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2002.07.09 04:58
아빠 왜 저 사람 도망만 다녀? (영화평-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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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저 사람 왜 도망만 다녀?”
- 開闢은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1991년 한국영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임권택 감독의 역작!
총제작 기간 1년!!
총 제작비 15억원!!!
총 동원인원 일만오천명!!!!
민초들의 침묵하는 고요에서 숨가쁜 혁명의 외침으로 급격히 빨
려드는 ‘개벽’이 있습니다.
위의 문장은 내가 평을 쓰기 위해 거금 4,500원을 투자한 開闢이란 영화의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치졸한 문구이다. 이 문구는 우리의 영화산업이 얼마나 낙후되고 영세적인지를 보여주는 정직한 표현이다. 아니 어쩌면 해방 후 46년간이나 미국식 자본주의에 철저히 세뇌당한 우리의 똘머리가 영화의 선전방식도 투자한 액수만을 가지고 자랑하게끔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했나보다.
아니 대관절 좋은 영화와 투자한 금액 사이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단 말인가? 대대적인 물량공세만으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돈 없는 놈은 영화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한단 말인가? 제발 이런 식의 치졸한 선전문구가 이 땅 영화계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바로 이 단편적인 사건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를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제작진들과 이 스텝들 간의 넘을 수 없는 사상적인 단절을 보여준다. 나름대로 의식 있는, 그리고 투철한 사상적 반성을 거친 스텝들과 돈 계산에 급급한 제작진들 간의 넘을 수 없는 차이. 이 영화 역시 이 깊은 차이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자, 이제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이 어마어마한 대작(?)을 세밀히 해부해보자. 영화를 평함에 있어 나는 많은 돈을 투자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점에서 먼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장점을 읊어주고 나서 이 영화의 문제점을 꼬집어보도록 하겠다.
開闢이 갖고 있는 장점은 무엇인가?
먼저 이 영화 開闢은 기존의 史劇과는 달리 역사에 대한 해석의 치밀함과 그 배면에 흐르는 사상사적 깊이에 대한 철저한 계산이 확실히 스며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공은 대부분 각본을 맡은 도올 김용옥선생과 이 영화의 고문 격으로 고증역을 담당한 표영삼선생의 노고에 있다. 開闢의 개봉과 더불어 天道敎측은 자신들의 기관지인 天道敎月報에 앞서 언급한 양씨의 영화를 지탱해주고 있는 동학사상에 대한 자기 해석을 전재해주고 있다.
먼저 양씨는 한 목소리로 동학이 말하는 개벽이란 혁명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동학의 개벽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관의 변화이다. 즉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의 자리’의 변화는 그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삶에 대한 해석이 바뀔 때에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영화 開闢은 팽배한 위기의식 속에 절박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동한 동학의 생각을 이와 같은 기준에서 끈기 있게 그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학의 역사적인 맥락을, 혹 미련한 관객들이 놓치지나 않을까 개벽의 제작진들은 적절한 화면이 나올 때마다 친절하게도 자막으로 처리해주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역사가 단지 흥밋거리 오징어 땅콩으로만 전락되어버리는 우리네 영화사정을 돌이켜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 영화의 탁월함이 나타나는 두 번째 요소로는 정확하고도 심미적인 각도를 유지한 카메라와 이를 보조한 조명에 있다. 촬영감독은 꾸준히 자신의 명성을 굳히고 있는 정일성씨가 맡았는데 그의 카메라 앵글 잡는 실력은 이미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듯 하다. 양씨는 2시간 10분이라는 한국영화치고는 결코 짧지 않은 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수려한 예술사진처럼 꾸며주고 있다. 그리고 차정남씨의 조명도 은은한 우리 天地의 氣를 잘 살려주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훌륭함의 이면에는 1년여의 촬영기간을 허락해주며 돈을 투자해준 제작진의 배려도 숨길 수 없는 공로이다. 자본의 위대함이 이런 곳에 있다(?).
