’와 ‘종교경험’을 종교의 본질적 요소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개별 종교의 검증적 연구의 결과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역적인 방법으로서 연구의 초두에 이미 관념적으로 설정된 보편적 개념들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 현대 종교학자들이 하고 있는 작업은 그동안 축적된 연구의 결과물들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는 잠정적인 결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heil’과 ‘unheil’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완전한 것의 유지’에 관한 것이거나 혹은 완전치 않은 그 무엇인가가 다시 ‘완전하게 회복’되어지는 것, 다시금 완전해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완전함’과 ‘불완전함’으로서 종교의 기본적 구조를 봄으로써 우리는 기존의 ‘성스럽다’라는 개념이 특정 종교에 치우친 듯한 흐름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게 된다. 다분히 가치중립적인 이 개념들을 통해 우리는 종교들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종교에는 성스러움이 있다 없다 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 구조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종교에는 완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종교라는 부분적인 시스템은 완전치 못한 것을 완전하게 하는, 혹은 완전치 못한 것을 전체적이고도 완전한 관계 속으로 이끌어오는 능력을 가진다. 이때 ‘완전하다’라고 하는 것은 한 시스템의 요소들, 구조들 혹은 부분들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관계에 의한 회복을 의미한다. 그런 구도 하에서 조망해보자면 모든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완전함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그에 도달하기 위한 각각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종교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완전함의 추구-완전함의 발견-완전함의 고양’이라는 새로운 모델링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종교를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종교학의 한계는

다시 자리는 내 지도교수의 연구실이다. 창문을 타고 아침 햇살이 포근하게 두 사람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앞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은 후 나는 재차 궁금증의 무게를 더해가던 또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검증적 종교학이 가지는 자기 제한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내 질문에 교수는 우선 옅은 미소로 응대한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질문이라도 나온 양 미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지도교수는 힘을 주어 자신의 견해와 의지를 피력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검증적 종교학이 가져야 할 덕목은 바로 ‘단수로서의 종교’에 대한 욕구 포기입니다. 이미 수차례 우리가 대화를 나누었지만, 단수 종교는 말 그대로 인간의 관념적 허상일 뿐입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종교적 이데아에 빠져있기 보다는 역사 속에서 생멸하는 다양한 역동적인 종교들을 연구하는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검증적 종교학은 ‘단수로서의 종교’뿐만 아니라, ‘단수로서의 인간’에 대한 환상 역시 거리를 두어야만 합니다. ‘인간성’, ‘(단수로서의) 인간’, ‘인류’ 이런 개념들도 ‘단수 종교’와 매 한가지로 지극히 작위적인 논리적 구성물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역사 속의 개별 종교와 개별적 실존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지녀야 합니다.”

이 즈음에서 뻔한 반문이긴 하지만, 이해의 도를 높이기 위해 난 작은 딴죽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이해합니다만, 인간이라고 하는 물적 제한을 지닌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공유한 특성도 있지 않을까요? 즉 인간은 역사 속의 존재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지닌 유한한 물리적, 육체적 조건은 어떤 점에서는 동일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은지요?”

하지만 내 딴죽에도 지도교수의 태도는 완고했다.

“물론 인간이기에 지니고 있는 제한적 조건들은 공유하는 바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생리적인 현상에 기반을 둔 인간의 행위들은 많은 점에서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육체적 조건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수용하고, 또 표상화하는 것은 각 문화별로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그러한 해석적 과정을 통하면서 각각의 문화적 이해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인간이라는 유기체에 기초해서 ‘인간의 원형’을 상정하는 것 역시 과도한 억지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지도교수의 답변은 계속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종교학은 자신의 연구대상을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욕심마저 포기해야 합니다. 그 대상에 대하여 ‘완벽히 이해하겠다’라는 식의 집착은 오히려 종교학을 ‘메타학문’으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즉 검증학문으로서 대상에 대한 잠정적 이해에 충실해야 할 종교학이 메타학문이 되어 연구의 대상을 쉽게 관념화하고 이념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메타학문이 된 종교학은 더 이상 종교학이 아니라, 종교철학이요 종교신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학은 무엇보다도 해당하는 종교들에 대한 검증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와 또 그것들이 해당하는 공동체 속에서 어떤 관련들을 맺고 있고 또 어떤 연관성 속에 실존하고 있는 가를 비교적인 방법으로서 고찰하는 것에 정직하게 멈춰 서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바로 다음 단계와도 연결되는데, 종교학은 자신의 연구를 전체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즉 종교학적 연구는 종교라고 하는 전체의 한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는 자의식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종교학의 과제는 전체 체계 그 자체만을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부분체계들로서의 종교를 전체체계의 원리로서 높여서도 안 됩니다. 단지 그 관계와 연관성을 주목하여 이해가능한 선까지 기술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여기서 잠시 내 질문이 지도교수의 긴 답변에 작은 휴식을 주었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무엇보다도 종교학이 (종교)철학 류의 규범적 종교연구로 변질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계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학은 종교철학과도 같은 규범학문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여러 모습으로 포장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종교철학 같은 학문은 궁극적으로 단일종교적인 모습으로 귀착되기 쉽습니다. 즉 대부분의 종교철학들은 특정한 종교에 의해 형성된 사유구조 혹은 세계관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세계관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종교철학적 일반화 혹은 절대화는 개별 살아있는 종교들에 대한 이해라는 점에서는 절망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종교철학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종교적 체계와 사유-언어구조에 종속되어 있고, 따라서 그 방법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들 역시 그러한 제한 속에 있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런 작업들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종교학마저 그런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생존하고 있는 종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술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소기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성급한 일반화는 오히려 그 종교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왜곡’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물론 종교학 내에서도 일반화 작업은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종교현상학이라 불리는) ‘종교체계학’이 그것입니다. 종교체계학은 종교역사학이 제공해준 다양한 역사적 연구 결과물들을 가지고 작업을 합니다. 종교체계학은 주로 ‘비교’라는 또 다른 해석학적 작업을 통하여 다양한 결과물들을 분류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유하는 구조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결과물들에 대한 ‘이름 짓기’를 감행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종교체계학 내에서의 ‘이름 짓기’, 즉 일종의 구조화 작업 역시 최종적인 단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급한 비교와 해석학적 반성이 없는 유비를 통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최대한 막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종교학은 종교역사학과 종교체계학이라는 두 개 바퀴의 조화로운 작업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대화의 종착역에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내 지도교수의 최후 진술을 확인해보았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생각하시기에 종교학, 좁은 의미로 따지자면 종교역사학과 일반 역사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두 개의 분야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상의 특징은 또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종교역사학이나 일반 역사학이나 같은 선상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론도 같다고 봐야 합니다. 단 일반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문화현상, 역사적 결과물을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종교역사학은 종교라는 문화현상에 국한하여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 외 이 두 분야 모두 동일한 선상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지도교수의 답변은 전형적인 독일식 역사 비평적 종교학 전통 위에 서있는 답변이다. 동일한 질문을 영미권 학자들에게 던졌다면 좀 다른 답변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철두철미하게 검증적 위치에서 객관적으로 연구 대상을 조망해보려는 지도교수의 태도는 그렇게 쉽게 무시할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여하튼 종교학의 목적과 한계에 대한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지금까지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태동과정과 주변 학문들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추적해 보았다. 이제 우리가 가야할 다음 여정은 종교학이라는 근대 학문이 성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몇몇 유력한 학자들을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보는 일이다. 대략 6명 정도의 중요한 종교학자들의 궤적을 추적해봄으로써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바다에 한걸음 더 깊게 들어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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