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 강의
2005.02.28 13:27

종교를 이해하려는 여러 시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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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이해하려는 여러 시도들

“종교학자들은 여러 종교들을 대할 때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체계를 연구를 위한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이의 신앙을 편견 없이 연구하는데 있어서 자유롭다. 문제는 그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자유를 감내할 수 있는가 일 뿐이다.” (H.J. 그레샤트)


결국 편견을 버리는 일

지난 반세기 한국 개신교는 유례를 살피기도 힘들 정도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급격한 성장의 후유증인가? 작금 한국 개신교는 그 성장에 대한 반대급부로 만만치 않은 다양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의 중심에 언제나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신앙형태가 너무도 '기복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복주의 신앙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의 기층을 차지하는 샤머니즘, 혹은 무교의 바람직스럽지 못한 영향 때문이라는 진단이 별반 고민 없이 내려지고 또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런 식의 치밀한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정언적 선언이 한국 개신교의 구체적인 신앙형태에 대한 진단으로 당연시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한국인들의 기층적 종교 심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제대로 규명되지도 않은 일종의 ‘이념적’ 개념인데, 그것을 마치 당연하다는 식으로 진단의 한 축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잖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솔직히 작금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교라고 하는 종교현상에 대해서도 많은 갈래의 논의와 담론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쉽게 그것이 원초적인 한국인의 종교성, 혹은 종교적 심성일 것이라 운운하는 것은 지극히 과학적이지 않은 일종의 독단적 진단내리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손쉬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무엇보다도 샤머니즘 혹은 무교라고 지칭되는 종교현상의 역사적 과정을 보다 철저하게 검토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그러한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생각의 한 곳에 놓아두고, 앞서 언급한 ‘한국 개신교의 기복신앙은 무교로부터 왔다’라는 명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말에는 알게 모르게 우열적인 가치판단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전반적으로 이 문장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뉘앙스는 부정적이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요소는 개신교의 신앙이 ‘정상적이지 않다’라는 판단에 기초하며, 그 판단의 근저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그것은 무교로부터 왔다’라는 견해가 도사리고 있다. 즉 이 명제로부터 우리는 ‘무교는 우월한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기복에만 치중하는 좀 열등한 신앙체계’라는 가치명제 하나를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지극히 작위적이고 일방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인들이나 신학자들은 특별한 고민 없이 이것을 정당한 판단을 담고 있는 문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이 문제에 집착해 보도록 하자. 앞서 언급한 명제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 부정의 의미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마도 ‘기복적’이라는 단어로부터 일 것이다. 기복(祈福)이란 말 그대로 ‘복을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복을 빈다는 것은 사실 꼭 종교적 행위가 아니더라도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인간의 일상 행위들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어느 종교 전통치고 기복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이 기복행위 자체가 문제가 있다 라기 보다는 무교에서 말하는 기복의 내용, 혹은 그 범위가 인간의 상식적 윤리수준에서는 좀 도에 지나친 것이라는 가치 판단이 앞서 언급한 문장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장의 배면에 깔린 의미를 좀 더 외부로 노출시켜보자면 ‘한국 개신교의 도에 넘친 기복행위는 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미신적인 무교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문장이 재구성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분석에 이르다 보면, 우리는 기존의 한국 개신교 신앙의 부정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관찰자의 시각 속에 ‘무교의 기복은 정상적이지 않다’라는 또 하나의 검증받지 못한 판단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자, 여기서 또다시 문제가 시작된다. 과연 그런 것인가? 한국 사회의 만연된 무교 전통에서는 끊임없이 과잉기복, 혹은 잉여기복을 조장하고 있는가? 정말로 무교의 종사자들, 혹은 무당, 백수, 심방 등은 끊임없이 넘쳐나는 기복을 자신의 의뢰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반윤리적인 파렴치한들인가? 그들의 기복행위는 기독교의 신앙행태를 변화시킬 정도의 부정적인 요소를 참으로 지니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무교를 보다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종교학자들과 인류학자 그리고 민속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존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무교의 신앙이 ‘기복적이다’라는 생각을 실제로 무교의 신앙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살펴보게 되면 기존의 그러한 판단과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사실 무교의 신앙생활 속에서의 기복은 문제를 가진 이의 해결을 희구하고 기원하는 것을 의미하지, 분에 넘치고 도를 지나치는 ‘재물의 축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굿 의례를 하거나, 무당의 공수를 받고, 또 점술행위를 하는 대부분 무 의뢰인들은 당시 그들이 처한 실존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단 당면한 문제의 해결 혹은 해소에 전념할 뿐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축재에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복을 개인주의적 축재나 그 이상을 넘어서는 이기적 행위의 연장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시도는 기실 무교적인 