이제 이 정도로 이 영화의 좋은 면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이 영화가 안고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開闢은 사상의 깊이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내가 이 글의 타이틀로 뽑아낸 어린 꼬마아이의 외침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海月이 정부의 끄나풀들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이 나왔다. 그 때 바로 내 앞에서 아빠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던 꼬마가 짧게 소리쳤다.
“아빠 저 사람 왜 도망 다녀?”
질문을 받은 그 꼬마의 아빠는 난감해하는 한숨소리를 내더니 “계속 영화 봐보자” 라는 땜빵식의 답변만을 토해놓고 내내 영화 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 후 나는 그 꼬마의 질문이 해결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충분히 꼬마의 질문에 답변해주리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즈음 海月의 마지막 도바리가 펼쳐질 때 다시 그 꼬마가 아빠에게 소리쳤다.
“아빠 저 사람 왜 도망만 다녀?”
이것이 이 영화의 한계이다.
물론 영화는 역사 강의를 위한 보교재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자기설명이 가능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화의 자기 논리를 누구든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충분한 자기 설명을 소유하지 못했다. 사실 나조차도 왜 海月이 정신없는 도바리를 계속하고 있는지 무척 답답해하기도 했다.
왜 감독은 동학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제시를 마다했는가? 왜 海月의 그 처절한 도바리를 관객들에게 이해시키지 못하고 있는가? 도대체 해월이 왜 도망 다니고 동학이 왜 핍박을 받아야만 했는가? 도대체 왜? 왜 설명이 없는가? 해월은 그저 도망 다니기 위해 동학의 道統을 전수받았는가?
그것은 언어의 올가미이다.
뻣뻣한 논리 속에 그 모든 느낌이 다 잡혀질 수 있다고 오판했는가? 왜 도올선생은 자신이 그토록 주창한 「느낌의 認識論」을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서는 적용시키지 못했는가?
모든 것이 언어였다. 죽음을 앞둔 水雲과 지방 집정관과의 최후 심문도, 海月이 바닷가 갯벌에서 부인 손씨와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주는 언설도 모두 언어였다.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고고한 학자의 언어로만 가득하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왜 감독은 無學者인 海月에게서, 종이공장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했던 초기 임금노동자인 海月에게 그토록 체계적인 언설만을 강요했는가?
나는 말한다. 그것은 제작진의 끝없는 욕망 때문이다. 제작진은 동학의 모든 것을 이 한 편의 영화로 완결 짖고 싶었던 게다. 그래서 영화 전편을 아주 농축된 압축언어로, 그것도 특별히 교육받은 몇몇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로 쭉 깔아버린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욕심이 영화를 어색한 다큐멘타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즉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내용을 소화시키려다 보니 영화만이 갖는 극적인 효과가 반감되었고, 또한 영화 전편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일정한 맥락형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영화는 철학책이 아니다. 영화는 우리의 느낌에 호소하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保持하고 있다. 그런데 開闢은 이러한 영화의 속성을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극적인 효과로서 관객들의 마음에 동학의 역사성을 심어주기 보다는 언어라는 극히 건조한 논리체계로서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려고하는 범하기 쉬운 오류를 저질러버렸다.
작자는 동학이 일어날 즈음의 시대적인 배경과 더불어 동학을 바라보는 당시 지배층의 시각과 또 동학에 귀의하고 있었던 민초들의 시각을 정직하게 드러냈어야만 했다. 그래서 왜 동학이 태동되었으며, 그리고 교조인 水雲이 왜 처형되어야만 했으며, 또 海月은 왜 도바리의 명수가 되어야만 했고, 심지어 서양의 종교인 西學도 인정해가는 상황 속에서 자생적이고도 극히 유교적인 동학에 대해서만은 그토록 민감하게 거부했는가에 대한 일단의 설명이 가해져야만 했다. 그것도 뻣뻣한 언어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건묘사를 통한 느낌의 체계에 의해서 설명했어야만 했다.
