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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종교적으로 태어났다: 루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
- 성스러움의 의미를 찾아 나선 한 개방적 그리스도인

“결국 그는 왕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겸허함을 갖춘 왕이었습니다. 다른 이의 말을 빌려본다면, 그는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방문을 받았고, 이제는 그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함은 옷토에게는 모든 계시 중에서도 최종적인 것이었고, 모든 신비 중의 신비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테오도르 지그프리트Theodor Soegfried, 옷토의 장례식 때 추도사 중에서)

    
옷토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날도 예외 없이 마르쿠스(Markus Miller)와 나는 박사반 세미나가 열리는 카페에 앉아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학기 중 목요일 오전 11시부터 대략 2-3시간 정도 이어지는 박사반 세미나는 마르부르크 대학 종교학과의 전통대로 시청 광장 모퉁이에 있는 한 카페에서 진행된다. 대략 6-7명 정도의 박사반 학생들은 지도교수와 함께 그날 주제로 삼은 논문이나 책의 일정 부분을 읽고 토론하곤 하였다. 세미나가 시작하기 직전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이들 각자는 원하는 음료를 주문한다. 난 거의 변함없이 커피를 주문하곤 했다. 칙칙한 독일 날씨에 지속적으로 저혈압 증세를 보이고 있던 내게 일정 수준 혈압을 끌어올릴 수 있는 커피는 음료라기보다는 보약에 가까웠다. 또한 커피는 미끄러지듯 느슨하게 풀리는 나의 신경을 각성시켜 이 독일친구들과의 2시간여 토론을 마칠 수 있는 집중력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내 절친한 벗 마르쿠스는 그 날도 어김없이 검은 빛이 도는 말츠비어(Malzbier)를 주문했다. 이름에서부터 이미 맥주란 단어가 들어있는지라, 난 그것이 여러 맥주들의 하나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꾸 그 친구는 자신의 앞에 놓인 말츠비어를 내게 권한다.

“길용! 한번 마셔봐. 이거 알코올도 없고, 맛도 그만이야!”

그제야 난 그것이 알코올이 아니라 보리로 만든 건강음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 덕분에 난생처음 말츠비어를 한 모금 들이킬 수 있었다. 대략 한때 한국에서도 꽤 유행했었던 보리음료와 유사한 달콤한 맛이 목 안 가득히 맴 돌았다.

“맛 좋은데~” 의례적인 외교적 발언을 선사하며 말츠비어가 반쯤 담긴 컵을 돌려주고 있는 내게 마르쿠스는 웃으면서 속삭인다.

“그런데 너 알고 있니? 루돌프 옷토네 집이 바로 이 말츠비어를 만드는 공장이었다는 걸?”

마르쿠스의 속삭임이 지나가자 난 왜 그 친구가 오늘 그 음료를 내게 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참여한 수업은 바로 <루돌프 옷토 세미나>였던 것이다. 마르쿠스는 <옷토 세미나>의 문을 열기 전 내게 옷토가의 체취를 맡게끔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당시 내가 얻어 마신 그 음료는 옷토의 집에서 직접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요즘이야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상표 붙은 음료들이 대부분이다(물론 여전히 독일에서는 가정집에서 소규모로 생산되는 다양한 음료들이 있기는 하다). 여하튼 그렇게 우리는 옷토 가문의 생계를 책임지던 생산품을 음미하며, 옷토가 종종 들려 커피와 음식을 들곤 했다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바로 옷토의 학문이 공과를 따져 묻는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옷토가 마르부르크에서 영면에 든 후 60여년이 지난 후의 풍경이다.


옷토가 걸어온 길

옷토는 1869년 9월 25일 하노버의 파이네(Peine)에서 말츠비어 공장을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장한 파이네라는 곳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작은 시골 마을이었고,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옷토 가문 역시 경건한 루터교의 신심 깊은 일원이었다. 1882년 그의 가족은 힐더스하임(Hildersheim)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그해 옷토는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그리고 막 12세에 접어든 그는 그 지역에 있는 김나지움에 들어가 본격적인 배움의 길을 시작한다.

