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2301 추천 수 33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종교연구에 있어서 진리의 문제
- 종교학과 종교철학


“종교학이라고 하는 분과학문은 두 개의 극 사이에서 흔들리는 운명에 처해있다. 그 두 개의 극은 신학적 혹은 철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헌학적이고 역사학적인 것이다.” (쿠어트 루돌프)


진리에 대한 입장의 차이

결국은 진리에 대한 문제이다. 진리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질문제기 자체가 과도한 월권행위인가? 서로의 입장에 따라 이 진리의 문제는 예민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종교학과 종교철학도 마찬가지이다. 결국은 종교를 연구할 때 제기 될 수 있는 이 진리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에 따라 두 분과학문은 서로 다른 처방전을 내어 놓게 됨으로써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우선 종교철학은 종교(일반적으로 ‘단수’로서의 종교)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진행하면서 당연히 이 진리의 문제를 함께 취급코자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옆에서 동일한 연구 대상들(‘복수’로서의 종교)을 다루고 있는 종교학자들은 그러한 종교철학자들의 주장을 ‘과도한’ 것이라 진단한다. (좁은 의미의 현대적) 종교학자들의 시각에 모든 종교‘들’을 아우르는 이데아적 ‘종교’를 설정하고, 또한 그것을 학문적 탐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종의 과욕이며 또 다른 의미의 ‘창작 행위’라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렇듯 검증적 위치에서 종교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종교학자들은 종교철학에 대해 회의적이다.

일단 이러한 종교학자들의 경향을 하나의 화두로 잡고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자. 하지만 나는 종교학과 종교철학의 애증과 반목,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서 약간의 꾀를 내어본다. 그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다는 구실 하에 이 두 분과학문 사이의 지난한 논쟁의 이론적 서술은 가급적 피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진리문제’라고 하는 것 자체가 즉답이 곤란한 것이기도 하고, 또 그러한 것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며 지루하게 끌고 가는 것 자체가 글 쓰는 이나 그것을 읽는 이 모두에게 적잖은 고충이 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된 엄살이 그러한 ‘편한 길’의 유혹에 넘어가게 한다. 여하튼 그러한 고충을 뒤로 넘기고 오늘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하여 현대 종교학과 종교철학이 가지는 차이와 갈등을 표출시켜보고자 한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내 지도교수와 미국에서 건너온 터드(Todd)라는 이름의 한 학생이다. 이 대화록은 실제로 있기도 하였고, 또한 나 역시 그 대화의 한 구석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우리들의 대화는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 대화는 수년전 내가 독일에서 학위 중이었을 때 당시 박사반 세미나에서 한 학기 동안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소개하는 대화는 당시 실제로 이루어졌던 대화만으로 재구성한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시의 대화가 좋은 소재가 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 수업과 이후 나의 공부 속에 내 안에 형성된 종교학과 종교철학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이 대화를 재구성하는 직접적인 동인이 되고 있다고 토로하는 것이 보다 정직한 고백일 것이다. 따라서 이 대화에서 언급되는 학문적 논의와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속해있다고 보아야 하며, 아울러 그에 대한 책임 또한 나의 것이다.


