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세계
2016.12.27 20:15

촉의 시대, 몸으로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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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의 시대, 몸으로 응답하라!

 

 

독일 유학 중 매주 금요일 마다 농구를 즐겼다. 처음엔 한국 유학생들 중심으로 편을 나누어 경기를 했는데, 뒤로 갈수록 사람들이 빠지면서 몇 명의 독일친구들이 들어와 얼마 후에는 다국적 팀이 되어 매주 두세 시간씩 코트에서 땀을 흘리는 생활을 이어갔다. 유학 중인지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하고 공부만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사실 독일생활에서 가장 기다려지던 시간이 이 시간, 바로 농구타임이었다. 제출해야 할 과제에 집중하다가도, 학위 논문 쓰기에 여념이 없다가도 어김없이 금요일 오후만 되면 장비를 챙겨 체육관을 향했다. 동료들과 어울려 땀을 흘리는 게 좋았고, 농구 플레이 자체에 집중하면서 다른 근심들을 떨굴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렇게 무려 5년 여 세월을 농구와 함께 하면서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공부를 하러 온 것인가, 농구를 하러 온 것인가?”

 

우스갯소리 같지만 당시 내겐 그만큼 농구라는 취미생활이 즐거웠고, 요긴했고, 또 무게가 있었다. 이는 본말이 바뀐 것인가? 혹은 주객이 거꾸로 된 것인가? 유학생활이라면 마땅히 진을 치고 목을 걸어 공부에 전념했어야 하는 건가? 무슨 생각으로 난 적지 않은 시간을 이런 허접한(?) 취미생활을 위해 소비한 것일까? 전 같았으면 이런 소비적(?) 취미 활동에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대응했을 터인데, 나는 매우 당당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나는 이런 나의 문화적 행위를 변호해줄 논리를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네덜란드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 덕분이었다.

 

문화의 기원인 놀이

그는 1938년에 놀이에 대한 기념비적인 책을 인류에게 선사했다. <호모 루덴스>(homo rudens)라는 제목의 이 책은 이성 중심적 인간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과 인식 지평의 확장을 가져다주었다. 하위징아의 눈에 ‘놀이’야 말로 인간 문명의 기반이요 화수분이었다. 예술, 철학, 종교, 전쟁, 경기, 법률 등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화적 결과물은 놀이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이 이른바 <호모 루덴스>의 출발점이었다. 덕분에 나는 내 취미활동과 즐거움의 놀이를 폄하하려는 이에게 하위징아의 라틴어 조어를 읊조리며 종종 역공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내 취미생활은 인류의 태동 이래 반복되고 있는 지난한 창의적 행위를 이어가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렇다. 그렇게 인간은 일하지만, 동시에 몹시 놀이를 갈망한다. 일이 아닌 취미로, 즐거움으로, 유희로 우리는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또 집중하길 원한다.

 

놀이와 문화의 공통점

하위징아가 놀이를 인간 문화의 기원으로 잡은 것은 철저한 역사적 관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는 인류의 다양한 놀이 속에 스며있는 공통의 구조를 찾은 다음, 그것이 문화의 골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 것이다. 예서 잠시 하위징아가 찾아낸 놀이의 공통요소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우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누군가의 강요 없이 스스로 나서서 즐기는 것이 바로 놀이라는 것이다. 둘째, 놀이는 ‘일상’과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이뤄지는 행위이다. 즉 놀이의 세계는 일상의 그것과는 구별된다. 누구든 놀이를 위해선 노동의 실제 현장에서 벗어나야하기 때문이다. 셋째,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무한정 놀 수만은 없다. 놀기 시작하면 끝이 있기 마련이고, 또 그러한 놀이는 독립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놀이공간과 일상 세계는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런 구별은 놀이로의 몰입을 배가시키며 아울러 그 때문에 생겨나는 즐거움의 몰입도 강화된다. 넷째,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따른다. 놀이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은 이러한 규칙에 따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위징아는 이러한 놀이의 구조적 특징이 그대로 인류 문화에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놀이와 문화는 한 몸이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모든 문화의 기원이 놀이에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놀이가 문화의 한 자락이며 결과물이라고 봤던 이전의 관점을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것이고, 이로 인해 놀이에 대한 제대로 된 학문적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하위징아의 성과는 지대하다 하겠다.

 

이쯤에서 하위징아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갈음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 논의의 주제는 그를 단순 칭송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놀이와 취미생활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추적해 보도록 하자. 놀이가 모든 문화의 기저이고, 그것의 기원을 이룬다고 하는 말에 동의한다면, 자연스레 우리의 물음은 “왜 인간은 놀이를 즐기려 하는가?”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온당한 답이 나와야 우리의 놀이와 취미에 대한 이해는 좀 더 제대로 된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시간의 무거움