1888년 5월 옷토는 에어랑엔(Erlangen)에서 본격적인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옷토가 입학한 에어랑엔 대학의 신학과는 보수적인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의 에어랑엔 생활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곧바로 그는 괴팅엔(Göttingen)대학으로 적을 옮긴다. 그가 에어랑엔을 떠나 괴팅엔으로 향한 것은 특별한 이유에 의해서는 아닌 것 같다. 학문적 혹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대학을 옮긴 것이라기보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도시를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가 옮겨간 괴팅엔 대학은 보수적 학풍을 지닌 에어랑엔과는 전혀 곳이기도 했다. 독일 종교사학파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괴팅엔 대학은 당시 독일 대학들 중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자유로운 사상을 꽃피우던 곳이기도 했다. 바로 그곳에서 옷토는 자유주의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1898년 그는 ‘루터의 성령론’에 대한 테마로 학위논문을 제출하게 된다. 박사가 된 그는 조직신학과 종교철학을 강의하는 사강사(Privatdozent)로 자리를 잡는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서 옷토는 공개 시범 강연을 해야 했는데, 그때 그가 선택한 주제는 바로 ‘칸트의 종교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8년 동안의 사강사 생활 끝에 옷토는 1906년 괴팅엔 대학의 원외 교수로 부임한다. 그리고 1915년에는 브레스라우(Breslau)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다시 1917년에는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mann, 1846-1922)의 뒤를 이어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 신학과의 조직신학 전공 정교수로 부임한다.

이 정도의 이력을 나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형적인 학자로서의 모습을 지닌 옷토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옷토는 그렇게 간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말 그대로 순수한 학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 대학에 적을 두고 가르치고, 연구하며, 또 학문분야에 비중 있는 저술들을 끊임없이 제공해왔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또다른 모습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옷토는 교수직을 수행하는 한편 동시에 프로이센의 국회의원 신분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에는 프로이센의 국가의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독일 내에서 의미 있는 3가지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우선은 그는 <종교적 인간 연맹>(Religiöse Menschheitsbund)이라는 조직을 설립한다. 이 단체는 사회적 공의와 국제간의 평화 유지를 그 목적으로 하였고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옷토는 종교를 도구로 활용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Die Republik von Weimar, 1919-1933)시대에 그는 독일 개신교회의 예전을 개혁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세계 여행을 통해 얻은 다양한 종교적 예술품들과 귀중품들을 보관할 수 있는 <종교 박물관>(Religionskundliche Sammlung)을 마르부르크대학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가 보여준 학문 이외의 사회활동 역시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1924년 그는 미국 오벌린(Oberlin)대학에서 ‘동서의 신비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1926년에는 웁살라 대학에서 ‘인도의 자비종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이 강연 원고들은 후에 각각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옷토의 주요저서 목록에 포함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옷토는 1929년 3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공직에서 은퇴한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그의 학문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1931년 그는 윤리에 관한 논문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3년에는 기포트 강연에 초청 받아 ‘도덕률과 신의 의지’(Sittengesetz und Gotteswille)라는 강의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이 강의는 그의 나빠진 건강 때문에 취소되었다.

나치시대 옷토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리고 그가 정확히 나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판단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옷토는 나치 이념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고, 이는 그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옷토는 타문화권의 다양한 종교들에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주의자나 혹은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자의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철저한 독일의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이러한 그의 민족주의적인 경향성은 나치에 대한 그의 애매한 태도를 낳게 한 하나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옷토는 1937년 3월 6일 폐렴으로 인해 그가 마지막까지 교수생활을 하던 마르부르크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바로 직전 해인 1936년 10월 한 가지 흥미로운 사고가 옷토에게 있었다. 당시 옷토는 마르부르크 시 외곽에 있는 슈타우펜베르크(Staufenberg)라는 작은 도시의 탑에 올랐다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다. 노쇠한 옷토가 왜 그곳, 그 탑까지 올라갔을까? 호사가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한 사고였고, 이 사고로 인하여 옷토는 혹시 자살을 하려고 하지 않았나 라는 의혹마저 받았다. 여하튼 그 사고가 난지 반년도 안 되어 옷토는 영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남긴 ‘성스러움’은 인류의 또 하나의 위대한 유산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계몽주의를 넘어