신앙행태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편견이 만들어낸 ‘작위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편견적이고 단견적인 시각에서 해방된다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무교라는 종교현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기존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한국 개신교의 기복적 신앙의 원흉처럼 인식되고 있던 무교에 대한 시각은 어느 정도 교정되어야 할 성질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면 이제 우리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을 새로이 내릴 필요가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극히 부정적이고, 억압과 해체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무교에 대한 개신교의 전형적인 시각도 어느 정도 수정되어야 할 단계에 왔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쉽게 개신교 신앙의 문제점에 대한 새로운 진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개신교 쪽의 진단이 기존하는 무교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아닌가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편견 없이 종교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의 대 사회적 역할을 관찰하고자 하는 종교연구가들의 필요성이 요청된다. 그들의 검증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결과물이 없었다면, 계속적으로 한국 개신교는 작금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부조리함에 대한 정당치 못한, 혹은 제대로 된 진단과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조치도 제 때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한국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제 3의 시각’에 관심을 두고 또 귀를 열어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로부터 균형 잡힌 이웃종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얼마나 제대로 된 한국 교회의 이 사회 속에서의 위상정립에 사용하고 있는가? 곰곰이 되 새겨봐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또 혹자는 다음과 같은 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무교는 선교의 대상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우상일 따름이다. 그리고 우상은 부정적이기 마련 아닌가? 그런 것에 왈가왈부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선교적 마인드를 좀 더 연마하면 될 뿐이다!” 그렇다 틀린 말은 아니다. 더군다나 선교종교인 기독교에 속한 이로서, 더군다나 기독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 이로서 이 정도의 반문은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선교의 대상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인가? 적어도 그들이 하는 행위의 진의는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혹자는 그것도 필요 없다고 보기도 할 것이다. 그냥 복음만 전하면 되지 않느냐는 고함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도 그러한가? 오히려 그러한 고함은 그에게 복음의 참 얼굴을 소개도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척지게 만들지는 않던가? 결국 선교 대상을 위한 문화적 이해시도는, ‘나’를 ‘그’에게 ‘소개’하기 위한 ‘전(前) 단계’일 뿐이다. 그를 이해하려는 나의 시도는 따라서 나를 그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작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우리가 선교의 대상이 되는 문화권에 대해 성실한 이해와 연구를 수행하고 실천하는 것, 바로 이러한 세심한 준비와 행위 속에서 이미 선교는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열정만 남고 이해가 빠진 선교가 전해주는 소름끼치는 소문들을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편견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이해와 따뜻한 시선을 채워 넣는 일, 작금 한국사회의 기독교가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결국 이런 점에서 종교학은 특정 종교에 편중함으로써 생기게 되는 편견으로부터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해주는 보조 역할을 나름대로 해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얻어진 여러 종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은 그리스도교가 이 사회, 이 문화에 보다 더 적절히 적응해 가는데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 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학이 가지는 그러한 균형 잡힌 시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바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존의 신학적 종교연구와는 달라졌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종교학은 종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양한 이 지구상의 종교를 제 3자의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 점에서 자신의 종교, 혹은 신앙을 변증하고, 고백하고자 하는 신학적 연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게 되며, 제 3자적 시각으로 다양한 종교전통들을 이해하고 기술하려 함으로 인해 각각의 종교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중간지점을 종교학은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종교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유독 종교학만의 전유물이었던가? 그렇지는 않다. 18세기 유럽사회를 지배했던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권 하에 바야흐로 종교를 신앙의 눈이 아닌 세속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것은 종교에 대한 다양한 새로운 학문들의 등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상적인 차원에서 종교에 대한 이러한 세밀한 시각의 움직임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쉽게 종교학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진리, 혹은 절대자에 대한 논의를 핵심으로 하는 어떤 철학적 학문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서 난 하나의 에피소드를 적어두려 한다. 그것은 누군가 내게 메일로 질문한 것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질문자는 내게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 종교학은 그러한 존재의 질문에 답변을 늘어놓는 분과학문은 아니다. 따라서 종교연구에 대한 세속적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18세기의 정신세계를 분석하기 전에 쉬어가는 대목으로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잠시 이곳에 걸어두도록 한다.