종교계 대학 내에서의 종교 문화교육의 필요성: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일 뿐이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재구성하기 전에 한국 대학 내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에 관련한 수업들과 관련하여 몇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보통 한국의 종교관련 대학들, 특히 신학대학들은 다양한 종교관련 수업들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해당하는 종교전통의 변론적 성격을 지닌 신학과목들은 당연히 개설되어 있다. 그리고 전문적 신학 과목 이외의 객관적으로 종교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계도해주는 다양한 현대 학문들을 소개하는 과목들 역시 대부분의 학교들은 제공하고 있다. 보통 그 과목들은 종교사회학, 종교심리학, 종교인류학 그리고 종교철학 등등의 과목이다. 이들은, 이전에 언급을 했듯이, 종교를 규범적으로 혹은 환원적으로 연구하는 분과학문들이다. 최근 들어서는 학교마다 나름대로 종교학 관련 수업들도 개설되고 있는 편이긴 하다. 보통의 경우 ‘종교학입문’이나, ‘비교종교학’ 혹은 ‘세계종교의 이해’등과 같은 종교학 유관 과목들이 개설되어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과목들이 대부분 필수나 혹은 선수과목 등으로 채택되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종교학 관련 수업들은 선택들이고, 그나마 개설되는 주기가 들쑥날쑥인 경우가 적지 않다. 다행히 몇몇 학교들은 종교학 관련학과가 설치되어 있어서 신학교육과 더불어 다양한 종교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제도적인 기회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종교학개론’이나 ‘비교종교학’ 정도가 개설된 수업의 전부이고, 그 나마 전문적인 강의자에 의해서 수업이 진행되는 경우가 그리 흔치 않다. 특히 ‘비교종교학’의 경우에는 정도가 좀 심한 편이기도 하다. 현대 종교학에서는 ‘비교종교학’이라는 명칭 자체를 극도로 자제하는 편이다. ‘비교’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가치판단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명칭 부분이야 그렇다 치고, 그러면 그 이름하에 교수되고 있는 수업의 내용은? 솔직히 정교한 비교종교학에 대한 수업도 그리 많은 편이 못된다. 대충 그 이름이 주는 의미 때문에 그런가? 비교종교학이란 이름하에 그저 다양한 종교들의 교리적 비교, 혹은 대조 등으로 수업이 마무리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도 대부분 특정 종교전통의 절대적 우위가 수업 내내 반복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약간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종교의 정의니, 종교학의 태동이니 하는 정도의 언급이 첨가된다. 대부분 그 뿐이다. 그렇게 비교종교학은 정리되고, 또 그것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종교학개론 역시 마무리된다. 따라서 종교학이라고 하는, 혹은 비교 종교학이라고 하는 분과 학문이 어떤 역사적 상황과 배경 속에서, 그리고 어떤 학문적 요청에 의해서 태동되었고, 그들은 어떤 시각으로 종교‘들’을 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학자들이 등장해 어떤 철학적 사상적 배경 하에서 종교학적 이론들을 형성하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시각도 제공되지 못하고 종교학 관련 수업들은 종결되기 십상이다.