이는 이 영화가 갖는 두 번째 단점인 초점(focus)의 산만화(散漫化)에도 연결된다. 이 영화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일정한 시각이 빠져버렸다. 영화의 타이틀을 開闢으로 잡고 주로 海月의 생애를 묘사한 것을 보면 해월이 주인공임은 확실한데 솔직히 내가 보기에 이 영화 속에 나타나는 해월의 시각은 무진장 희미하다. 초점이 있다면 그것은 시나리오 작가의 시각만이 있을 뿐 그것이 작품화되어 살아있는 극적인물로는 승화시키지 못했다. 작자가 극적 효과를 위해 임의로 설정한 판옥이 父子의 시각도 영화진행을 위해서는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도 있는데 실상 영화 전반적인 주제의 초점으로서는 왠지 무게가 가볍다. 그리고 극적 효과를 위해 상정된 판옥이 父子의 스토리도 나의 정직한 시각에는 무척 촌스러운 설정이다. 시나리오 작가인 도올선생은 판옥이 부자라는 캐릭터의 설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판옥이 부자는 물론 상상의 인물(imaginary figure)이다. 그러나 이 인물의 집요한 추적은 해월이 살았던 시대를 지배하는 체제의 현실을 드러낸다. 추적과 쫓김(도바리)의 역학 속에 동학의 사상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건들이 전개되고 급기야 그 추적의 주체는 추적의 행위에 대한 극적인 인식의 전환을 일으킴으로서 이 작품의 주제는 장엄한 피날레를 맞이하게 되고 해월은 진정한 역사의 주체로서 승리를 구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판옥이 부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너무 신파조였다. 뻔 한 결과였다. 이미 판옥이 부자가 등장함과 동시에 관객들은 이 스토리의 종말을 예견할 수 있음으로 인해 극의 재미는 그만큼 반감되었다. 작자는 해월이 살았던 시대를 지배하는 체제의 현실을 판옥이 부자라는 어색한 인물을 통해 표현하기 보다는 당시 조정의 시각을 있는 그대로 표출시켰어야 했다. 즉 조정 회의나 술좌석, 혹은 사랑방 같은데서 이루어지는 당시 식자층들의 세태이해 등을 밀도 있게 묘사하는 것이 훨씬 극적 효과를 배가 시켰을 것이다. 허나 작자는 판옥이 부자라는 또 하나의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영화를 주도하는 시각을 더 흐려버리고 말았다. 그보다는 해월 자신이나 혹은 부인인 손씨 등을 좀 더 부각시켰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개벽은 인물연구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 이는 특히 해월에게서 드러나는데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해월은 너무 권위적이다. 이것은 캐스팅의 실패에도 연유한다. 물론 이덕화씨의 연기는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無學者이며 상인계급에 속했던 해월의 모습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이덕화는 너무 양반적인 해월을 묘사했다. 해월이 종교지도자였긴 하나 이 영화는 그를 너무 슈퍼맨처럼 그렸다. 그보다 고민하며 갈등하는 해월의 모습이 충분히 묘사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는 해월의 출신성분과 그의 도통전수를 통해서도 한번 음미해볼만한 요소이다. 신뢰할만한 史書들은 해월이 수운에게서 직접 도통을 전수받았음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당시 지식층 중에서도 동학에 귀의한 사람들이 상당수였음을 미루어 볼 때 해월의 도통전수에 이의를 제기하고 해월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해월이 敎主로서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영화는 거기에 대한 대답이 없다. 다만 해월은 원래 권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양놈들이 자신들의 교주인 그리스도를 곧잘 슈퍼스타로 묘사하는 범례를 쉽게 차용한 듯싶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나는 인간 해월의 실존적인 고뇌와 갈등을 연기하는 데는 이덕화보다는 안성기 같은 연기자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한다. 내 생각에 감독이 이덕화를 캐스팅한 것은 해월의 뻐얼건 대머리를 화면에 잡아두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기실 이덕화의 대머리는 해월의 마지막 인상을 묘사하기엔 무진장 적절했다. 허나 캐스팅이라는 것이 어찌 한 장면만을 위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또 한 가지 개벽은 개벽의 구체적인 실례 제시에 아주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동학의 개벽에 대한 해석은 기존의 아류적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탁월했고 또 的確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에서 뿐이었다. 도대체 구체적으로 동학이 얘기하는 개벽이 절절한 삶의 자리에서는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에 대한 묘사가 없다.