에피소드 하나: 종교학은 존재를 다루는 것이 아닌가요?

“전 요즘 존재, 존재성, 존재감 등등에 대해서 절실한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고민을 해결하는 분야로서 종교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이 존재의 문제를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종교학을 시작해야 할까요? 아, 그리고 종교학뿐만 아니라, 신학에도 전 관심이 많습니다. 이 두 학문에서 존재의 문제를 취급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더 적당할까요?”

“질문하신 분께서 고민하시는 "존재"에 대한 질문은 언급하신 신학이나 종교학과에서는 해결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단적으로 신학과 종교학이라고 학문의 속성상 그 부분에 대한 질문 자체가 난센스가 되기 때문이지요. 우선 신학은 존재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자체가 존재의 근거라고 ‘고백’되는 신(神)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설립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전제되어 있는 신에 대한 변론이 신학이란 학문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 내지는 고민이 신학이라고 하는 분과학문의 현장에서는 생겨나기 곤란합니다. 최근 현대 과정신학 등이 이런 문제에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신학이란 학문은 무어라 포장해도 결국 ‘믿는 자의 학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고백적 학문’에서 존재에 대한 회의나 고민은 추천할 만한 덕목은 되지 못합니다. 물론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고민하고 있는 존재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신학의 본연의 모습은 체험하고 고백한 절대적 존재를 이성을 도구로 해서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이지, 만나보지도 못한 고민의 영역에 침잠한 존재를 취급하는 학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종교학이 이 부분에 대해서 답변을 줄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종교학이 그런 물음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는 학문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는 종교학이 무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나 혹은 종교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사람일 겁니다. 종교학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공존했던 많은 문화현상들 중에서 특히 종교라고 불리는 현상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검증적인 연구를 시도하는 근대 학문입니다. 종교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시작은 (서구전통에서) 근대이후 고개를 들기 시작한 낭만주의의 영향 하에 있습니다. 17-18세기 서구 지성계를 지배하던 계몽주의 사조가 잡아내지 못하는 인간의 정서적인 측면과 감성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 해 줄 것을 요청한 낭만주의자들의 호소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도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는 자세를 고무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기독교 전통에 있는 종교들도 그들 연구의 한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근대 종교학의 시작이 됩니다. 초기의 종교학은 주로 종교의 기원과 원천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종교학이라고 하는 학문을 통하여 얻고자 했던 목표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즉 종교의 기원을 밝히어 종교를 열등한 것으로부터 고등한 것으로, 유치한 것으로부터 고고한 것으로 줄 세워 보려했던 것이 그들의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의도는 당연히 기독교에 적을 두고 있는 연구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 연구의 종국은 결국 기독교가 모든 종교의 ‘꽃’ 혹은 ‘궁극’임을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 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초기 종교연구가들의 계산된 의도는 후에 많은 학자들의 비판과 질타 속에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서히 객관적인 근대 종교학의 기틀이 잡혀가기 시작합니다. 그 후 종교학은 요아힘 바흐와 엘리아데, 그리고 W. C. 스미스 등을 통하여 대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학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최근의 종교 연구는 초기의 많은 오류들을 교정하고 보다 검증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종교학은 크게 보아 역사비평적인 종교연구(종교역사학)와 현상학적인 종교연구(종교현상학) 정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역사비평적인 방법은 문화현상으로서의 종교전통을 성실하게 역사적 배경 하에서 검토하는 것이고, 현상학적 종교연구는 다양한 종교현상에 대한 체계적 내지는 조직적 이해를 시도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협력적이기도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상호 공유하지 못하는 긴장관계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종교사학 쪽에서는 역사적인 종교현상을 공시적으로 파헤치고 자의적이라 여겨질 정도의 해석을 시도하는 현상학적 방법을 좋게 볼 리가 없겠지요. 그리고 현상학적 연구 쪽에서도 종교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정체성 자체를 애매하게 만드는 역사학적 연구에 대하여 조금은 냉소적 자세를 보이기도 하구요. 대충 이 정도 설명이 진행되었으면 어느 정도 감을 잡았으리라 봅니다. 이렇듯 종교학은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얻기 위해 고민하는 학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종교라고 하는 문화현상에 대한 검증적 이해를 시도하는 인문학과 사회학의 경계선에 서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강 이 정도 도에 지나친 장대한 답변을 접한 질문자는 종교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에 오히려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 종교는 매우 다양하게 읽히고, 연구되고, 또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분과학문들 중에서 종교를 취급하고 있는 분야들을 일별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다양한 종교 연구 방법들