루돌프 옷토. 그는 신학자였다. 루터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정통적인 신학부의 교의신학교수로 자리를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은 신학계 보다는 그 주변 학문(종교학, 종교철학, 종교심리학 등)에 더 크고 깊게 미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옷토는 참 독특한 인물이다. 특히 그가 쓴 대표적인 저서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는 1917년 초판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수십 차례의 판을 바꾸어가며 무려 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웬만한 지식인의 서가에는 옷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위한 공간이 반드시 마련되어 있었다. 그만큼 그 책은 동시대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또 영향을 미친 책이었다. 하지만 <성스러움의 의미>란 책은 그렇게 만만한 책이 아니다. 아니 무척 어렵고 난해한 책이다. 아무나 손쉽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책이 그처럼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적어도 그 책이 가지는 시의 적절성, 즉 그 시대가 고민하는 문제에 옷토가 무척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어떻게 그 시대에 적절했기에 옷토의 작업과 그 결과물이 동시대인들에게 그처럼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것인가? 그것은 바로 계몽주의의 파고를 넘어서 그가 지속적으로 종교와 신학의 토대를 이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옷토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결코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옷토는 자신의 학문적 목적을 동시대 다른 정통주의 신학자들(바르트, 불트만, 브룬너 등)과는 달리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 옷토가 활동하던 당시는 18세기 이후 서서히 익어가던 계몽주의 사조가 극성기를 맞이하던 때이다. 계몽주의란 단어가 등장하니 벌써 몇몇 독자들은 식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할는지도 모른다. “그 놈의 계몽주의, 뭐가 어때서!” 푸념처럼 추임새하나도 그 사이로 끼어들만하다. 하지만 19-20세기초반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있어 계몽주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그 무엇이었다. 인간 이성의 우월성과 그것의 도구적 기능에 기반하고 있는 계몽주의는 서서히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며 사회전반의 주도적인 이념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화주의로, 발전주의로, 유물사관으로, 심리주의로, 과학주의로 다양한 자녀들을 출산하며 바야흐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주도적인 세계관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계몽주의의 사회 권력화는 예민한 신앙인들의 안테나에 걸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적잖은 수의 신앙인과 신학자들은 이 계몽주의의 도전을 제대로 처리하고자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계몽주의의 즉위는 곧바로 상대주의의 득세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지금까지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의 독보적인 우월성의 포기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유일하고도 참된 종교’에서, 그저 세상의 수도 없이 많은 종교들 중의 하나로 전락할 지경에 서 있는 것이다. 근대의 다양하고 막강한 과학적, 검증적, 역사적 지식으로 무장한 많은 식자들은 이러한 상대주의라는 무기로 당시 그리스도교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탁월성, 혹은 우월성을 주장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바르트, 불트만, 브룬너 등으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다. 이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차이는 있지만 서구 계몽주의 사조의 대강을 흡수하면서도 정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보수적인 신학자들이다. 계몽주의의 도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를 대표로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정통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상대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리스도교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구분에서 보자면 옷토는 자유주의 라인에 속한 학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옷토의 시선은 그들과는 달리 좀 더 먼 곳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는 계몽주의의 도전을 그리스도교에 대한 위협 혹은 방어라는 선에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 듯싶다. 아니 그보다 그는 계몽주의 사조의 만연은 아예 종교라고 하는 영역을 소멸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옷토는 자신의 신학적 과업을 그리스도교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종교 그 자체의 수호로 잡게 된다. 즉 옷토는 계몽주의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차 조롱거리와 비웃음거리가 되어가는 종교를 다시 부활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옷토에게 있어서 이제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종교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종교를 종교로서 보지 않으려는 시각들, 이제 종교는 미천하거나 지식이 떨어지는 야만인들의 주술적 습관으로 치부해 버리는 서늘한 계몽주의적 판단을 교정시켜야 할 시대적 과업을 스스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종교 그 자체는 그리스도교 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다. 종교를 종교라고 보지 않게 된 다음의 그리스도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옷토의 고민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유사한 고민을 했었던 선배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의 작업에서부터 자신의 해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로 종교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요소, 즉 경험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종교를 비웃는 교양인들에게 종교란 합리성을 뛰어넘는 ‘절대의존의 감정’이었음을 전하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설교는 옷토에게 무척 매력적이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슐라이에르마허와 옷토의 동거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물론 옷토가 이 위대한 자유주의 신학자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그의 지난한 목적을 위해서 옷토는 그의 스승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옷토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적 감정’이 가지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성격을 지적하였다. 옷토가 보기에 슐라이에르마허 역시 종교의 본질을 정확히 조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옷토가 생각하는 종교의 본질적 요소는 절대성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이며, 또한 그것은 철저한 자기 비하가 전제되는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다. 옷토는 그러한 감정의 속성을 또한 비합리적인 것이라 보았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품을 떠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옷토의 새로운 개척 길에는 그보다 앞선 또 다른 중요한 여행자가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야콥 프리드리히 프리스(Jacob Friedrich Fies, 1773-1843). 당시 옷토는 칸트주의자이기도 했던 이 철학자를 괴팅엔 시절 그 대학의 철학과 강사였던 넬손(Leonard Nelson)을 통해 알게 된다. 옷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슐라이에르마허를 넘어 프리스를 선택한다. 우선 종교적 감정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프리스의 그것이 슐라이에르마허보다 훨씬 풍부하고 분명하다고 보았다. 또한 프리스는 이 감정을 확신, 인식 그리고 진리와 결부시켰다. 그리고 프리스 역시 종교와 도덕을 밀접한 연관 속에서 이해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칸트와는 달리 종교의 기원이 도덕적인 것에 근거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서 옷토는 프리스를 스승삼아 그의 본격적인 성스러움의 탐구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프리스는 칸트의 비판정신을 물려받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좀 더 나아가 그것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학자이기도 했다. 칸트는 가능한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선험적 인식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리스가 보기에 이것이 칸트의 실수였다고 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인식과정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방식을 해석해 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각자의 이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아울러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신과 물질의 실존에 대해서 증명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각자의 궁극적 이성이 그 양자의 현존을 전제하고 있음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프리스는 선험적인 진리가 아닌, ‘경험적 진리’만을 인정한다. 이런 전제 하에 프리스는 인식방법으로서 세 가지(지식, 믿음, 직관)를 제시한다. ‘지식’이란 관찰을 통하여 대상을 알게 되는 완전한 인식에 대한 확신이다. ‘믿음’이란 순수한 이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필수불가결한 확신이다. 즉 개념이나 이념 속에서 의식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직관이란 순수한 감정으로부터 오는 필수불가결한 확신이다. 바로 이와 같은 직관을 통하여 우리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프리스의 방법론은 곧바로 옷토의 학적 작업에 심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옷토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진리나 혹은 종교들의 상대적 진리에 대한 증명에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는 종교의 정신적인 근거를, 즉 선험적인 종교성이 무엇인지를 서술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자 이제 옷토가 추구하는 학문이 가지는 목적의 골격은 거의 다 드러났다. 이제 거기에 살만 붙이면 될 것이다.