나는 그것을 인간의 독특한 ‘시간 인식’에서 찾는다. 즉 인간은 시간을 대상으로 만들어 지금 여기에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당겨 인식할 수 있는 초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시간을 인지한 인간. 이는 축복이며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저주로 다가온다. 놀이도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도 시간의 제한 속에 있다. 어느 누구도 하루 종일 일할 수는 없다. 지구의 자전, 그리고 태양계의 공전과 함께 모든 인류의 활동은 쉼을 얻을 수밖에 없다. 때론 그 쉼이 이러저러한 정치-경제적 사연으로 억압받고 축소될 수도 있긴 하지만,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살 수는 없다. 정해진 시간 일하고, 그것이 마무리되면 쉬게 되는 것이 인류의 일상이다. 이 반복되는 시간의 곡예가 인간을 계속 인간답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을 관리하는 도구를 만들어 낸다. 시계를 만들고, 거기에 알람기능을 추가하여 마치 시간을 정복한 양 거드름을 피며 점점 더 시간의 노예가 되어 간다. 그래서 21세기의 인류에겐 자연스러운 기상은 있을 수 없다. 아침 일찍 이든, 모처럼의 늦잠이든 간에 우리는 정해진 알람에 의해 수동적으로 깨어나는 실존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인간은 이 시간을 ‘먼저 당겨 인식함’으로써 다른 동물보다 더한 ‘무료함’과 ‘심심함’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비어있는 시간을 뭔가로 채워 넣어야 하고, 가급적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인간은 또 무엇을 해야 한다. 허공을 응시한 채 그저 멍 때리기로 하루를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인간은 일하고, 또 일을 하며, 그 사이 또 다른 종류의 ‘일’(쉼, 놀이)을 한다. 그래야 이 시간을 잊을 수 있고, 시간을 잊어야 나의 존재는 생동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을 이기는 놀이

시간은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저승사자와 같다. 하루를 느끼고, 이틀, 사흘.. 반복되는 시간의 길이를 인지하는 순간 인간은 ‘존재의 위축’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또 무언가를 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스포츠를 즐기고, 내기에 몰두한다. 그럼 시간을 넘어서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에! 밤새워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을 때를 생각해보라.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 같은 뿌듯함이 우리를 감싸지 않는가. 끝내주는 영화 한편을 감상했을 때를 생각해보라. 무엇보다 2시간을 넘어서는 상영 시간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한다. 그런 점에서 취미는, 놀이는 철저히 ‘시간을 역행’한다!

 

취미와 종교의 유사성

하지만 취미와 놀이를 시간을 거스르기 위한 문화적 장치라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성에 차지 않는다. 그 이상의 설명은 없을까? 이즈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종교학자인 치데스터(David Chidester,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종교학과 교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미국의 대중문화를 종교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촉각’에 집중하며, 더 나아가 대중문화와 종교의 구조적 유사성에 주목하였다. 치데스터는 촉각이 주는 감성의 구조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즉 ‘묶음’(binding), ‘불태움’(burning), ‘움직임’(moving), ‘다룸’(handling)으로 정리한다. 계속해서 그는 이것들의 의미를 ‘우리’, ‘열정’, ‘전진’, ‘도전’이라 풀어주고 있다. 즉 종교나 대중문화나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열정을 다해 그것을 즐기고 몰입하게 해주며, 그로 인해 하나의 목적과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해주고, 끝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도전하게 해주는 성격을 지닌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 하에서 그는 현대인이 즐기는 대중문화를 과감히 종교대체물로 해석한다. 그래서 거대한 야구장은 교회(the church of baseball)가 되며, 코카콜라는 신의 위치(the fetish of coca-cola)에 올라가고, 로큰롤 공연은 종교적 축제(the potlatch of rock-and-roll)가 된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대중문화의 종교대체 성향을 세계적 차원 현상으로 보며 이들에게 과감히 ‘지구 종교’(global religion)라 부르기까지 한다.

 

촉각 시대 몸의 종교

물론 치데스터의 해석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중문화가 꼭 그렇게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요받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가 강조했던 ‘촉각’이라는 화두는 우리가 가벼이 넘길만한 것은 아니다. 촉각은 곧 몸의 논리이다. 하위징아가 놀이를 강조하든, 치데스터가 종교와 대중문화를 촉각으로 엮으려하든 이들이 지닌 공통점은 바로 몸의 강조에 있다. 어쩌면 이들의 몸에 대한 강조는 종교의 영역에서 저 멀리 물러나있던 가치 하나를 재발견토록 해주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종교가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그런 물음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종교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라는 주장도 있을 터니 말이다. 그러나 종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라는 말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수긍하는 편이다. 성스러움의 의미를 재발견한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나 종교학을 독립학문으로 우뚝 세우려한 요아힘 바흐(Joachim Wach, 1898~1955), 그리고 종교경험의 다양성을 검증적으로 연구하고자 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등. 초기 종교연구가의 이야기를 다시 나열하는 것이 불필요할 지경이다. 종교를 종교답게 만드는 것이 ‘경험’이며, 따라서 종교의 핵심은 바로 ‘체험’에 있다.