종교학이라고 하는 분야를 극도로 좁게 보지 않는다면, 그 이름 아래에 다양한 분과학문들을 거론할 수 있다. 우선은 이들을 유형별로 정리해보면, 규범적인(normative) 종교연구, 환원주의적(reductionism) 종교연구 그리고 검증-기술적(empirical-descriptive) 종교연구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좀 더 세분화시켜보면, 규범적인 종교연구에는 전통적인 종교연구들로서 (종교)신학과 종교철학 등이 포함된다. 신학의 경우야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종교일반을 포함하여 그 외의 종교들을 연구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철학은 종교의 본질과 진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분야라고 볼 수 있긴 하지만, 여기서 적잖은 논란이 나올 소지가 있다. 과연 일반적 의미의 종교철학이 가능하냐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사실 종교철학이라는 것도 서구 지성계의 산물이다. 그리고 서구는 오래도록 유일한 기독교 전통 하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왔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종교철학은 아무리 일반화의 옷을 입고 있다하더라도 지극히 기독교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미묘한 차이를 보다 엄격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이들의 눈에는 서구에서 말하는, 그리고 서구적 전통 하에서 수입된 종교철학은 기독교 철학일 수밖에 없다. 즉 그 안에서 논의되는 일반화되었다고 여겨지는 종교철학적 테마는 사실상 특정 종교의 교리나 전통에 익숙하게 때로는 유리하게 장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조는 꼭 기독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 종교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불교나 유교, 그리고 인도종교에서도 종교철학적 접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각각의 익숙한 종교적 개념 틀로부터 시작되는 개별적 종교철학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철학, 유교철학, 힌두철학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모든 종교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종교철학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을까란 의문제기를 모른 채 눈감을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각각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보편적 종교철학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 자체가 이미 좁은 의미의 종교학적 관점이 짙게 배여 있는 것이기도 하기에 이 부분은 상호 신중한 접근이 요청된다.

두 번째 영역으로 환원주의적 종교연구 방법으로는 종교사회학, 종교인류학, 종교심리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환원주의라 불리는 것 역시 좁은 의미의 종교학적 시각이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실존적인 종교경험에 기초하는 종교라는 문화현상을 사회적으로, 그리고 인간 심리의 한 영역으로 환치시켜 설명하기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 역시 그들이 처하고 있는 사상적 배경의 차이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뒤에서 좀 더 세밀히 볼 수 있겠지만, 종교현상학에서 인간의 실존적 종교체험에 집착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학적 종교연구는 그러한 신비주의에 매몰되는 것은 이성의 역할은 아니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자명하게 밝힐 수 없는 신비함에 집착하기 보다는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해서 그들의 합리적 가치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보다 이성적인 작업이라고 그들은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종교현상학과 사회과학적 종교연구의 갈등은 보다 세밀한 눈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는 달리 종교를 종교 그 자체로 보려고 하는, 그야말로 좁은 의미의 종교학이라 불릴만한 분야는 종교현상학과 종교역사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종교역사학이 개별 종교전통에 집중하며, 그 종교전통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기술하는 것에 집중하는 반면, 종교현상학은 보편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그들은 기존의 선입견들을 배제하는 판단보류작업을 통해 다양한 종교들의 유형적 특징과 구조를 밝히려 애를 쓴다.

이러한 다양한 종교연구들 중에서 종교현상 자체와 종교의 기능을 추적하는 검증-기술적 종교연구와 환원주의적 종교연구 태도는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공동의 학문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의 기원에 대한 계몽주의적 진화론 주의자들의 학문적 유산이기도 하다. 바로 ‘종교란 미지의 초자연적인 힘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았던 초기 종교연구가들의 가설이 그것이다.