종교는 스스로 존재한다. 바로 우리 안에 경험 이전의 그 무엇으로!

이후 옷토는 종교를 조롱하는 지식인들의 비웃음 바로 그 배후에 그것은 성스러운 모습으로 태초부터 빛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에 집중한다. 이론-방법론적으로 프리스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그의 성스러움을 향한 연구는 우연한 여행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그의 자필 여행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때는 1911년 그의 대표작 <성스러움의 의미>가 세상에 나오기 6년 전이다.

당시 그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로코라는 나라의 마가도르라는 항구도시를 여행 중이었다. 그때 그는 한 공회당에서 ‘거룩송’을 암송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옷토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 가장 성스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그의 여행기에 적어두고 있다. 그리고 떨려오는 온몸의 변화를 느끼며 소위 성스럽다 하는 것의 본질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다시 몇 차례의 세계 여행을 통해 다양한 종교 전통에서 이어져 오는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을 재차 확인하게 되고, 결국 최종 목적지에 그의 고단한 사유의 열차를 멈춰 서게 하였다. 그리고 그 열차가 멈춘 곳, 바로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성스러움’

바로 그것이 종교의 근본이다. 바로 그것이 종교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는 본래적인 것이고, 독립적인 것이고, 자류(自類)적(sui geneis)인 것이다. 성스러움이란 후천적 경험이 구축해 놓은 구성물도 아니고, 경험 이전에 우리 안에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특정한 속성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조롱거리가 될 수 없으며, 비웃음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이 종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조롱하고 비웃는 그 사람들조차 그 안에 선험적으로 무엇이 성스러운 것인가를 경험할 수 있는 코드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옷토의 확신은 결국 한권의 책으로 집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성스러움의 의미>이다.

