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레이, 그녀의 마음을 넘어서" 에바 오딧세이
2002.07.09 05:27 Edit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길
에반겔리온 5화, "레이, 그녀의 마음을 넘어서"
줄거리
이카리 사령관의 매서운 표정과 더불어 에바의 5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바 영호기는 테스트를 위해 준비 중이다. 그러나 신경회로 부분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며 일순간 에바 영호기는 폭주상태로 빠져든다. 통제력을 잃은 에바 영호기... 곧바로 자신의 분노를 한 정점을 향해 토해낸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이카리 사령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카리라고 하는 존재를 자신의 시야에서 지워버리려고나 하는 듯 사정없이 그가 서있는 위치를 향해 주먹을 내리치는 에바 영호기... 그러나 이카리 사령관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순간 에바 영호기의 동력장치가 해체되어지고, 동시에 레이가 타고 있던 엔트리 플러그는 본체로부터 쏜살처럼 빠져 나온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엔트리 플러그는 실험실의 벽과 천정을 무서운 속도로 긁고 지나간다. 잠시 후 마침내 에바 영호기의 동력은 멈추게 되고 사태는 종결된다. 그러나 엔트리 플러그 안의 레이는 상당한 위험 속에 방치된 채 있다. 순간 앞뒤 잴 겨를도 없이 레이에게로 달려가는 이카리 사령관! 그는 시멘트 벽과의 마찰로 인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엔트리 플러그를 맨손으로 열어젖힌다. 물론 상당한 수준의 고열은 그의 손에 짙은 화상을 입히며 그 순간 안경마저 바닥에 굴러 떨어져 금이 가게 된다. 그러나 끝내 이카리 사령관은 해치를 열어 레이에게로 다가간다.
“레이 괜찮니? 레이?!”
그림은 그 사건이 지난 지 얼마 후로 넘어간다. 사고 현장은 여러 명의 인부들에 의해 정리되고 있으며, 그 안에 리츠코와 미사토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레이와 사도에 관한 것이다. 그 대화 속에 에바 전 작품을 일관하는 중요한 암시와 복선이 흘러나온다. 우선 레이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대한 리츠코의 선언. 왜 레이는 그렇게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이는 것일까? 바로 오늘 에피소트의 주제이기도 하고, 어쩌면 에바 전 시리즈의 중요한 물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이어 흘러나오는 사도에 대한 분석결과! 리츠코의 언어 속에 사도의 고유 파동형태는 인간의 그것과 99.89% 일치한다. 사도와 인간의 구성요소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100%에 이르는 파동형태의 유사함이 의미하는 바는? 리츠코와 미사토의 혼란스러움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바로 이때 신지로 인하여 새로운 테마가 개입한다. 그것은 직접 눈앞에 나서지는 못하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곁눈질로 표현하고 있는 신지에게 화상으로 어그러진 아버지의 두 손이 포착된 것이다. 그리고 신지는 아버지에게서 일어난 그 엄청난 변화가 레이를 구하다 생기었다는 것을 리츠코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수시로 바뀌고 있는 신지의 얼굴.... 그의 심리에 동요가 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시 장면은 진부한 일상... 그리고 그 초점은 신지와 레이가 다니는 학교에 고정되어 있다. 당시 수업은 체육시간인 듯싶다. 학생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그 순간도 신지의 눈은 오직 한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다. 바로 레이.... 그리고 그 관심의 배면엔 레이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흐르는 정감에 대한 부러움이 묻어있다. 무엇이 아버지와 레이를 묶고 있는가? 신지의 고민은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이번에는 에바 초호기의 테스트... 그러나 에바 안의 신지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다. 바로 아버지와 레이.... 테스트 중인 그 순간에도 그의 눈에는 바로 이 두 사람의 모습만이 들어올 뿐이다. 눈에 띌 정도로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
아버지 그리고 레이...
하지만 여전히 한 걸음 뒤에 머물러 있는 ‘한 사람’,
신지...