처음엔 진화론이 있었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라는 영국의 생물학자에 의해 시작된 진화론은 18세기이후 서구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계몽주의의 적자라 볼 수 있다. 계몽주의는 잠들어있던 인간의 이성이 빛을 발하며, 기존 전통과 종교의 독단에 의존했던 지식체계를 새로이 도구적 이성의 도움으로 재구축 하려는 운동을 뜻한다. 다윈이 1859년에 발표한 『종의 기원』은 어떤 점에서는 계몽주의가 배출해낸 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등장은 이성의 빛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던 당시 유럽의 지성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애초에는 생물의 진화론을 다루고 있던 이 책은 이후 다양한 분야로 번져나가 사회나, 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강력한 척도로서 기능하게 된다.

종교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던 18-19세기의 학자들에게도 이 진화론은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시각이었다. 종교 역시 진화론적인 구도 하에 낮은 단계의 종교로부터 고등한 종교로까지 질서 있게 순서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당시 종교연구가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념으로 종교의 기원을 살펴 볼 수 있는 고리 찾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소위 ‘잔류이론’(survivals theory)에 근거한다. 즉 동시대에 살아남은 원시부족들의 종교형태 혹은 이념들을 연구함으로써 최초의 종교모습을 추적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현장연구를 통하여 생존하는 원시부족의 종교생활 속에 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보다 근원적인 종교적인 요소 찾기에 몰두하였다. 이들 그룹의 선구자들이 바로 타일러(Edward Tylor, 1832-1917)와 마레트(Robert Marett, 1866-1943)였다. 옥스퍼드 대학의 인류학 교수였던 타일러는 종교의 기원을 ‘애니미즘’에서 찾았다. 그는 서물숭배(fetishism) 이전에 이미 원시인들은 어떠한 정령에 대한 숭배사상이 있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꿈 등을 통하여 육체와는 분리된 영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령은 모든 사물 속에 스며있으며 더군다나 이 정령은 인간의 화복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까지 생각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라고 하는 인간적 문화현상이 최초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이런 원초적인 애니미즘으로부터 서물숭배로 그리고 다신교신앙에서 최고신 신앙으로, 종국에는 일신교 신앙으로 발전한다는 도식을 제시함으로 타일러의 진화주의적 종교연구는 한 획을 긋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종교 역사의 재구성에 교묘히 파고든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이런 식의 종교의 역사적 진화과정을 인정하는 종교학자들은 없다. 다만 타일러가 우리에게 전해준 종교연구에 있어서의 학문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타일러가 행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발언이 바로 ‘종교에 대한 이해’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즉 타일러는 인간이 소유한 문화적 현상들 중의 하나로서 종교를 언급하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존의 신학적 연구가 보여주었던 변론적이고 설명적인 종교연구와 괘를 달리하는 결정적인 차이이다.

타일러의 뒤를 이어 옥스퍼드의 인류학 교수가 된 마레트는 1899년 “전(前) 정령주의 종교”(Pre-animistic Religion)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그는 종교학적으로 중요한 개념 하나를 세상에 공개한다. 그것은 멜라네시아어로 ‘초월적인 힘, 혹은 존재’를 뜻하는 ‘마나’(mana)이다.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마나가 이상한 모양의 돌이나 사물,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용사나 혹은 부족의 우두머리 등에게 있다고 보았다. 마레트는 이와 같이 비인격적인 ‘마나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의 처음이라고 보았다.

지금은 타일러와 마레트가 주장하는 애니미즘이나 마나론이 종교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핵심용어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들이 제기했던 ‘종교란 어느 미지의 힘(mana)과의 만남에 기인하는 그 무엇’이라는 명제는 초창기 종교연구가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비록 그들 이론 안에 내재되어있던 진화론적 의도는 비판의 여지가 분명하지만, 이렇듯 종교를 세속적 시각에 의해 이해하려는 학문적 시도는 계몽주의에 세례 받은 많은 연구가들에게는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창기 진화주의 종교연구가들의 마나론은 이후 근대적 의미의 현상학적, 그리고 사회과학적 종교연구의 태동에 적잖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경향의 종교연구 분야들은 당시 득세하기 시작한 역사주의의 고함 속에 상대화되고, 소외되기 시작한 종교에 대한 관심을 복권시키면서 바야흐로 새로운 종교연구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들이 펼치는 역동적 장면들은 다음 호에서 좀 더 면밀히 살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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