이미 수차례 밝혔듯이 종교라고 하는 문화현상을 가급적 규범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검증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것을 정확히 역사적으로 ‘기술’하기 위해서 종교학은 태동되었다. 그리고 같은 종교라고 하는 대상들을 보지만, 역사적 이해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결여된 그리고 종교적 경험의 가치를 사회적 기능을 위한 도구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기타 사회과학분야의 전횡(?)에 맞서고자 했던 것이 바로 종교학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보수적이라 자임하고 있는 한국의 많은 신학대학들에서 출발자체가 ‘반신학적’이기도 한 기타 다양한 사회과학적, 심리학적 분과학문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반면, 그런 식의 환원주의적 종교연구에 반기를 들고 종교를 종교로서 진지하게 대접하고자 일어난 종교학에 대해서는 홀대하는 희극적인 상황이 한국 사회 내에서는 빈번히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인가? 그렇다면 지금 그들이 배우고 있는 환원주의적 종교연구 방법들에 대한 태도는 또 어떤 의미인지? 여하튼 이런 저런 이유로 종교학 관련 수업은 환원주의적 종교연구 방법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쉼 없이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와 문화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축적된 준비가 없는 상황 속에서 발설되는 그리스도교계 쪽에서의 타종교문화에 대한 언급은 경우에 따라 상당한 수준의 부실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때로는 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며, 내용적으로도 충실한 이해가 엿보이지 않는 발언들이 흘려지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한국 그리스도교계는 쉼 없이 종교 간의 공존을 이야기 하며, 종교 간에 상호 존중할 것을 반복적으로 설파한다. 이 점에서는 진보나 보수 계열 모두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내용 역시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 간혹 이웃 종교 간의 대화에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이는 분들의 언급 중에서도 상당히 문제가 있을 법한, 혹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표현되는 기술들이 눈에 띠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한 울타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혜택(?)때문인지는 몰라도 별다른 반론도 없이 또 일회성으로 끝나는 립 서비스만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속한 대학 내의 종교관련 수업에는 전문가들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 분야의 제대로 된 전문가 양성에 대한 필요성조차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한국 그리스도교계는 한국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의 불충분함을 곳곳에서 노출시킨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선교 종교로서의 목적에는 충실하려 애를 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 내에서 그리스도교는 소수이다. 물론 그리스도교 자체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현 한국 사회 내에서 그래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 종교는 바로 그리스도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통계의 결과는 한국 사회 내에서 그리스도교가 차지하는 수량적 지위는 고작 20%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그렇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 중 무려 80% 정도에 해당하는 이들이 비그리스도교적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 8% 정도의 가톨릭을 범-그리스도교계로 포함한다면 대략 그 수치는 70%정도로 줄어들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 70이라는 숫자도 적은 것은 아니다. 아니 꽤 큰 편이다. 즉 이 수치가 말해주고 있는 바는 문화적으로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이 사회에서 소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역을 벗어나서 만나는 이들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 종교로서의 본래적 성격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선교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준비작업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자면, 바로 이 부분을 준비하고 교육하는 그러한 과정이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많은 부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들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 개신교회가 이와 같은 서늘한 문화적 현실을 제대로 독해하고나 있는 것인지 때로는 경이로워 지기까지 한다.


미국인 종교철학도와의 대화: 진리에 대한 물음은 가능한가?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 대화의 주인공들은 종교학을 업으로 하고 있는 한 독일 교수와 종교철학으로 학위를 하고 있는 미국인 유학생이다. 내 지도교수이기도 한 플라쉐(Rainer Flasche) 교수는 철저히 문헌역사비평적인 방법을 학문적 토대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독일 종교학자이다. 그 상대편에 서있는 미국 유학생은 터드란 이름의 클레이몽트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하는 친구이다. 마침 이 친구는 나와 같은 부부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종종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1년여 절친하게 지냈다. 우리들의 대화는 터드가 1년짜리 교환 학생으로 내가 학위 중이던 학교를 방문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마침 이 친구는 종교학과 박사반을 위해 개설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열혈 종교철학도와 쿨한 독일 종교학도 간의 끝없는 대화가 시작되었다. 내 지도교수의 박사반 세미나는 학교가 아닌 카페에서 진행된다. 마브륵 종교학과가 생긴 이래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전통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날짜와 시간도 벌써 수십년째 고정되어 있다. 목요일 오전 11시 고색 찬연한 마브륵 시청 광장에 있는 ('Zur Sonne'라는 이름의) 한 카페 2층 구석 테이블에 앉아 평균 5-8명 정도의 종교학 전공 박사반 학생들은 그들의 지도교수와 함께 정해진 테마를 가지고 매 모임마다 2-3시간씩의 토론을 진행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위치에 교수와 학생들은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 취향에 맞는 음료를 앞에 두고 때로는 성실한, 때로는 지루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날 우리는 루돌프 오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토. 종교연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학자이며, 바로 우리가 강의를 듣고 있는 마브륵 대학 신학부의 조직신학 주임으로 오래도록 교수생활을 한 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날따라 내 지도교수는 오토에 대한 날선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오토가 종교연구에 있어서 ‘성스러움’(Das Heilige)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킨 공헌은 있지만, 그것을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제기한 것은 검증적 방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연구나 심리연구에 치우친 감이 있습니다. 그는 종교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보다 비합리적이고 경험적인 요소가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라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지극히 선험적 선언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작가가 작품을 구성하듯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탐구에 등한시 한 안타까움을 남겼습니다. 오토의 시선이 보다 더 역사적이었다면, 그는 좀 더 유능하고 의미 있는 종교학자가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는 그 길을 가지 못하고 그가 끝까지 머물렀던 신학자의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종교학자라기 보다는 종교신학자, 혹은 종교철학자로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서 종교철학이라는 용어도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는 보편적인 종교성을 언급하고 싶었겠지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역시 일반적인 종교철학을 주도하고 싶었겠지만, 여전히 그의 종교철학은 제한적인 것이고 아울러 그가 처한 그리스도교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기에, 차라리 그리스도교철학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말이 정리가 되었다면, 그 날의 뜨거운 논쟁은 이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교수의 발언은 그 보다 한 걸음 더 달아나고 말았다. 연속적인 구술로 인해 목이 말랐던지 앞에 있는 음료수를 길게 들이 킨 후 지도교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결국 사람들은 종교철학을 한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보편적인 종교의 본질과 현상을 취급하는 그런 류의 종교철학은 이 지구상에는 없습니다!”