 

그런데 이 체험은 바로 ‘몸’이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 몸은 맘이 포함된 총체적 몸이다.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인간은 무언가 경험하고 체험함으로써 종교적 존재로 탄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경험한 것의 내용과 형식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적 인간은 몸을 지녔음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저항

그런데 우리는 그럼 몸이 폄하되는 시기에 한동안 노출되어 있었다. 이성중심주의가 판을 치는 통해 우리는 이해하고, 인식하고, 분별하고, 해석해 내는 것이 인간다움의 정수리인양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논리가 앞서고, 설명이 주를 이루고, 분석이 중심을 차지했다. 이런 경향은 종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몸이 보여주는 반응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인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신앙을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 사이 점차 우리는 몸의 이야기와 논리를 받아들이는데 미숙한 존재가 되어 갔다.

 

점차 촉각은 먼 이야기가 되어갔고, 서서히 종교는 암기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다시 치데스터의 해석을 인용하자면, 종교는 처음엔 우리를 묶어주고, 불태우고, 움직이게 하고, 끝없이 무언가를 다루게 해주는 것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묶어주지도, 불태우지도, 움직이지도, 도전하게도 만들지도 못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유대감과 조직에 의한 열성과 행위를 유발하긴 하겠지만, 그것은 부득이한 조직 내의 행동에 국한 될 뿐, 주체적 개인이 수행하는 ‘촉각적 반응의 결과’로 활로를 찾는 것은 매우 드믄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공동체에 있어도 허전하다. 종교 의례에 몸을 담고 있어도 멍 때리게 된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고급 사양의 스피커를 통해 쉼 없이 품어져 나오는 언어 물줄기에 맘만 적실 뿐 몸은 좀체 반응하지 않는다. 이처럼 몸의 반응은 의도적으로 제한되고 오직 머리로만 무언가에 집중해야 하는 수동적 종교의식 속에서 우리는 ‘존재론적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종교는 체험을 요청한다

어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인식행위로만 제한되겠는가. 맘도 몸도 무언가를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좁디좁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첨탑의 쪽방에서건(루터), 런던의 한 구석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의 집회에서건(웨슬리), 전쟁터의 포로가 되어 절대자를 만나든(몰트만). 또한 전신이 벼락 맞은 듯 찌릿찌릿하건, 가슴이 뭉클하고 심장의 피가 뜨거워지든 간에 뭔가 느낌이 있고, 경험이 있고, 체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인지적 작용의 깨달음과 이해만 강요되는 이 현실 앞에 우리 몸이 여전히 가만히 멈춰있다면, 그건 죽은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대안을 찾는다. 종교가 줄 수 있는 것을 유사하게 선사할 수 있는 다른 문화적 대체물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야 시간을 넘어설 수 있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지금의 나에게 새로운 존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촉각의 시대에 우리는 몸으로 응답한다. 일상의 감옥에서 탈피하여 맘껏 몸으로 느끼며 ‘몸이 전하는 복음’에 빠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취미생활에 몰두한다. 때론 무언가를 수집하며, 때론 스포츠에 심취하며, 때론 공연장에 오색 찬연한 야광 봉을 흔들며 ‘맘껏’ ‘몸껏’ 촉각의 시대에 적절히 대응한다!

 

문제는 이런 몸의 반란을 교회는 가벼이 지나치고 있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에 급급해 이미 충분히 몸을 많이 쓴 상태에서 예배당 문을 열던 시절과 달리, 몸의 열기마저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일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교회는 몸의 촉각에 대한 배려에 인색하다. 촉각에 대한 배려에서 뒤쳐버린 교회는 이제 다양한 경쟁자와 맞서야 할 운명에 처해있다.

 

이제 일요일이면 단 한명의 설교자가 독점하고 있는 ‘언어의 게토’에서 벗어나 사람들은 스무 명이 넘는 무언의 설교자들이 넓디넓은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다채로운 발의 설교에 귀를 기울인다. 행여 자신이 지지하는 팀이 승리라도 했다 치면,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에 ‘묶음’과 ‘불태움’, 그리고 ‘움직임’과 ‘다룸’을 만끽하게 된다. 머리띠를 두르고 깃발을 흔들며,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며 ‘값싼 은총’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수많은 경기장의 신도들이 보이지 않는가.

 

인간론적 몸의 신학을 위하여

따라서 이제 교회는 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학 역시 몸이 주는 화두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미 가톨릭은 요한바오로 2세 시절부터 ‘몸의 신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물론 가톨릭에서 말하는 몸의 신학은 기초적이라기보다는 ‘응용적’이다. 교회 내 남녀 관계형성에 대한 관점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큰 줄기로 보자면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진일보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허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향후 전개되는 몸의 신학은 윤리적 지침서가 아니라 신학의 기저에 흐르는 인간론적 고찰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한동안 내쳐져 있던 몸을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와야 할 것이며, 아울러 신앙행위의 핵심으로 몸의 활용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몸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취미와 놀이가 지니는 신학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도 병행해야 정체기에 빠진 한국 교회의 새로운 물꼬가 트일 것이다.

 

소설과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영화를 감상하고, 축구와 농구를 하고, 야구를 즐기며, 서핑에 빠진 신자들을 뭐라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몸으로 웅변하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의 요청에 성실히 응해야 하는 것이 현 한국 교회와 신학계의 책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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