앞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상당히 까다로운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의 부제만 살펴봐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신 관념의 비합리적인 요소와 그것의 합리적 요소와의 관계에 대하여”(Über das Irrationale in der Idee des Göttlichen und sein Verhältnis zum Rationalen) 옷토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신적인 것이라 인식하는 것들이 가지는 비합리적 요소를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미 그의 작업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인 논리 속에 담아 설명하려는 矛盾의 아이러니를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적인 것은, 곧 성스러움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안에 내장되어 있는 선험적 요소에 따라 경험적 세계에서 조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인간이 신적 요소를 경험하게 될 때, 옷토에 의하면, 두 가지 형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와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fascinas)가 바로 그것들이다.

결국 옷토는 성스러움이라는 것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비밀(mysterium)로 보았다. 성스러움이란 전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다.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자연적인 감정’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또 우리에게 이해되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반응할 뿐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두려움’과 ‘매혹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당연히 성스러움은 인간에게 낯설고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성스러움을 경험하게 되면 두려움과 경외를 느끼게 된다. 절대적 가치나 존재 앞에서 인간은 무한히 적어지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비하(卑下) 혹은 무화(無化)되는 감정이 경외심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두려움으로 점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 두려움 속에서 인간은 알 수 없는 평안과 구원의 즐거움을 맛본다.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라는 비밀이 주는 두 번째 선물이다. 옷토는 그것을 ‘매혹적인 신비’라 불렀다. 두려움 속에서 절대적 가치를 체험하는 것, 일종의 구원체험이 바로 성스러움의 매혹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옷토는 기존의 교의적 단어나 용어의 사용이 없이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을 중립저인 용어들을 사용해 설명해 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옷토는 계몽주의자들에게 종교란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결국 옷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는 또 다른 의미의 ‘神論’적 서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옷토의 <성스러움>은 기존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언급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전통들에 총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신론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옷토는 기존의 신학적 용어들을 포기한다. 따라서 그는 신이라는 이름 대신에 <성스러움>이라는 지극히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관념 속에 빠져 있을 수 있는 기존의 신존 존재에 대한 증명보다는 그것을 만나고 경험하는 인간의 측면에서 새롭게 그만의 ‘신론’(theology)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옷토의 이러한 의도와 시도는 곧바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비판에 직면한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물론 바르트였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고백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이 보수주의 신학자는 신학의 보편화를 위하여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희석시킬 가능성이 농후한 옷토의 이러한 시도를 편안하게 앉아 감상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곧바로 그는 옷토의 성스러움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과는 다른 그 무엇이라 일갈한다. 결국 옷토의 성스러움은, 바르트가 보기에는, 자연의 힘을 추상화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은총과 구원으로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아닌 것이다. 브룬너 역시 옷토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우선 브룬너는 자신의 책 “교의학”에서 옷토의 성스러움은 ‘숨으신 하느님’(deus abconditus)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브룬너가 곧바로 옷토의 입장에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옷토의 ‘성스러움’(Das Heilige)은 결국 인격을 지니신 거룩하신 성서의 ‘하느님’(Der Heilige)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브룬너는 옷토의 성스러움에서는 성서가 말하는 ‘계시하시는 하느님’(Deus revelatus)은 찾아 볼 수 없다고 보았다. 불트만의 경우도 옷토에게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을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옷토가 그러한 신적 존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본 반면, 불트만은 그런 존재로서 하느님을 상정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이들은 결코 함께 갈 수 없었다. 이들의 갈등은 곧바로 현실 세계에서도 드러났는데, 마르부르크 대학에는 이와 관련된 오래된 이야기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옷토가 세계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그때 수집한 다양한 종교전통들의 예술품들을 전시할 종교박물관을 마르부르크에 세우고자 할 때였다. 물론 이 박물관은 지금까지도 대학 도시 마르부르크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물로 살아남아있다. 여하튼 당시 적잖은 수의 학생들이 옷토가 수업하는 장소로 밀려들어와 옷토의 박물관 추진 계획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한다. 이들 학생들은 주로 바르트와 불트만 신학에 매료된 학생들이었고, 이들은 우상들의 신전과도 같은 종교박물관을 건립하려는 옷토의 계획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따져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체 없이 옷토는 자신의 학문적, 신앙적 과업을 실행해 나갔고, 이는 그의 학문세계의 후반기에도 어김없이 드러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옷토는 자신의 성스러움에 대한 분석틀을 가지고 기존의 종교전통들을 비교 연구하여 종교들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테제를 입증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물로 등장한 것이 “자비 인도종교와 그리스도교”(Die Gnadenreligion Indiens und das Christentum) 그리고 “동서의 신비주의”(West-östliche Mystik)란 책이다. “자비 인도종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그는 특히 수정된 불이론 베단타 학파의 창시자이기도 한 라마누자(Ramanuja, 1056-1137)에 주목하였다. 라마누자는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하나 됨을 강조한 샹카라(Śankara, 788-820)의 베단타 철학을 계승하고 있지만, ‘속성이 없는’(nirguna) 브라흐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바라본 샹카라와는 달리 인격신의 개념을 과감하게 수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라마누자는 브라흐만을 ‘주님’으로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구원을 위한 최선의 길임을 주장하였다. 바로 이 점 즉 신을 인격으로 파악한 라마누자의 신학을 옷토는 관심있게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서의 신비주의”라는 연구서에서는 인도 베단타학파의 위대한 사상가 샹카라와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엑카르트(Meister Eckhardt, 1260-1327?)를 비교하였다. 동서의 신비주의 비교연구로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이 책에서 옷토는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즉 금욕적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비금욕적이었던 샹카라의 그것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 역시 숨길 수 없는 그리스도교 신자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주 관심 분야인 힌두교의 종교를 연구하기 위해 옷토는 친히 산스크리트어를 습득하고, 심지어 각 연구 대상의 중요한 경전들을 직접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학자로서의 성실한 자세를 잊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상대성을 말하면서도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던 트뢸치와는 분명히 비교된다.