고집스러운 지도교수의 성격처럼 딱 부러지는 선언이 등장하고 말았다. 하지만 저 정도의 발언이야 그의 제자들인 우리들로서는 늘 들어오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오히려 반복되는 방송국 멘트와도 같을 뿐이었다. 그래서 논의의 주제를 새로운 방향으로 틀려는 순간. 여전히 어눌한 독일어 발음(독일어 발음에 미국식 버터냄새가 물씬 풍기면 역설적이긴 하지만 무척 촌스럽게 들린다)을 한 터드가 입을 열었다. 좀처럼 세미나 시간 내내 자신의 생각을 던지지 않던 친구가 오랜만에 제동을 걸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우고 이 미국인 철학도의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잠깐만요! 방금 하신 말씀 중에 ‘그런 류의 종교철학은 없다’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종교성에 대해 논구할 수 있는 종교철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학자들만이 종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들 역시 종교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철학도에 의해 언급되는 종교는 개별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종교의 본질적인 요소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난 지금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도들 역시 종교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걸 부인하거나 혹은 독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철학도들이 말하는 종교는 ‘단수로서의 종교’이고, 그러한 종교는 이 세상에 실존한다고 말하기 곤란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단수로서의 종교’라니요?”

“예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란 단수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종교‘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본질적 요소로서의 단수 종교는 연구자들의 희망과 머릿속에만 있을 뿐입니다. 현장과 역사 속에서 만나지고 발견되는 다양한 종교들은 말 그대로 다양함 속에 있는 진행형들입니다. 그들은 각자의 고유함을 가지고 각각의 문화적 환경과 배경 속에서 여전히 진행적인 자신들만의 독특함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연구자가 그 모든 것들을 포섭하는 한 개념으로서 종교가 무엇 무엇이라고 규정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현장에서 만나는 살아있는 종교들을 이해하고 기술할 수 있는 여지를 잃게 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종교들’만 있지, ‘종교’는 없습니다. 만약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스미스의 이야기처럼 ‘개인의 신앙’(personal faith)으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모든 이들의 신앙을 포섭하는 본질로서 동일한 내용을 지닌 신앙이라고 하는 것 역시 전무합니다. 신앙이란 지극히 개별적이고 실존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철학자들은 마치 그러한 종교가 있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강요합니다. 그들의 논의 속에는 현장에서 만나지는 종교들보다는, 논리 속에 화석화된 이념적 구성물로서의 종교만 있을 뿐입니다.”