그는 이카리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장면은 한가한 저녁식사 분위기로 몰고 간다. 장소는 미사토의 아파트. 미사토는 리츠코를 초대하여 직접 요리한 카레를 대접한다. 그러나 한결같이 미사토의 대책 없는 요리 솜씨에 고개를 젓는다. 그때 리츠코는 신지에게 레이에게 전해줄 새로운 보안카드를 건네준다. 그리고 신지가 그것을 레이에게 직접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한다.
레이의 아파트... 한 눈에 보기에도 서민층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촌인 것을 알 수 있다. 초인종을 누르는 신지... 그러나 안으로부터는 응답이 없다. 손잡이를 잡으니 문이 열린다. 잠겨있지 않았던 것이다. 조심스레 자신의 몸을 안으로 밀어 넣은 신지... 생각보다 정리 안되고 더러운 내부가 신지의 눈에 들어온다. 살그머니 신지는 방으로 보이는 듯한 곳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는 침대와 냉장고와 옷장 겸 책상 하나뿐.... 그리고 그 책상 위에 망가진 안경 하나. 신지는 호기심어린 모습으로 안경을 써본다. 그때 신지의 등 뒤로 들리는 인기척... 레이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 샤워를 끝내고 알몸인 채 서있다. 그녀의 몸을 감고 있는 것은 단지 수건뿐... 순간 신지는 당황한다. 그러나 아랑곳 하지 않고 서있던 레이. 신지가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안경을 받기 위해 신지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알몸인 레이의 접근으로 더 당황한 신지... 그사이 신지의 가방과 옷장 서랍과 꼬이며 두 사람은 넘어지게 된다. 그리곤 쏟아져 내리는 레이의 속옷... 그 아래 알몸인 레이의 몸을 덮치고 있는 신지. 신지의 당황은 극에 달하나 너무도 태연한 레이의 모습. 레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신지의 코앞에서 아무 말 없이 담담히 옷을 갈아입는다.
다시 두 사람은 네르프 본부를 향한다.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 그 중심부엔 신지의 아버지인 이카리 사령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평행선을 긋고 있는 두 사람의 이카리에 대한 편견들....
레이: 넌 이카리사령관의 아들이지?
신지: 응.
레이: 그런데 왜 믿지 못하지?! 아버지가 하는 일인데!
신지: 당연하지 저런 따위의 아버지를!
그리고 그들의 평행선은 레이의 손이 신지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다시 에바의 실험실. 이번에도 역시 영호기가 테스트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번 같은 폭주가 없다. 실험은 큰 어려움 없이 아주 잘 마무리되었다. 모든 사람이 레이와 영호기의 실험성공에 만족하고 있다. 순간 비상벨 소리. 다섯 번째 사도의 출연을 알린다. 그리고 곧 무장하여 출동하는 신지와 초호기. 그러나 사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산으로 올라오는 에바 초호기를 향해 강력한 에너지 파를 발사한다. 순간 절규하는 신지... 그리고 다시 쏟아지는 미사토의 외마디!
“신지!!!”
1. 깨진 안경이 던지는 사회학적 의미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길
아, 에바시리즈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요즘 들어 에바를 반복하여 눈 속에 심어주다 보니 생각 속에 걸려 들어오는 한 가지 뭉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놈의 에바시리즈는 SF와 로봇 매카닉으로 위장한 한 편의 "성장 드라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작진의 음모는 전편에 걸쳐 흐르는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에서 여실히 노출되고 있다. 보통의 로봇매카닉 작품들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형 로봇과 한 눈에 보기에도 기괴한 괴물들과의 스펙터클한 전투장면 묘사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에 비해, 이 놈의 에바는 그보다는 주인공들의 너줄너줄대는 대사묘사에 더 많은 정성을 쏟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에바시리즈는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가이낙스의 작품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事情)”과 맥을 같이 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여하튼 잔소리는 잠시 멈추고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함께 하는 에바 5번째 이야기로 빠져 들어가 보도록 하자.