그가 남긴 것들

<성스러움의 의미>가 출판되었을 때 사계로부터 받았던 뜨거운 반응, 그리고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는 이 책에 대한 관심도와 열독률과는 달리, 지금의 옷토는 무척이나 외롭다. 옷토로 인하여 종교학은 커다란 후원자를 얻었고, 또 그로 인해 상당한 정도의 학문적 진보를 얻어냈지만, 이제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학 내에서도 옷토는 더 이상 유통되는 현역 상품은 못된다. 그 이유는 이미 처음부터 옷토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즉 그가 줄곧 주장하던 성스러움이라는 것이 가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특성 때문이다. 옷토 이후 종교학의 흐름도 점차 딜타이의 생철학과 훗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수용하면서 다분히 심리분석적인 옷토 류의 연구 방법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아무리 성스러움이 중요하고, 또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적 요소라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라는 현장성과 동시대성을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추상적 관념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종교 이외의 고대 종교를 논할 때 우리는 그들 종교인들이 경험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종교경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발언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즉 구체적이고 다양한 종교들의 역사 앞에서 옷토가 찾아낸 종교의 보편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성스러움이라는 것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선택된 성스러움은 오히려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결국 옷토의 작업은 그가 그토록 거절하고 싶어 하던 진화주의자들의 종교기원 찾기와 유사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 역시 서글픈 아이러니이다.

“옷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는 종교학 책도, 신학 책도 아닙니다. 그건 차라리 문학서적으로 분류해야 할 겁니다! 근대적 의미의 학문방법이 제대로 구현된 구석을 이 책에서 찾아내기가 얼마나 곤란한지 아세요? 옷토의 <성스러움>은 말 그래도 관념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극도의 역사 비평적 종교학을 지향하는 내 지도교수는 옷토 세미나 때마다 이렇게 일갈하곤 했다. 물론 내 지도교수의 저 발언에도 어느 정도의 라이브 성 과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역시 논문이나 연구서적에서 옷토를 논하게 되면, 저런 식의 혹평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꾸밈없는 자신의 직제자들과의 토론 시간에 슬쩍 그의 속마음은 저런 식으로 노출되곤 하였다.

하지만 옷토의 성스러움이 곧장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현대 종교학의 또 다른 거장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에게로 이어진다. 또한 그가 진화주의와 환원주의자들에게 보여주었던 단호한 태도 역시 여전히 유효한 채 종교학의 주요한 특성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경험에 대한 주도면밀한 그의 묘사와 관찰은 여전히 종교심리학과 인류학 분야에서는 중요한 모범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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