“왜 그렇게만 생각하시나요? 전통적으로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 고민해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그 무엇, 그리고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관념 등에 대해서 연구하는 분야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개별적인 종교들보다는 인간의 종교성 혹은 종교적 관념에 대한 탐구를 해왔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종교철학이란 그렇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예, 물론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종교의 기본이 된다고 여겨지는 신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성에 대해서도 언급해왔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그 과정을 고찰해본다면, 그러한 종교적인 것에 대한 논의는 주로 서구에서 이루어졌고, 그리고 서구에서 이어져오는 종교에 대한 담론은 대부분 특정 종교에 치우친 것이 사실입니다. 예, 지극히 그리스도교적인 시각으로 채색된 종교철학이라고 볼 수 있죠. 그것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 봐야겠죠. 신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이니 진리의 문제니 하는 것들 사실상 그런 논의의 주제들 자체가 지극히 그리스도교적인 옷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이지 않나요? 그런데 왜 정직하게 그리스도교 철학이라 하면 될 것을 왜 구태여 단수로서의 종교철학이라 이름붙일 필요가 있나요? 마찬가지로 다른 전통에서의 종교에 대한 철학적 접근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 상황 속에 내 던져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역사라고 하는 선이해 속에서 사물과 세계를 받아들이고 해석합니다. 종교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종교전통이라는 창을 통해서 종교들을 볼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유의 철학적 반성을 거친다 하더라도, 그가 도출해 낸 종교에 대한 보편적 결과물은 당연히 그의 선이해라는 한계를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난 보편을 추구하는 종교철학이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 무슨 말씀인줄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종교철학자들 역시 그런 문제의식을 인지하고 서구의 학자라 할지라도 단순히 기독교에 대해서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존 힉 같은 종교철학자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이해도 해박하고, 나름대로 전문적인 식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하는 종교철학은 교수님이 비판하는 그런 성급히 보편 작업을 하는 기왕의 종교철학과는 구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진리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한 그 역시 한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객관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관이요, 실존과 경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주관과 실존의 세계에 객관적인 진리 혹은 가치의 문제를 제기하고 집중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문제 왜곡’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에 관한한 연구자는 가급적 철저히 기술자의 관점에 서야 합니다. 그것을 가치판단을 통한 결정권자처럼 서는 순간 그는 객관성을 상실하고 특정 종교의 변론자가 될 따름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진정한 종교철학은 가능하기가 쉽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학의 연구는 너무 허망하지 않습니까? 진리의 문제도 가치의 문제도 포기해버리게 되면 남는 것은 역사적, 그리고 현상학적 연구일 뿐인데. 그 연구를 통하여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요? 그냥 해당 종교들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그것에 대한 기술만으로 학문적 작업이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요? 우리에게 이성이 있는데, 바로 그 이성을 도구 삼아 다양한 종교들의 보편적 구조를 찾아낼 수 있지 않나요? 그리고 종교학 분야에서도 현상학적 연구는 그런 구조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나요?”

“예 바로 그 점에서 종교학과 종교철학은 분명히 서있는 포지션이 다릅니다. 종교학은 진리와 가치의 문제에 발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적 학문을 하는 이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창기 종교학자들은 과감하게 진리와 가치의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 델 레우도 그랬고, 그리고 후에 종교체험의 선험적 연구에 몰두했던 바흐마저도 사후 그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가면서 종교학은 나름대로의 학문적 임무와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종교학은 그동안 정상적인 대접과 취급을 받지 못했던 다양한 종교들을 성실하게 탐구하고 정확히 기술하는데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학의 사명이요 임무로 자임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기술한 결과물에 대한 가치평가나 판단은 해당하는 전통의 신앙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럴 권리는 그들 신앙인들은 지니고 있고, 종교학자들은 그들의 판단을 존중하고 또 연구의 영역에 수용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들 신앙인들이 발언하지 않는 것, 그 이상을 이성을 도구삼아 도식화한 후 그것이 그들 종교전통의 본질이라 혹은 절대적 진리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학내의 현상학적 연구도 그러한 다양한 종교적 현상들을 보다 면밀하고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한 방편적이고 잠정적인 ‘구조 찾기’이지, 그 구조자체의 ‘이상화’를 위해서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후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대강의 큰 틀은 앞서 소개한 것이었고, 나머지 대화는 그 틀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었다.