오늘 이야기의 중앙에는 레이라는 14세의 한 소녀가 서있다. 에바 제작진은 과연 이 레이라는 한 ‘아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무엇을 던지고 싶어 했던 것일까? 나는 이런 궁금증을 가슴에 깔고 꾸준히 다섯 번 째 이야기를 주시하였다.
레이라는 인물은 작품 전반에 걸쳐 약간은 ‘신비한 아이’로 덧칠해져 있다. 장면묘사나 대사의 내용을 통해서도 일반에게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단지 그녀가 [마르둑]에 의해 최초로 뽑힌 에바의 조종사라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한 정보는 거의 백지에 가깝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서 레이라고 하는 인물은 실제의 인간이 아니라 이카리 박사가 고안한 더미 플러그 계획의 하나로 고안된 ‘인조인간’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물론 그것도 카오루와의 관계와 얽히며 또 많은 함수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에바 전반부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레이는 왠지 타인과 잘 화합하지 못하는, 단적으로 말해 비사교적인 혹은 사회화가 덜 되어있는 14세의 ‘작은 어른’이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그렇게 변함없이 정리되지 않고, 확고하게 자아가 자리 잡지 못한 한 소녀의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끌고 있다. 그저 말없이 자신에게 부과되는 임무만 꾸려나가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의 한 소녀... 그리고 그녀가 마치 보물처럼 소중하게 끌안고 있는 금이 간 안경 하나... 나는 레이가 간직하고 있는 이카리 사령관의 깨진 안경을 보며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하나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언제 타인과의 관계에 자신을 열어줄까? 바로 이런 지극히 본래적이고 원시적인 질문이 오늘 이야기의 주된 소재가 아닐까 싶다. 에바 전편에 대한 이해를 깔고 본다면 레이라고 하는 존재는 지금 갓난아이와도 같은 존재이다. 물론 그녀의 몸은 14세의 경계선을 마악 넘어서고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갖지 못한 실험용 더미 풀러그로서의 레이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육체만의 14세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일한 나이이지만... 14년이라는 세월동안 많은 이들과의 접촉을 경험한 신지와는 대별되는 레이만의 특징이다. 따라서 그녀는 그 나이의 인간들이 갖게 되는 ‘사귐’에 있어서의 ‘전략적인 훈련’이 덜되어있다. 그저 즉물적이고, 직관적이고 어쩌면 본능적인 이끌림에 의해 누군가를 자신의 세계 안에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알게 하는 가장 큰 동기는 갓난아기의 그것처럼 지극히 ‘이기적’이다. 그러나 레이가 지닌 이기심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기 보다는 순전한 그 무엇으로 우리에게 비추어진다. 왜, 그녀는 14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갓난아이로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사람을 만날 때 가장 먼저 재는 척도는 누가 나를 가장 위해주는 가이다. 누가 과연 나의 이기심을 채워줄 수 있는가, 누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고 또 동조해 주는가.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며 느끼게 되는 아이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준으로 사람들에 대한 선호도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기준에 의해 우리의 레이도 지금 타인들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작진은 그러한 레이의 유아기적인 사교행위의 일단을 이카리 사령관과의 사이에서 풀어나가고 있다. 물론 여기서 레이만의 시각이 아닌 이카리 사령관의 레이에 대한 감성도 읽어볼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이번은 레이와 그녀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 신지의 심리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레이 주변에는 사무적인 만남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식적인 일을 통해 만나고 있을 뿐.... 사실 레이에게 사적인 공간 속에 있는 타인이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예외를 꼽으라 한다면 신지의 레이에 대한 호기심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신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일뿐... 여전히 레이에게 신지는 외부의 수많은 배경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리츠코도 미사토도 그 밖의 많은 네르프의 직원들도 레이는 단지 에바 영호기의 조종사 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사무적이고 공적인 관계 속에서 레이가 받게 될 감정은 과연 어떤 색일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공적인 관계가 주는 그 무료함과 의미 없음을... 때로는 수없이 반복되는 많은 양과 길이의 공적인 모임보다는 지극히 퇴폐적이긴 하나 사적인 공간 속의 만남이 우리를 얼마나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지를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레이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인간이 가지게 되는 자신의 세계는 자신만의 세계이며 극히 사적인 공간이며 시간이다. 따라서 공적인 만남과 세계만을 지닌 이들이 가지게 되는 그 공허함을 우리는 기억해내야만 한다.