그만한 실례가 없기 때문인가? 천만에, 해월의 삶 자체가 개벽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해월에게는 기존의 문화가치를 새롭게 해석하는 투명한 일화들이 얼마든지 있다. “向我設位”, “以天食天”, “夫婦生活에 대한 가르침”, “베 짜는 며느리에 대한 가르침”, “어린 아이도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설교”, “집에 오는 손님이 하늘님이라는 교훈” 등 해월은 그의 일생을 통해 개벽을 실천하고 있었다. 작자는 바로 이러한 해월의 삶의 행적을 통해 구체적으로 개벽이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대한 실례를 보여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이 영화는 언어로만 이 생생한 개벽을 잡아채려 했는지.... 왜 그리 기가막힌 극적 효과를 그렇게도 철저히 외면하는지...
그러기에 開闢은 다시 만들어져야만 한다.
이토록 훌륭한 주제를 이 정도의 영화에서 끝나게 할 수는 없다. 보다 생생한 영화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토록 피맺힌 조선조 후기 우리 민초들의 몸짓을 언어로만 구속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나는 또 하나의 개벽을 결론으로 내어놓는다. 독자들은 평가하라, 누구의 개벽이 더 절실한 개벽인가를...
이것은 내가 구상한 새로운 開闢의 大綱이다.
먼저 영화는 조정회의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당시 도전해오는 외세와 막 득세하기 시작한 동학과 서학 등에 대한 지배계급의 고정된 시각을 보여준다. 그 후 화면은 민초들에게로 돌려진다. 그리고 이때의 화면구성은 상당히 스피디하게 진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번져오는 전염병의 피해, 계속되는 지방 관리들의 횡포, 불어만 나는 流民들, 그리고 그 속에 섞인 비참한 流民 중의 한사람인 水雲 崔濟愚. 이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피디하게 그러나 초점은 정확히 유지하면서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구성으로 인해 당시 시대에 대한 양 계급의 시각과 이러한 틈새에 동학이 어떻게 성장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다 머슴으로 일하다 동학에 귀의하는 인간 해월을 묘사한 후, 수많은 도인들 속에서 겸양과 성실함으로 2대 교주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인간 해월을 클로즈 업 시킨다. 카메라는 그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 후 수없이 반복되는 도바리 속에서 동일한 민초들을 만나 그들에게 개벽의 실상을 몸으로 보여주는 해월의 피비린내 나는 삶의 현장을 언어로서가 아니라 느낌으로서, 그리고 사건으로서 붙잡는다. 그리고 개벽에 대한 이해의 차이 역시 아무런 의도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해월은 계속해서 일반인들의 상식을 바꾸기 위해 몸부림친다. 向我設位를 설교하며, 여인네를 귀히 여기며, 아이들 속에서 하늘님을 발견하며, 스스로 일함으로서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우며, 일하는 아낙네의 땀방울 속에서 하늘님을 고백하는 해월, 그리고 그러한 해월의 인간애에 감복하며 차차 동학에 귀의하는 수많은 민초들. 비록 혁명은 실패하지만 그 마음속에 끈끈한 의식만은 남는다. 그래서 해월은 영원히 산다. 개벽하려는 민초들의 의지 속에서...
그리고 새로이 만들어지는 개벽은 나의 앞에서 아빠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그 꼬마아이의 정직한 물음에 분명한 답변을 주어야만 한다.
“아빠 저 사람 왜 도망만 다녀?”
“응, 그건 우리의 상식을 바꾸기 위해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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