타협점은 없는가?

위의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겠지만, 사실상 (좁은 의미의) 종교학계에서 종교철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신은 적지 않다. 그리고 그 불신의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기존의 종교철학이 너무 그리스도교라는 특정 종교에 기울어져 있음을 종교학에서는 지적한다. 신학용어로 포장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철학의 용어로 진행되는 신에 대한 존재론적인 증명이나 그러한 신에 대한 근거 논증 등과 같은 기왕의 종교철학적 테마는 지극히 그리스도교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학자들의 고민과 의심의 눈초리가 거세어진다. 근대적 의미의 종교학은 가급적 모든 종교들을 편향되지 않고 동등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관심과 책임 하에 태동하게 되었다. 이런 분과학문의 입장에서 특정 종교의 색채가 강한 논의의 결과물을 수용한다는 것은 자칫 그들 설립의 근거를 흔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것이 종교학자들이 종교철학에 대해 갖는 첫 번째 우려인 것이다. 물론 앞서 미국인 학생이 언급했듯이 종교철학 내에서도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들에 대해 해박하고, 또 실제로 그들의 연구 작업에 다양한 종교들을 포함시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의혹의 눈초리는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학자들은 그들이 다양한 종교들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면 역으로 상호 어떤 식으로 기왕의 연구자가 소유한 종교적 배경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작업할 때 끼어들어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가를 검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정말 종교학과 종교철학의 타협점은 결코 없는 것인가? 이들 상호간의 불신은 평행선을 그을 뿐인가? 동일한 연구대상을 가지고 작업을 하면서도 서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결과물들을 이 양 분과학문들은 양산하고 있을 뿐인가? 물론 이 두 학문은 서로의 가야할 길이 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불기 시작한 종교철학계의 새로운 흐름은 나름대로 종교학과의 접촉 가능성을 열도록 해주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철학계 내의 종교에 대한 인식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1, 2차 대전 이후 철학계의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생철학, 실존철학, 그리고 분석철학 등이 이전의 종교에 대한 존재론적인, 인식론적인 철학적 접근 이외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즉 이들 철학사조는 종교에 있어서 보다 언어적 영역에 관심을 갖게 했으며, 아울러 종교적 언어 속에서도 경험적 요소가 적지 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계속해서 이들 흐름 속에서 종교철학의 종교에 대한 작업한계를 이전과는 달리 보다 명확하게 내려주기 시작하였다. 즉 이제 철학은 종교적 신념들에 대해서 가타부타 판단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단지 철학은 종교적 신앙이 가지는 문법적 구조와 그 의미를 분명하고 명백하게 규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철학은 그 이후 종교에 대한 그 어떠한 가치판단도 보류해야 한다. 바로 이 정도로 종교철학의 과제를 정돈해 준다면 종교철학적 작업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물들에 대해서도 종교학자들은 어느 정도 경계심을 허물고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언어를 ‘특별한 인식’(discernment)과 ‘책임’(commitment)으로서 분석하고자 했던 램비(I. T. Ramsey)나 종교언어의 비인식론적 특성을 주장하면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브레이트웨이트(R. B. Braithwaite)의 이야기는 종교학계에서도 관심을 가져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들 새로운 종교철학적 흐름들을 종교학이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종교철학이 묻고 있는 진리의 문제에 종교학도 적극적으로 답변을 시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이들 작업을 통하여 기존의 진리문제에 대한 질문방식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이제 더 이상 진리나 가치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거나, 아니면 참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참된 행위에 대한 질문으로 그 내용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보편적 종교에 대한 의미추구나 혹 그것을 변론하려고 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종교철학적이지 종교학적인 입장은 아니게 된다. 여전히 그런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그리고 지극히 철학화 된 질문에 대해서 종교학이 취할 여지는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종교철학과 종교학이 가고 있는 길은 평행선을 달린다.  



  1.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