그렇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생활 세계에서 이러한 극히 사소한 사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바로 내가 만나고 부닥껴야만 하는 수많은 만남들 속에 만나게 되어지는 나를 향한 뜨거운 시선... 혹은 나를 위한 성실한 봉사... 등등의 것들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또 호소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관계 속에 들어오게 되는 타인들에게 우리는 우리의 사적인 공간을 허락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의 가장 음밀한 비밀을 내어놓고 상대방의 동등한 그 무엇을 강요하며 서로의 사적 공간을 공유하길 원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이로움을 주는 사람...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 자신을 도와줄 사람...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
우리가 우리의 사적 세계에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아이는 즉각적으로 부모의 손길아래 이러한 사적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가족이라고 하는 혈연으로 위장된 사회공동체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오늘 우리의 레이는 자신의 사적 공간을 헤집고 들어오는 두 명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들 중 하나는 이카리 사령관... 그는 온 맘으로 그녀를 위하고 있음이 공공으로 들어난다. 위험에 처한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던 그... 문제는 왜 이카리 사령관은 그토록 레이에게 집착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따지고 보자면 레이는 인간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이 너무도 자명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도 이카리는 레이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지극히 거대함을 증명해내고 있다. 그 천 명의 레이 중 한명의 레이에게... 왜? 이 문제는 차차 짚어보기로 하고... 여하튼 그러한 이카리의 행동은 레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어쩜 레이의 기억 속에 ‘가족’이라고 하는 개념에 가장 근사한 느낌을 헌사한 존재가 바로 이카리일 것이다. 따라서 작품 속의 레이는, 아니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카리의 관심을 받고 있는 한명의 레이에게 이카리라고 하는 존재는 자신의 사적 세계에 초청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리고 그 끄나풀은 바로 그가 남긴 하나의 깨진 안경이다.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레이의 보물... 이카리의 안경... 그 안경이 던지는 의미를 그녀는 무엇보다도 더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험을 구하기 위해 화상의 위험을 무릎 쓴 한 인간의 배려... 그리고 그 배려가 만들어낸 하나의 선물... 바로 그 안경...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녀의 보물이다. 마치 어린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들이 있듯이 오늘 레이는 이카리의 안경을 그렇게 자신의 소중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사적 공간을 서성이는 또 하나의 남자가 그 안경을 통해 그녀를 보고 있다. 그의 이름은 신지... 이 점에서 제작진의 놀라운 감성과 치밀한 계획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신지가 새로 만들어진 ID 카드를 주기위해 레이를 방문했을 때... 레이는 샤워 중이었고... 신지는 비어있는 듯한 레이의 방을 무단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때 신지의 눈에 들어온 하나의 안경... 그리고 그 안경을 짚어 자신의 눈에 가져간다. 레이의 사적 세계가 타인에 의해 침범당하는 순간이다. 더군다나 매개물이었던 그 안경은 레이에게는 가장 소중한 그 무엇.... 바로 여기서 제작진은 놀라운 꽁수를 제공한다. 바로 신지는 그 안경을 통해 레이의 사적 세계를 곧바로 주시하게 된다. 깨진 안경 너머로 넌지시 흘러들어오는 레이의 나신.... 이 부분을 이처럼 깔끔하고 맛깔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니! 격려의 박수를 한판 보낸다. 짝짝짝~
이런 시각으로 오늘의 다섯 번째 이야기에 함몰되어 들어가면... 영락없는 한편의 성장드라마이다. 한 소녀 레이의 생활세계에 대한 다큐형식의 탐구가 전편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2. 성이라고 하는 것도 사회화의 부산물?
그 후 우리는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무단으로 착용하고 있는 신지를 발견하고 레이는 신지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두개의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는 부분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레이와 신지의 모습을 통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지금 레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적 세계의 한 보물을 되찾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녀가 벗고 있고, 그리고 그녀의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또래의 남자애라고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단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안경을 돌려받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맞은편에 서있는 신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14세의 불안정한 남성 앞에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이 서있다. 어쩌면 신지로서는 처음 만나게 되는 본격적인 여성의 벗은 몸이다. 따라서 그는 당혹스럽고, 난처하고 그리고 더 또렷이 보고 싶은 심정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들의 심정적인 차이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너무도 무표정한 얼굴의 레이... 그리고 전혀 정신을 차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 신지의 표정... 그리곤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의 육체...
벌거벗은 이브와 평상복의 아담!
나는 이 장면에서 많은 인류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성이라고 하는 것은 본능이라고... 그러나 한풀 벗겨본다면 성이 비록 본능일망정... 그 성에 대한 담론들은 전혀 본능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성과 성에 대한 담론도 하나로 묶어버려 속편하게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성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모든 말들에 대해서도 쉽게 하나의 가치관으로 묶어 팔아넘기려고 한다.
그러나 좀 쫀쫀히 따지고 들어가자면 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담론과 의미, 해석들은 사실 사회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오늘 에바의 제작진들은 온 몸으로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자, 함 자세히 벗겨보자... 오늘 레이와 신지의 상태에 대한 번듯한 분석이 우리에게 그 시각의 분명한 차이를 일깨워 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신지는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흔한 상식적인 성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신지는 레이의 벗은 몸을 보고 흥분한다. 그리고 당혹해 하며... 이드의 불안한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서 매순간 슈퍼에고의 도덕적 명령을 때려 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불안정한 상태는 얼굴의 색조변화와 고저장단이 흩어진 언어 등으로 표출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 레이는 수치심, 혹은 부끄러움으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너무도 성숙한 몸매의 이 여성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듯이 한 남성을 향해 돌진한다. 그것도 너무도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읽고 흥분하고 있는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바로 지금 한 남성에게 다가서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에 대한 담론의 사회적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우선 하고 싶은 말부터 쏟아놓고 본다면, 성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사회적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화 과정을 겪지 않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사회적 전통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성이라고 하는 것은 본능이 아니라 관습이요, 전통이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성에 대한 담론은 따라서 본능이라고 위장한 하나의 이념인 것이다. 그래서 흥분하고 있는 신지와는 전혀 달리 레이는 너무도 고요하고 평온하다. 육체란 원래 주어져 있는 것... 그 육체를 가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것... 그리고 그 육체를 부끄러운 것이라고 왜 생각해야 하는지.. 레이의 머리는 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14세의 사춘기 소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악 태어난 아기와도 같이, 자신을 창조한 사회의 구조와 전통에 대해서 아직은 요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몸에 대한 스스로의 탐구 외에 구축된 그 어떤 이념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 관리는 어쩌야 되고, 처신은 어떻게 해야만 하며, 여자들은 이럴 때 저럴 때 요렇게 조렇게 해야한다는 온통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교육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평온하다. 마치 갓난 아이들이 자신들의 음부를 내어놓고도 즐거운 춤을 출 수 있듯이 오늘의 레이도 평온하게 자신의 소중한 그 무엇에만 자신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반면 이미 어느 정도 사회화에 성공한 신지에게 그 상황은 전혀 다른 그림으로 그려오기 마련... 지금 그의 눈앞에 한 여성이 벌거벗은 채 서있다. 당연히 그의 몸은 그 여성에 대한 반응으로 출렁이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러한 출렁거림을 제어할 사회적 장치가 이미 구비되어있었다. 그래서 계속 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한다.
신지: 아, 어, 에......
신지: 난, 특별한 건 없고......
레이: 비켜.
신지: 에, 에, 에, 에 ...
레이: 뭐?
신지: 그저, 나 ... 에 ...
쉴 새 없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신지... 여기서 우리는 사회화된 성의 담론과 천연 그대로의 성에 대한 생각의 충돌을 읽게 된다.
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 그것은 본능이 아니다. 우리의 즉각적인 몸의 반응은 본능이라 이름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와 우리의 해석은 전혀 본능적이지 않다. 그것은 차라리 관습이요 전통이다. 이는 곧 성에 대한 잣대는 그만큼 가변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꼭 하나의 사회와 전통의 해석만이 성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소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레이와 신지의 경우처럼... 우리는 각각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역사에 따라 서로 다른 성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여성 레이는 남성 신지 앞에서 스스럼없이 속옷을 다리 위로 올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김인규씨의 누드 사진 홈페이지게재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참 속물적이고 답답하다. 호박씨 까는 힘있는 자들의 전통적 해석이 성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억압하는 구조로 나아가는 상황이 참 좀스럽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난 성에 대한 모든 담론은 중립적인 것으로 통용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도, 숨겨야할 그 무엇도, 혹은 즐겨야 할 게임도 아니다. 성은 성일 뿐... 종족 보존을 위한 DNA차원의 제도적 장치일뿐...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얼치기처럼 웬 아줌마 하나가 튀어나와 성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또다른 관습과 이데올로기를 강요해서도 안 되고, 아직 채 생각이 정리되지 못한 카수가 성은 놀이라고 떠벌여서도 안된다. 그런 부차적인 논의가 성행하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에 대한 보다 적확한 사실이해이다. 그 기능, 구조, 그리고 역사에 대한 분명한 자이해가 선점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모든 성에 대한 담론은 사상누각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성에 대한 담론 그 자체가 하나의 관습이요, 사회적 분위기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을 말하며 사실은 그 사회의 습관을 말할 뿐이며... 이러한 논의의 종말은 결국 성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 아니라 권력게임이 되기 마련... 그래서 종국에는 힘있는 자의 말빨만이 전면에 자리하기 마련... 따라서 우선 우리의 젊은 이들에게 성에 대해 보다 과학적인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아, 그런 날이 언제 올까? 콘돔하나 제대로 사지 못하는 우리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난 또 무엇을 기대하려고 하는 것일까?
암튼 오늘 에바의 제작진은 아주 짧은 그림 하나로 관객들에게 많은 것을 선사하고 있다. 미끈한 레이의 몸매를 통해 짙은 눈요기를 만족시켜주며, 또 한편으로는 성에 대한 담론에 도발적인 의문제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제작진이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난 그것을 그렇게 보았다.
사족) 5편에서는 에바 전편에 흐르는 또 하나의 복선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도의 성분에 대한 리츠코의 분석에서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대사 속에 등장한다.
리츠코: 그래. 비록 인간과는 다른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배열과 신호좌표는 인간 유전자와 극히 유사해. 99.89%.
미사토: 99.89%라면 ...
리츠코: 우리가 가진 지식의 얄팍함을 새로이 알게 되는 거지.
사도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단순한 매카닉이 아니라는 사실... 어쩌면 인간의 형제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진실... 제작진은 곳곳에 에바 전체를 이끄는 주제를 심어놓고 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언정! 난 인간이 인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대해 보다 중립적이었으면 한다. 최근 게놈 프로젝트에 따라 인간의 DNA구조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나서 많은 과학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유전자수가 고작 3만 5천개였기 때문이다. 왜 고작이냐고? 바로 이 숫자는 초파리가 소유한 유전자수의 두 배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고등 동물일수록 유전자수가 ‘엄청’ 많을 것이라는 믿음에 전적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참, 재미있는 일이다. 꼭 리츠코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가 가진 지식과 정보의 얄팍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를 편이다. 어찌 알겠는가? 초파리도 우리의 형제였는지? 이 알쏭달쏭한 진실의 세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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